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0년대 청소년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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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6,70년대 청소년심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 60~70년대는 어떤 시대였을까??
 1. 60~70년대 사회적 배경
 2. 60-70년대 청소년 조사 연구

Ⅱ. 본론 : ‘개인’으로서의 청소년 VS ‘사회 속’에서의 청소년
 1. 개인으로서의 청소년
  (1) 청소년의 신체
  (2) 청소년의 사춘기
  (3) 청소년과 가족 간의 관계
 2. 사회 속에서의 청소년
  (1) 사회와 신체
  (2) 사회와 사춘기
  (3) 사회와 가족
  (4) 사회와 교육 및 직업
  (5) 사회와 노동

Ⅲ. 결론

본문내용

소년의 학력과 연령이 높아지면서 이 사업은 점차 축소되었지만, 아동이 아닌 '청소년'에게 직접적인 혜택을 주는 사업이었다. 그러나 이런 혜택이 열악한 청소년 노동의 상황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2) 청소년의 노동 운동
1960-1970년대는 노동 운동이 깨어나기 시작한 시기였으며, 가혹한 탄압을 받았던 시기이기도 했다. 많은 수의 청소년들이 노동에 종사하고 있었기에 이 당시의 청소년과 노동 운동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그러나 당시 대다수의 사람들이 청소년 후기의 나이 대에 이미 일을 하고 있었고, 심지어 막 청소년기에 들어선 아이들도 일을 하는 경우가 심심찮게 보이던 때였던 지라 “청소년의” 노동운동을 당시의 노동운동에서 떼어서 이야기하기는 매우 어렵다. 따라서 그 시대 가장 유명한 노동 운동가이며 노동 운동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인 전태일 열사 열사의 사망당시의 나이가 22살이고 이 나이는 근로청소년(15-24세 or 14-29세)에 해당한다.
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당시의 청소년의 노동 운동을 엿보도록 하자.
18살 때 재봉 기술로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의 피복점 보조로 취업해 매일 14시간 노동을 하며 당시 차 한 잔 값이던 50원을 일당으로 받았다. 이듬해 직장을 미싱사로 옮겨 재봉사로 일하며 어린 여공들이 적은 월급과 열악한 환경, 과중한 노동에 시달리는 것을 보며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특히 함께 일하던 한 여공이 가혹한 노동 환경으로 인한 직업병인 폐렴으로 강제 해고 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자신도 여공을 도왔다는 이유로 해고 된다. 위키백과, http://ko.wikipedia.org/wiki/%EC%A0%84%ED%83%9C%EC%9D%BC
어떻게 보면 당시의 학생운동과도 비슷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경향, 기성세대에 대한 비판,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공감 등 당시의 많은 학생들이 학생 운동에 뛰어들었던 이유와 흡사하다. 다르다면 노동 운동은 정말 “살기 위한” 운동이었다는 것이다.
<그림 예19. 경향신문, 70년 10월 7일>
1968년. 우연히 노동자를 보호하는 법인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되어 해설서를 구입해 그 내용을 공부하면서 법에 규정되어 있는 최소한의 근로조건조차 지켜지지 않는 현실에 분개. 1969년 6월 평화시장 최초의 노동운동 조직인 바보회를 창립하여 평화시장 노동자들에게 근로기준법의 내용과 현재 근로조건의 부당성을 알리기 시작하고 설문을 통해 현재의 근로실태를 조사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실패로 끝나고 더 이상 평화시장에서 일할 수 없게 된 전태일은 한동안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며 지냈다.
1970년 9월 평화시장으로 돌아온 전태일은 재봉사보다 지위가 높은 재단사로 일하며 이전의 바보회를 발전시킨 삼동친목회를 조직한다. 그 뒤 다시 노동실태 조사 설문지를 돌려 126장의 설문지와 90명의 서명을 받아 노동청에 진정서를 제출한다. 이 내용이 경향신문에 실려 주목을 받자 전태일 등 삼동회 회원들은 본격적으로 임금, 노동 시간, 노동환경의 개선과 노동 조합 결성 등을 위해 사업주 대표들과 협의를 벌였으나, 일을 무마하려는 정부의 약속 위반으로 인해 번번히 무위로 돌아갔다. 위키백과, 위와 동일
그러나 당시 노동운동의 결과는 좋지 못했다. 비단 전태일 열사의 노동운동만이 아닌, 여공들의 노동 운동들도 번번히 효과 없이 끝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가 1970년 전태일 열사의 죽음으로 노동운동의 성격이 크게 변하게 된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노동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많은 노동조합이 생기고, 노동 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1970년대의 노동운동은 주로 섬유산업에 종사하는 여성 청소년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민주노조를 세우거나, 노동자의 편이 아닌 노조를 민주화하는 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났다.
그리고 거기에는 많은 희생이 따르는 등(YH노조집행위원장 김경숙(1957년생)의 희생) 여러 고통이 따랐다.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에는 어느 누구나 티 없이 맑고 깨끗한 사람이었다. 집안 환경 관계로 인하여 여러 사람들의 차이가 생겼다고 생각한다. … 돈에 구애를 받던 나 자신은 이 가난한 우리 가정이 잘살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을 해서라도 돈을 벌어야 되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내가 배우지 못한 공부를 동생에게 가르쳐서 동생만은 성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나의 간절한 소원이었다. … 하청 공장에 취직을 하여 말만 듣던 철야작업을 밤낮 하면서 약 2개월은 나의 코를 건들지도 못했다. 너무나 피곤하다보니까 끊임없이 코피가 나는 것이다. … 어떤 회사에서는 봉급을 약 3개월 치를 받지 못했다. 헐벗고 굶주리며 풀빵 5원짜리 30원어치로 추위에 허덕이며 생계를 이어가기도 했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자살이라도 해버리려고까지 마음을 먹었으나 고향이 그 길을 막았다. … 혼탁한 먼지 속에 윙윙대는 기계소리를 들으며 어언 8년 동안 공장 생활하는 나 자신을 볼 때 남는 것은 병밖에 없다. 몸은 비록 병들었지만 마음은 상하지 않은 인간으로서 올바른 삶을 살리라 다짐한다." 김경숙의 일기, http://contents.kdemo.or.kr/nodong/htm/case03_01_1.jsp
Ⅲ. 결론
1. 60-70년대 청소년의 생활모습에서는 현재의 청소년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인 청소년이 갖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2. 그러나 60-70년대 청소년의 생활모습에서는 60-70년 당시 시대적 사회적 배경의 영향으로 인한 그 당시 청소년만의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가족 내에서의 청소년, 사회에서 요구하는 청소년 상, 노동 운동 등의 부분에서 오늘날의 청소년과 많이 다르다. 특히 경제적인 요소, 당시의 엄격했던 사회 분위기가 이런 차이점을 만들어 냈다.
3. 60-70년 대 청소년에 대한 연구가 더욱 필요하다. 당시 청소년에 대한 관심이 적거나 있어도 선도의 목적에 그쳐 자료가 많이 부족한 편이다. 더 늦어져 자료가 사라져가기 전에 60-70년대 청소년에 대한 연구가 더 필요한 상태다. 과거의 청소년에 대해 공부함으로써 오늘날의 청소년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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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42페이지
  • 등록일2011.10.01
  • 저작시기2010.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05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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