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조선후기 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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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사 조선후기 민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목 차>
Ⅰ. 서론

Ⅱ. 본론

1. 19세기 전반기 사회정세와 평안도

1) 세도정권 성립기의 중앙과 지방
① 세도정권성립과 성격
② 지방사회성장과 동요

2) 평안도 농민전쟁의 발생배경

2. 농민전쟁의 전개과정

1) 주도층의 형성과 농민전쟁의 준비

2) 농민군의 청천강 이북지역 장악

3) 정주성에서의 장기항전

4) 농민전쟁에 대한 중앙정부의 대책

3. 평안도 농민전쟁의 참가 층

4. 평안도 농민전쟁의 역사적 성격과 의의

Ⅲ.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하였으므로 주도층의 성격과 관계없이 이 전쟁은 농민적 성격을 갖게 되는 것이다.
4. 평안도 농민전쟁의 역사적 성격과 의의
평안도 농민전쟁은 봉건제의 위기가 심화되는 가운데 봉건사회 내부에서 새롭게 성장한 신흥 상공업세력과 기존 정치권력에서 배제된 몰락양반의 연합에 의해 추진된 반봉건투쟁이었다.
농민항쟁 지도부는 자신들의 경제적 실력을 기초로 몰락농민을 광산노동자로 끌어들여 훈련시킴으로써 독자적인 군대를 조직하고 조선왕조의 전복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이들 지도부는 아직까지 상당부분 봉건적 색체를 띨 수밖에 없었다. 농민전쟁의 명분으로 서북민에 대한 정치적 차별대우 철폐,『정감록』에 나타난 역성혁명설을 들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분명히 나타난다. 물론 평안도 지역의 상공업세력은 봉건적 예속에서 벗어나려는 지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봉건적 사회모순을 전 구조적으로 타파할 수준까지 도달하지는 못하였고, 봉건적 요소가 여전히 우세하였다.
따라서 농민정쟁에서는 당시 사회모순의 담지자였던 빈농하층민에 대한 삼정개혁이나 신분해방 등의 개혁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 농민전쟁에 호응한 세력들은 수령을 축출하고 그 자리를 유진장이라는 직위로 대체하였을 뿐 농민에 대하여서는 그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정책을 폈던 것이다. 이러한 점은 농민전쟁의 지도부가 광범한 빈농하층민의 반봉건 에너지를 하나로 결집시키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고, 농민전쟁을 정주성이라는 고립된 지역에서의 항쟁으로 그치게 하여, 정부군의 포위공격에 패배당하는 제1차적 요인이 되었다. 그나마 정주성에서 관군과의 전투가 1백여 일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관군의 초토전술로 쫓겨는 농민들이 대거 참여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농민군의 지도부들은 자신들이 수세로 몰렸을 때, 비로소 농민대중과 올바른 결합을 통해 농민전쟁을 이끌어갔으나 이때는 이미 다른 지역과의 연결이 끊어진 고립된 상태로서 패배가 예견된 때였다. 또한 봉건사회의 모순을 서북민에 대한 차별의 문제로 축소시킴으로써 당시 봉건적 수탈에 허덕이고 있었던 삼남지역 농민들의 반봉건투쟁과 연대할 수 있는 길을 스스로 봉쇄해버린 점도 농민전쟁이 가지는 한계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한계를 지닌 농민전쟁이었지만 그것이 가지는 의의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봉건제의 위기가 전차 심화되는 가운데 봉건정부 타도의 가치를 내걸고 4개월 동안이나 항쟁을 지속함으로써 봉건권력의 도덕성을 근저에서부터 부정하였으며, 이는 그 후 반봉건항쟁의 도화선이 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평안도 농민전쟁은 봉건지배체제의위기를 극단화시켜 지배체제의 갈등이 정치적 변란으로 표출되게 하였다. 순조대 이후에는 양반층들도 세도정권을 부정하는 고변 작변사건을 해마다 일으키게 되었다. 특히『정감록』을 이용하여 농민대중을 반봉건항쟁에 끌어들이려는 수법은 그 후 전형으로 계승되어 봉건정부를 타도하려는 각종 정치적 변란 괘서 흉서 사건에 이용되었다. 또한 직접적으로 평안도 농민군세력과 연관을 가지면서 정감록 사상에 기초하여 항쟁을 계획하는 사건도 발생하였다. 1813년 경상도 진주에서의 이회식 박태진 모반사건, 1823년 박형성 정상채사건 등이 그것이었다.
평안도 농민전쟁이 갖는 가장 큰 의의는 이와 같은 지배층내의 동요로 인한 반왕조투쟁의 의미보다는 그동안 피지배층으로서 통치의 객체, 지배의 대상으로만 존재하였던 하층농민들에게 봉건국왕권력을 부정할 수 있는 정치적 각성의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 있다. 농민들은 홍경래가 죽은 뒤에서 홍경래가 살아있다는 소문을 퍼뜨리면서 언젠가 올 봉건정부타도와 사회변혁의 기회를 엿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하층농민의 각성과 주체적 성장은 1862년 전국적 농민항쟁단계를 거치면서 요호부민층의 지도로부터 벗어나 독자적으로 투쟁을 전개할 정도로 성장하였고, 1894년 농민전쟁에서는 봉건권력을 타도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변혁운동의 주체로서 자신을 정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Ⅲ. 결론
이 시대의 농민전쟁의 이유는 세도정치에 의한 가혹한 농민 수탈에도 있었겠지만 당시 이러한 어려운 생활에 발맞추어 사회적으로 여러 예언사상과 민중들의 의식성장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봉건사회체제를 유지하는 데 기능한 성리학 유일의 사살이 부정되면서 실학이나 서학과 같은 사상체계가 민중들의 의식에 영향을 끼쳤다. 민중은 점차 자신들이 처한 문제의 근원을 깨닫게 되고 그러한 문제를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려는 자세를 갖게 되었으며 그러한 생각에는 일정한 논리까지 갖추게 되었다. 동요하는 사회에서 불안정한 농민들은 동학과 같은 새로운 모습의 종교에 관심을 쏟기도 하였지만, 종전의 불교 특히 미륵신앙을 강조하는 데에 관심이 쏟아지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정감록(정감록)과 같은 비기(비기)가 유행하여 새로운 사회를 갈망하는 민중들의 바램이 표출되었다.
한편 민중의식을 확인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중들의 의식을 형성하는데 기여한 것으로는 문학작품들이 있다. 허균(허균)의 『홍길동전』 과 『춘양전』, 『흥부전』, 탈춤 등은 당시 사회의 신분제도의 모순과 양반사회의 부패와 모순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조선후기 사회는 민중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으며 지배층은 자신들의 배를 불리기 위해 더욱 가혹한 수탈을 일삼았었다. 역사는 흐름이라고 했던가? 원인이 있으면 결과도 있는 법이다. 조선후기 농민전쟁은 그냥 생겨난 사건이 아니라 임진왜란 조선 초부터 시작된 양반들의 권력투쟁이 결국 파벌을 만들고 붕당을 만들어 세도정치까지 이어지면서 농민전쟁으로 결과물을 낳은 것이다. 농민전쟁은 실패하였지만 그들이 주장하였던 삼정의 문란은 결국 고종이 즉위하면서 집권한 흥선대원군의 군역을 개선한 호포제와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과하고 환곡제를 사창제로 바꾸는 등의 개혁을 시행하였다. 경기도와 황해도 및 삼남지방에서 실시된 사창제는 면민들이 공동으로 출자하여 공동으로 운영하는 것으로 어느 정도 농민층의 부담을 줄여 나갔다.
<참고문헌>
한국역사의이해편찬위원회, “한국역사의이해”, 계명대학교출판부, 1998
강만길, 도진순, 최장집, “한국사 10 - 중세사회의 해체 Ⅱ”, 한길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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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7.31
  • 저작시기2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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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69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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