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영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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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문학과 작가
1. 시대 상황
2. 작가의 생애
Ⅱ. 작가의 문학
1. 리얼리즘
2. 농민문학
Ⅲ. 작품론
1. 줄거리
2. 작품의 특성
Ⅳ. 문학사적 의의와 한계
1. 문학사적 의의
2. 한계
Ⅴ. 프로문학의 전개
1. 대립과 논쟁을 통한 프로문학론의 전개
2.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퇴조와 카프의 해체
3. 해방직후의 프로문학

◆참고문헌◆

본문내용

화를 제창했다 할 수 있다. 이렇게 작품면에서 요구되는 볼셰비키화의 요청은 다시 권환의「조선예술운동의 당면한 구체적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논의된다. 그는 작품의 내용과 형식에 관하여, 내용이 혁명적이고 선동적이므로 형식은 직접적이고 그 대상이 노동자 농민이므로 간결 평이해야 한다고 함으로써 볼셰비키 대중화는 형식에만 해당되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2.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퇴조와 카프의 해체
1920년대 중반부터 말까지 한국의 문단을 장악했던 프롤레타리아 문학은 〈카프〉 자체의 문제와 외부적 압력으로 인해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퇴조의 길을 걷게 된다. 1931년에 있었던 만주사변을 계기로 일본은 자국 내 사상탄압을 강화하는 동시에 한국에서도 사상탄압을 더욱 강화하기 시작했다. 〈카프〉의 이념 자체에 대한 비판도 높아 가는 가운데 이러한 외부적 압력이 겹쳐 〈카프〉의 종말은 예고되고 있었다.
〈카프〉는 1931년 8월부터 10월까지 한위건, 양명 등에 의한 조선공산당협의회 사건과 연루되어 《무산자》의 국내배포와 영화 '지하촌'건으로 인해 임화, 김남천, 안막 등 무산자파와 김남천 등 11명의 동맹원이 체포되는 〈카프〉1차 검거사건을 겪게 된다. 이 사건으로 프로문학인들에게 끼친 정신적 충격은 컸으며 더구나 내적으로 제기된 비판은 〈카프〉를 진퇴유곡에 빠뜨리고 말았다. 박영희가 1931년에 발표한「예술운동의 작금」에 대한 권환의 비난은 박영희로 하여금 간부직에서 사임하게 했고, 신유인과 함께 퇴맹원까지 제출하도록 했으며 1934년 전향론을 공표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카프〉에 결정적 충격을 주었고, 1934년 제2차〈카프〉검거사건은 기사회생을 포기할 만한 상황으로 휘몰아 갔다. 제2차〈카프〉검거사건은 소위 '신건설사사건'이라고 불리우는데, 연극 단체인 '신건설'의 용산지구에서 배포한 삐라를 소유했던 학생이 전주에서 체포된 것이 빌미되어〈카프〉전원의 검거로 확대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이기영, 한설야, 윤기정, 송영, 이갑기 등23명이 기소되어 그 중 박영희, 이기영, 한설야, 윤기정 등 4명이 실형을 선고 받았다가 항소심에서 모두 집행유예로 풀려난다. 이렇게됨에 따라〈카프〉는 개인 활동으로 근근이 명맥을 이어갈 뿐 어떠한 조직적 활동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고 만다. 그리고 이 사건은 2년간의 처리과정을 거치는데 이로 인해 전향자가 속출하게 되며, 1935년에는 임화, 김남천 등에 의해〈카프〉해산서가 제출되었다.
〈카프〉의 해산은 1935년 5월 21일 김남천, 임화, 김기진의 협의하에 경기도 경찰부에 해산서를 제출하여 이루어졌다. 표면적으로〈카프〉가 해산되는 형식적인 측면은 이렇지만 본질적인 요인으로는 첫째, 외부적인 요인으로 일제의 탄압을 들 수 있다. 일제의 1,2차에 걸친 대탄압은 전향자를 속출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고 둘째, 내부적인 요인으로 작용한 노장파와 소장파의 대립은 자신들의 모순점을 현실과의 관계에서 극복하지 못한 결과였다.
3. 해방직후의 프로문학
1) 조선문학건설본부 (약칭 ‘문건’)
해방이 되면서 가장 먼저 결성된 문학 단체는 임화, 김남천, 이원조 등이 주도한 '문건'이었다. 이 단체와 비슷한 성격을 가진 조선음악건설본부, 조선미술건설본부, 조선영화건설본부 등이 연합하여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를 1945년8월18일에 결성하였다. 이로서 `문건`은 예술 활동 전반을 장악할 수 있는 해방 후 최초의 문화단체로서 그 조직이 확대되었다. '문건'이 처음 내세운 것은 '민족'이었으며, 프로문학이 아닌 '진보적 민족문학'의 건설이었고 회원들의 자격에도 별다른 제한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포용적 태도는 재빨리 전 문단 을 장악함과 동시에 광범위한 대중적 기반을 획득하기 위한 하나의 전술적 노선이었다.
2)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약칭 '동맹')
이기영을 선두로 한 윤기정, 한효, 한설야, 권환, 윤규섭 등이 주동이 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은 45년 9월 30일에 결성되었다. 이들이 보기에 '문건'의 노선은 개량적이고 비혁명적이었다. 결국 박헌영의 부르조아 민주주의 혁명론과 장안파의 프롤레타리아 혁명론이 팽팽하게 맞섰듯 '문건'의 문화통일전선론과 '동맹'의 프롤레타리아 문학건설론도 대립했던 것이다.
3) 조선문학가동맹 (약칭 '문맹')
1946년 2월 9일 '문건'과 '동맹'은 '조선문학가동맹'으로 통합할 것을 선언했다. 통합은 박헌영의 지지를 받는 '문건'측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문맹'의 결성은 좌익 문단의 결속된 힘 과 통일된 노선을 내외에 확인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그것의 실체는 46년 2월 8,9일에 열렸던 '전국 문학자대회'에서 나타났으며 그것에 힘입어 '조선문화단체총연맹'이 결성되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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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호,「식민 치하의 농촌과 농민의 삶」,『새로 쓰는 한국 작가론』, 백년글사랑, 2002.
류양선, 한국농민문학연구: 식민지 시대, 서광학술자료사, 1994
백성우, 현실변혁의 소설담론: 이기영 소설 연구 , 국학자료원, 1997
김윤식, 한국현대문학사, 서울대출판부, 1992
윤병로, 한국근현대사, 명문당,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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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 이기영선집 13 문학론, 풀빛, 1992
강진호,『한국근대문화 작가연구』, 깊은샘,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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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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