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빨치산 사건의 전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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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지리산 빨치산 사건의 전말』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시대적 배경
Ⅱ발단
Ⅲ발전
Ⅳ종말

본문내용

재귀열병’이라는 유행병이 돌면서 전투력이 급속히 약화되었다. “재귀열병과의 투쟁은 조국을 위한 투쟁이다.”라는 구호가 나왔을 만큼 남부군에게는 큰 장애였다. 말라리아와 유사한 증상을 일으키는 이 병은, 미국의 생물학 무기 실험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으나, 정부와 미군 측은 전면 부인하였다.
○북한과의 연락불능
특히 1951년 9월, 국군의 서울 수복이후 남부군과 배후세력인 북한 조선로동당 간의 연락이 원활하지 못하였다. 중앙당에서 내려오는 지령은 통신수단 미비로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였고, 인편을 통해 오가던 지령과 답신은 이미 때가 지난 뒤 전달되거나, 연락원이 체포되는 일이 많았다.
○보급 단절
남부군들은 북한과 먼 거리에서 활동하였기 때문에, 식량 등 필요한 보급품을 자체적으로 조달할 수밖에 없었다. 초기에는 좌익을 지지하는 주민들로부터 자발적인 지원을 받았으나, 토벌 군경들의 강력한 차단으로 지역주민들과의 협력이 없어져, 차츰 식량을 훔쳐오거나 강제로 탈취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주민들과 적대감이 커졌고, 청야(淸野)작전 ‘청야작전’이란 원래 ‘견벽청야(堅壁淸野)’작전이라는 단어에서 유래된 말이다. 이는 공격해 오는 적이 군량미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들판에 있는 곡식을 모조리 없앤 다음, 지켜야 할 곳은 성벽을 굳게 닫고 수비하는 전략으로서, 고대 동서양에서 사용되어 왔다. 나폴레옹군과 히틀러군의 침략을 받았던 러시아, 수당거란의 침략을 받았던 고구려와 고려에서도 이 작전을 썼다. 지리산 빨치산 토벌작전 때도 이 작전을 써서 빨치산들이 숙소로 쓰거나 식량을 조달받을 수 있는 지리산 내 모든 민가를 산 밖으로 이주시키고, 주요 사찰들은 불태움으로써, 빨치산 요원들은 겨울 동안 추위와 굶주림에 전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
에 따라 보급품 조달은 더욱 어려워졌다.
○불리한 자연조건
험준한 산과 깊은 계곡이 많은 지리산도 늦가을부터 초봄까지는 나뭇잎이 떨어져 남부군은 은신처를 마련하기 어려웠다. 또 겨울철 혹한기 추위를 견디기 어려운 데다가, 눈이 내리면 발자국 때문에 이동할 수도 없어 상호연락, 식량조달 등을 할 수 없었다. 국군은 이와 같은 겨울철을 이용하여 1, 2차에 걸쳐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전향자의 토벌대 보조
체포된 남부군 요원들 중 전향자를 중심으로 일명 ‘보아라부대’가 창설되었는데, 이들은 군경의 토벌작전을 적극 도와주었다. 이들은 아지트 위치와 이동경로 등 남부군의 활동현황을 잘 알고 있어 토벌작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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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공원관리공단 지리산국립공원사무소, 『지리산이천년 』,보고사, 2010
김남식, 『남로당연구』(1)(2), 돌베개, 1984
박세길,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1, 돌베개, 1988
신복룡, 『한국분단사연구』, 한울아카데미, 2001
지명관, 『한국을 움직인 현대사 61장면』, 다섯수레, 1996
최장집 외, 『해방전후사의 인식』 4, 한길사, 1989
현대사연구소, 『한국현대사의 재인식』1,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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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7페이지
  • 등록일2011.09.10
  • 저작시기2011.9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0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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