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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주자학][성리학]주자학(성리학)의 특징, 주자학(성리학)의 심성론, 주자학(성리학)의 전래, 주자학(성리학)의 흐름, 주자학(성리학)의 심화, 주자학(성리학)과 주자성리학, 주자학(성리학)의 한계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주자학(성리학)의 특징
1. 정주학의 특징
2. 主知主義 특징
3. 禮崇尙의 풍토
4. 名分論的 사고가 팽배했다는 점
5. 主知論의 보수성
6. 人尊精神의 지향

Ⅱ. 주자학(성리학)의 심성론

Ⅲ. 주자학(성리학)의 전래

Ⅳ. 주자학(성리학)의 흐름

Ⅴ. 주자학(성리학)의 심화

Ⅵ. 주자학(성리학)과 주자성리학

Ⅶ. 주자학(성리학)의 한계

참고문헌

본문내용

아들인 李達尊(1313-1340), 백문보, 최문도, 윤택 등을 꼽을 수 있다. 이곡과 이들과의 관계는 그야말로 동지적 관계라고 할 수 있으니, 이들은 출신배경과 학문 그리고 경세관이 서로 비슷한 新興儒臣들이었다. 고려후기 신흥유신들의 이러한 인간관계들을 통해서 새로운 유학인 신유학이 전파될 수 있었고, 서로 같은 동지의식과 행동양식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이다.
②를 통하여, 우리는 앞서 최해의 「예산은자전」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그 자신도 당시 관료사회의 생리에 추종하지 않고 새로운 이념으로 무장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기개와 실천력을 갖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최해의 연장선상에서 이어지는 그의 정체성 확보 노력은, 자신을 성찰적으로 바라보며 자조할 수박에 없었던 전 세대의 최해 단계를 구체적으로 뛰어넘고 있다. 정현숙 단계에서는 신흥사대부에 대한 계층적 성찰이 ⑥에서 보듯, 당시 막 실천되기 시작한 3년상을 兩親喪에서 모두 3년씩 廬墓하고 있는 신유학적인 孝의 구체적 실천으로, ⑦에서 보듯, 死地를 무릅쓰는 국가에 대한 忠의 구체적 실천으로 일상적인 삶의 수준에서 검증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일상적 삶의 수준에서의 신유학적 이념을 구현하는 신흥사대부의 모습은 金震陽의 인물전인 李崇仁의 「草屋子傳」에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이숭인과 김진양은 둘 다 이색의 門生으로서 대단히 친밀한 사이였는데, 이숭인은 이처럼 절친했던 벗 김진양의 士君子다운 풍모를 아름답게 여겨 그의 전을 지었던 듯하다. 이 작품은 서두에서 김진양의 歷官과 인물됨을 간결하게 제시하고, 중간부분에서 작자와의 친분관계를 밝힌 다음 김진양의 향리 경주에서 둘이 함께 신라의 고적을 周覽한 사실을 유려한 필치로 적고 있다
안향은 일찍이 원으로부터 신유학을 받아들이면서, 일상의 현실생활 속에서 주어진 사회관계인간관계 속에서 효도하고, 충성하고, 禮를 행하고, 信義를 베푸는 실천 속에 성인의 도가 있는 것이지, 현실을 떠난 虛無空寂한 곳에 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런 까닭에 실제로 그의 삶은 현실을 떠난 곳에서 진리를 찾아야 하는 이원론적인 삶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믿고 신봉하는 진리로서의 신유학을 실천적으로 적용하고 검증해나가는 투쟁의 장이었다. 충렬왕 원년, 그가 상주판관으로 나갔을 때, 여자 무당 3인이 있어 妖神을 받들고 뭇사람을 유혹하여, 陜州로부터 군현을 차례로 다니면서, 그 위세가 수령을 엎드리게 할 만큼 대단하였다. 그리하여 안향이 그들을 치죄하자, 그들은 도리어 神의 말을 칭탁하여 온 마을을 협박하였고, 이에 따라 상주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하였다. 하지만 안향은 神의 말을 칭탁하여 禍福으로써 위협하는 상대방의 공격에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맞서 싸움으로 그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이러한 안향의 모습에는,“성인의 도는 현실생활 속에서 윤리를 실천하는 것 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실천적 신유학의 모토가 담겨 있는데, 우리는 그러한 모습을 여기 정현숙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⑤에서 보듯, 어느 지방이 되었건, 그가 지방관이 되어서 그곳의 淫祠를 금지하고 무당을 좇는 일은, 실천적 신유학으로 무장한 한 지방관으로서의 정체성의 한 표현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④에서 보듯, 그의 불교와 권신에 대한 이러한 신유학적 삶의 실천으로 인해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까지 이르렀던 것인데, 그 정체성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비록 육체적인 목숨을 요구한다 하더라도, 신유학으로 무장한 신흥사대부라는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을 포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정체성에 따른 삶의 구체적 표현이 한 편으로는 ②,⑥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신유학의 실천적 윤리 덕목의 구체적 실천으로, 또 한편으로는 ③,④,⑤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불교와 무속과의 사상적 투쟁으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실천은 각기 둘이 아니라, 신흥사대부로서의 새로운 정체성의 삶의 구현 속에 통일적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Ⅶ. 주자학(성리학)의 한계
조선 중기 이후 성리학은 이황과 이이를 기점으로 다양한 학파의 분개를 보게 되고 그것은 바로 철학사상의 넓이와 깊이를 더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한편 이러한 현상은 전반적 질서의 안정에 따르는 지배계급내의 일종의 여유를 반영하는 ‘학문을 위한 학문’의 전개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이제 성리학은 강렬한 현실지향의식이라는 원래의 특색을 탈피한 것이다. 더 이상의 근본적인 개혁을 필요로 하지 않는 성리학은 김장생 이후 ‘의리학의 형식주의적 객관화’인 예학을 중심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붕당정치의 결과 발생한 노골적인 내부의 정치적인 투쟁은 영조 대에 이르러 노론에 의한 일당정제의 결과를 초래했고 그것은 과거제의 유명무실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양반관료에 의한 지배질서는 더 이상 새로운 하부계층의 충원이라는 최소한의 생명력마저 상실하게 된 것이다.
조선 후기 사회의 붕괴과정은 양반계층의 몰락, 전쟁으로 인한 피폐, 인구증가, 상품경제의 발달, 노비제의 붕괴 등으로 나타났다. 이런 전반적인 혼란은 성리학에 있어서는 본래의 경학 중심에서 시장학 위주의 것으로 변모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제 조선사회는 경학 중심의 성리학의 회복으로 치유될 상황에 처하지 않았다. 성리학이 지향하는 양반지식인 중심의 신분질서는 필연적으로 무너질 역사의 운명에 처한 것이다. 문제는 성리학의 건설이 아니라 오히려 그 파괴를 통한 극복에 있게 된 것이다. 여기서 이와 같은 역사적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논리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조선후기의 실학이다.
참고문헌
김항수, 조선전기의 성리학, 한국사 8, 한길사, 1994
문철영, 주자 성리학의 수용과 특징, 한국사 21 :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국사편찬위원회, 1996
변동명, 고려후기 성리학 수용 연구, 일조각, 1995
성교진 저, 송대 신유학과 한국성리사상, 이문출판사, 1995
유초하, 관학파·조선 성리학의 이론적 정초, 조선유학의 학파들, 한국사상사연구회, 예문서원, 1996
오이환, 이원명 - 고려시대 성리학 수용 연구, 오늘의 동양사상 제1호(창간호), 예문동양사상연구원,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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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5.14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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