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의 역사적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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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동아시아의 역사적 전환

Ⅱ. 삼국의 개항 전후의 경제

1. 중국의 개항 전후 경제

2. 조선의 개항 전후 경제

3. 일본의 개항 전후 경제

Ⅲ. 개항전후 삼국의 경제상황의 비교

1. 국내총생산·인구·1인당 소득

2. 시장·도시

3. 상품·유통

4. 지배형태

Ⅳ. 삼국의 대응전략 비교

1. 일본의 대응전략

2. 조선의 대응전략

3. 중국의 대응전략

4. 대응전략의 공통점

Ⅴ 나의 견해

본문내용

침략 위협 아래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이에 저항하거나 대응하기 위하여 부국강병을 내세웠다는 점에서 민족주의적 성격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었다. 서구의 군사적 우위와 경제적 우위를 인정한 집단(일본의 집권 세력, 한국의 개화파, 중국의 개화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사상은 단순히 서구를 추종하는 서구적 근대화는 아니었다. 서구의 개혁 세력들의 절대 왕권의 부정, 자유주의, 계몽주의 같은 구체제에 도전하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초기 동아시아에서 나타난 개혁 세력은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구체제를 방어하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동아시아의 경우 근대화의 문제는 시간적인 차이는 있었지만 위로부터의 근대화로 종결지어졌다. 제2차 대전 이후 중국이나 한국의 경우 근대화는 국가의 몫이었다. 그리고 근대화의 목표는 다르지만 서구에서 이루어진 성공을 답습하고자 하였고, 추격 발전의 형태로 이루어 졌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Ⅴ 나의 견해
개항시기, 근대화시기를 주로 정치적인 면에 의해서만 배워 오다가 경제적인 면으로 접근하니 새롭고 흥미진진했다. 하지만 경제적인 측면이 너무 방대해 개항이후 각국의 경제상황은 비교하기 힘들었다. 일본은 주로 메이지유신이후 정부가 주도한 정책에 대해 서술하였지만, 한국이나 중국은 이권을 빼앗긴 면, 자원이나 토지를 수탈당한 측면에서 접근하다보니 기분이 좀 언짢았다. 가끔 일본인의 과장된 표현이 있기도 했지만, 과연 일본은 자국에 대한 역사적 연구뿐만 아니라 외국에 대한 연구도 많이 한다 싶어 놀랍기도 했다.
많은 나라가 전통 사회에서 자본주의로 나아갔고, 앞으로도 자본주의를 대체할 이데올로기가 생기지 않는 이상에는 자본주의 패러다임이 지속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느끼기에도 자본주의에는 모순점이 있고 위태로운 것처럼 보이는데 당시에는 얼마나 받아들이기 어려웠을까? 이러한 세계정세의 변화를 수용하고 외국의 문물을 발전시키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 뭉친 일본인들이 밉지만 대단하긴 하다. 우리나라나 중국에서는 대부분의 관료들이 여전히 본인의 이익을 취하고 국가의 존망에 대해서는 무관심했지만, 일본은 메이지 유신이 있기까지는 큰 대립이 있었지만 그 이후 조선이나 아시아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는 서구의 제국주의에 전혀 뒤처지지 않고 발전한 것 같아 부럽기도 하다.
흥선대원군에 대해서는 많은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통상수교거부정책을 폄으로써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개항의 시기도 놓쳐 일본에 비해 발전의 속도가 느려진 점은 비판이 되고 있다. 하지만 세도정치를 척결하고 서원을 철폐하는 등 국가 기강을 바로 세우고 왕권강화를 도모했다는 점에서는 좋게 평가한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면 쇄국이 국가의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 또한 무작정 개항을 한다고 해서 성공하기는 힘들다. 일본의 경우 미국에 의해 강제적으로 문호를 개방하였으나, 미국은 남북전쟁, 영국은 인도문제, 프랑스는 베트남 문제라는 국제 정세로 인해 일본에 대해 신경 쓸 여유가 없는 사이 지배층이 외세가 개입하기 전에 빠르게 개혁을 단행하여 근대 사회로 도약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개방했을 당시에는 외국들의 간섭이 심했고 내적인 개혁도 외국에게 제지당했다. 또한 흥선대원군과 대립했던 명성황후는 러시아의 세력에 의지한 것을 보면 외세를 빌리지 않고 국내의 자주적인 개혁은 불가능했다. 무조건 문을 닫고 국내 세력을 지키자고 했다면, 또한 그것이 자신의 이익을 위한 일이었다면 비판받아야 하겠지만, 흥선대원군은 왕권강화라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고 부패를 시정하고 세제를 개혁하는 등의 정책을 통해 이전 조선 사회의 문제점을 타파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친일파는 동아시아 역사에서, 일본 제국이 동아시아 각국을 침탈할 무렵에 그에 야합하여 그들의 침략 및 약탈 정책을 지지하거나 옹호하여 추종한 무리를 가리킨다. 한국 사회에서는 일본의 식민지배 하에서 이익을 취하고, 해방이후에도 기득권을 유지하여 남아있음으로써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다. 문제는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도 친일파로 분류 된다는 점이다. 또한 흥선대원군도 보통은 위정척사파라고 하지만, 청일전쟁 이후 일본이 대원군을 영입했다는 점, 그의 정치적 라이벌인 명성황후가 일본에 의해 시해됐다는 점에서 친일파라는 주장이 있다. 갑신정변이라는 것은 결국 실패하게 되었지만, 조선 최초의 근대화 운동이었고, 14개조 혁신정강의 내용이 상당히 진취적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들은 친일파라기보다 개혁파라고 보아야 할 것이고 한계가 분명했다는 점에서 안타까울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비록 과거의 친일파를 청산하지는 못하더라도 친일파의 개념을 명확히 하고 역사적 사건의 의의를 정확히 정립했으면 한다.(개인의 견해는 다르겠지만) 그렇다면 외세의 힘을 빌린 개혁은 어떠할 것인가? 이는 단행된 적 없으니 뚜렷한 결과는 없으나, 조선이 일본의 수탈을 받은 식민지였음에도 일선동조론이나 타율성론, 정체성론 등이 주장되고 있다. 일본의 도움을 받아 개혁에 성공하고 근대적 국가가 되었다면, 일본이 더 경제적 우위라는 가정 하에서, 일본의 우쭐함이나 우리나라의 친일적 해석이 더욱 크게 확대되었음은 틀림없다.
일본의 막부 말 시기에 대해 신선조, 사카모토 료마 등이 만화나 소설로 많이 나와 한국에도 알려져 있다. 이 뿐만 아니라 일본의 전국시대에 대해서도 우리는 은근히 많이 알고 있고 사무라이라고 하면 칼을 들고 주군에 대한 의리를 중시하며 죄를 할복으로 씻는 등의 이미지가 많이 떠오른다. 그만큼 일본이 경제 외에 문화적으로도 우리나라에 많은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현재에는 중국이 경제 대국이 되고 있고 우리나라의 수준으로는 더 이상 따라잡기 힘들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제도 세계의 순위권에 들 만큼 많이 발전했고 더 이상 중국이나 일본의 속국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적으로 발전하는 방향이 어떨까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드라마나 아티스트는 나도 자부심을 갖고 있는 부분인데 이러한 문화의 수출을 통해 국제 세계에서 우리나라의 입지를 단단히 다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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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8.05
  • 저작시기2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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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693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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