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 리더십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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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 론
Ⅱ .박정희 대통령의 일생
1 .어린 시절의 박정희
2 .군 인 박정희
3 .대통령 박정희
4 .유신 이후의 정권
Ⅲ .리더십이론에 대입하여 본 박정희 리더십
1 .특성이론적 관점의 특성
2 .상황이론적 관점의 특성
3 .변혁이론적 관점의 특성
Ⅳ .박정희 대통령의 리더십 평가
Ⅴ .결론

본문내용

개헌과 10월 유신을 통해 적나라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5.16직전 당시의 상황을 사회적 위기로 진단했는데, 즉 그는 자신의 집권에 반하는 세력을 반사회적 요소로 규정하여 군대와 같은 물리적 폭력을 행했다.
위기를 관리하는 것에 있어선 집권 초반 당근과 채찍의 완급을 조절하며 권력을 창조적으로 절약했다. 63년 상당수 군부세력의 반대를 무릅쓰고 5대 대선에 출마, 민선대통령이 됨으로써 법적인 정통성을 추인 받은 것이 대표적인 사례로 지적됐다. 하지만 집권 말기에 이르러서는 긴급조치를 연달아 발동, 위기국면을 구조적으로 심화시켰다는 비판을 받았다.
인물의 발탁과 운용에 두루 능했던 인사전략가로써 군부를 배경으로 한 직계에게 정권안보를 맡기고 전문영역에는 기술 관료들을 대거 등용했다. 72년 유신 이후로부터는 특유의 용인술을 잃어버린 채 오로지 맹목적인 충성심의 잣대로 인물을 기용한 면이 있었던 적이 있다.
민주적인 리더십의 관점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행정 분야에서는 권한위임으로 효과를 봤지만 정치 분야에서는 철저한 독점으로 반민주주의 제도화라는 오점을 남겼고, 인권탄압으로 억압적 사회를 구축했고 사회를 병영화 했으며 권력유지를 위해 지역주의를 동원한 점 등을 들어 그를 군부 권위주의적 지도자로 평가받았다.
박정희 대통령의 리더십의 비결로 어떠한 결정을 내림에 있어서 심사숙고하며 충동적인 결정을 하지 않았다. 신중하고 꼼꼼하게 상황을 분석하여 적합한 방법을 강구할 줄 아는 점이 있었으며, 조직에 문제가 있으면 회의를 소집하여 해결하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조직구성원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발전시키고자 하는 모습을 알 수 있다. 단순하게 자신의 판단과 결정만 믿고 추진했더라면 조직 구성원, 즉 자신의
측근들은 그의 말에 응하지 않으며 반발이 일어났을 것이다. 이렇듯 문제의 발생함에 있어 그리고 리더십을 발휘함에 있어 부하 직원과의 상호작용을 잊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항상 어떠한 계획의 시행에 있어서 필요한 조직이 생성되면 불필요하게 과도한 조직의 규모 보다는 조직을 최소한으로 간결하게 하고자 했다. 당시 청와대 인원은 220명을 유지했다고 한다. 노무현 정부의 수가 490명, 김대중 정부의 수가 400명이였던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간결한 인원을 선호했다. 또한 박정희의 인사정책에 대 해선 말이 많다. 우선은 그의 인재 개발과 장관 등 직위에 있는 인사를 하는 것에 있어서는 아주 까다로웠다고 한다. 나라의 일을 도맡아 하는 인사들이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은 잘 안다. 하지만 정실이나 학연에 치우쳐 채용 되는 경우가 많은 현실을 비교해 볼 때 박 대통령의 인사 정책은, 인재를 개발하여 국민들이 만족할 때 까지 그렇게 인재를 개발시키고 능력을 행사 할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것은 그의 주변에 훌륭한 부하들이 있게 해주는 밑바탕 이였다고 본다.
그 시대, 당시에 박 대통령이 권력과 리더십을 행사함에 있어서의 특징을 살펴보면 그 자리에 오르게 되는 과정에서나 재임 시의 리더십 행사에 있어서 북한의 존재로 말미암아 유리한 영향을 받거나 그것을 십분 활용하였다. 또한 리더십 행사는 다른 국가기관에 의해서는 물론이고 시민사회 내 어떤 세력에 의해서도 지속적으로 견제되지 않았다. 지속적인 견제 활동을 할 단체나 기관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부패가 일어나는 것은 대부분의 대통령 재임 시 항상 있었던 일이다.
반의회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대체로 정부운영의 과정과 절차를 민주적 방식으로 하는 것보다는 결과로서의 업적, 특히 경제적 업적을 산출하는 데에 집착하였다. 대표적으로 박 대통령이 결과를 산출해 내는 것에만 집중했다는 것은 현대에 들어서 많이 지적당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적인 절차나 민주성에 대한 모든 개념들을 무시하고 독재로 인해 경제 부강만을 꿈꿔온 박 대통령은 과정에서 나오는 부패는 일단 접어두고 경제 강국의 결과만을 쫓아갔다. 후에 부작용 및 폐해가 나타나 오랜 시간의 개선 방안이 필요하게 만들었던 이유도 이러한 특성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대 부분의 대통령이 권위주의적인 면이 있었듯이 박 대통령도 이에 속한다. 그 시절 아직까지 의식 수준에 있어서 많이 개방적이지 못했다. 권위주의가 모든 생활 속에 녹아 있었으며 이는 나중에 시민들의 의식 성장과 맞물려 운동이 일어나고 문제가 발생하게 되기도 했다.
Ⅴ. 결 론
교도적 기업가형이라 정의 할 수 있는 박정희의 리더십은 모든 권력은 총구로부터 나온다는 마오저뚱의 명언으로서 설명될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항상 성장을 위해서는 소수의 입장은 배제 되어야 하며, 억압과 탄압 그리고 성장은 항시 비례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던 사람이었으며, 박정희 리더십은 기본적으로 공포와 억압에 기초하였으며 용인술을 십분 활용하여 장차 자신에게 해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은 철저하게 제거하였다. 김호진, 「대통령과 리더십」, 청림출판, 2006, p 227
후세에 이르러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을 재평가하고 그가 추진했던 경제성장 논리에 대한 비판의 여지가 많지만, 오늘날 대한민국의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한 것에 그의 리더십의 영향이 작다고는 선뜻 답하기 어려분 부분이 있을 것이다.
한 시대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했던 그는 사형선고라는 인생의 위기 또한 여러 번 맞아가며 결국 자신의 꿈을 이루게 되었고,
훌륭한 대통령 이었다는 것과, 독단적이고 비민주적인 잘못된 대통령이라는
평가가 극명하게 대립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애틋한 향수를 갖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그것은 그의 죽음 또한 이러한 그의 인생처럼 드라마틱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그가 가진 양면성이나 리더십에 관한 부분보다는 그가 추구했던 신념과 결과에 대해서만 논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참고 문헌
김호진, 「대통령과 리더십」, 청림출판, 2006
김형아, 「박정희의 양날의 선택」, 일조각, 2005
노찬백 외 3인, 「한국정치의 이해」, 형설출판사, 2008
신종열, 「박정희의 정치노선」, 영남대 행정대학원 논문집, 2006 08
최진, 「대통령 리더십」, 나남출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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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7.10
  • 저작시기2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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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688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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