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개요
Ⅱ. 예술의 의미
Ⅲ. 예술의 기능
Ⅳ. 예술의 원리
Ⅴ. 예술의 리듬
Ⅵ. 예술의 상호매체성
Ⅶ. 예술과 산업
Ⅷ. 예술과 외설
참고문헌
Ⅱ. 예술의 의미
Ⅲ. 예술의 기능
Ⅳ. 예술의 원리
Ⅴ. 예술의 리듬
Ⅵ. 예술의 상호매체성
Ⅶ. 예술과 산업
Ⅷ. 예술과 외설
참고문헌
본문내용
문학이다. 국내는 물론 아시아 전역에 한류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우리 가요가 꽃이라면 그 뿌리는 시이다. 새로운 정보혁명으로 말미암아 활자매체가 퇴조하는 가운데 이 뿌리가 말라 비틀어지고 있다. 출판은 단군 이래 최악의 불황을 해마다 경신하고 있다. 인터넷에서 얼마든지 공짜로 읽을 수 있는 시는 팔리지 않는다. 뿌리 없는 나무가 존재할 수 없듯이 소설이 없는 영화가, 시가 없는 노래가, 콘텐츠가 없는 문화가 존재할 수 있을까. 때문에 이즈음에서 문학과 산업의 소통을 심각히 생각해 보아야 할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현재 우리는 문학과 산업을 소통시킬 어떤 제도도 조직도 방법도 갖고 있지 못한다.
문학과 산업이 소통이 중요하다면 이제 그 방법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억지 춘향이 식으로 이런 일이 진행된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문학과 산업의 소통이 1)실제로 부가가치를 창출하야 하고 2)새로운 정보혁명의 흐름에 맞게 진행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야만 새로운 패러다임이 자연스럽게 창출될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선 본인의 졸고 <새로운 패러다임의 창출>이 있으니 www.koreapoem.co.kr에서 참고해 주길 바란다. 제도와 조직과 방법이 박자가 맞아야 함은 두말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Ⅷ. 예술과 외설
『미란다』, 이 연극은 한때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어냈었고 연출자는 \'더 이상 벗길 것이 없다\'라는 어떤 황색저널리즘의 기사제목을 큼지막하게 복사해서 간판에 걸어놓고는 연일 만원사례를 구가하던 화제의 연극 \'미란다\'에 사법당국의 제재가 가해질 것이라는 풍문이 돌더니, 여배우는 옷 입고 도망가고 연출자는 다시는 이런 연극을 하지 않겠다는 양심선언을 한 것이다. 물론 잘나가던 연극은 중단되었다. 그래서 언젠가 시간이 나면 꼭 한 번 보고 말리라던 기대가 좌절된 예비관객 중의 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사실은 할 말이 뻔하다. 그런 작품을 비판하고 탄압(?)하는 쪽이나 비판당하고 탄압(?)당하는 쪽이나 하는 말이 항상 뻔한 것처럼 \'미란다\'의 여배우는 대학을 갓 졸업한 아직은 어리다고 할만한 순진한 아가씨였다고 한다. 그 불쌍한 아가씨의 말이, 처음에는 예술적 의도라고 해서, 혹은 조금만 벗기로 약속하고, 벗기 시작했는데, 갈수록 많이 오래 벗기고, 그래서 점점 이건 예술이 아니라 외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믿자. 일단 믿어보기로 하자. 그 아가씨의 말이, 점차 자기의 벗은 몸 앞에서 침을 꼴깍꼴깍 삼키는 뭇사내들의 표정 때문에 소름이 끼쳐서 더 이상 무대에 설 수 없었다고 한다.
극단 대표이자 연출자이자 남자 주인공이기도 했던 한 흉측한 사내의 말은 더 가관이다. 공연을 갑자기 중단하게 되었어도 하나도 사람들에게 미안하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연극을 보았거나 보려 한 사람들은 다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므로. 이건 무슨 역설인가?
처음에는 거의 홍보성의 비판기사를 쓰다가 나중에는 지극히 도덕적인 입장에서 매도의 기사를 써댔던 저널리즘의 태도는 어떤가? 신문이나 좀 더 팔아먹고 시청률이나 올려보자는 뻔한 속셈이 역겹다. 자기는 반성하지 않고 매일 세상에 대고 반성을 촉구하는 무책임한 언론 사법당국의 몰상식성은 또 어떤가? 천재지변에 가까웠던 이번 여름의 무더위로 흉흉해진 민심을 다스리기 위한 도덕적인 캠페인인가? 그래도 권력은 정당하다는 실력행사인가?
비슷한 류의 연극을 하던 어떤 극단의 대표는 자기의 공연에 대해서도 내사를 하겠다는 사법당국의 처사에 강경하게 항의하면서 자기의 연극은 외설이 아니라 예술이라고, 예술은 사법적 심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끝까지 자기의 예술적 의지를 굽히지 않겠노라고 TV프로그램에서 열변을 토했었다. 그 말은 꼭 이렇게 들린다. 이제 우리 연극을 보러오세요. 우리도 많이 벗어요. 예술적으로.
다들 자기의 소견을 너무나 그럴듯하게 잘도 피력한다. 틀리는 말이 없다. 너무나 맞는 소리다. 너무나 맞는 소리들만 하니까 그게 쇼 같다. 거기에다 대고 무슨 말을 할까?
요즘 들어 출판이나 영화나 연극이나 온통 문화니 예술이니 하는 것도 다 이제는 꽤나 괜찮은 돈벌이가 되어버린 탓일까? 문화예술을 무슨 보통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는 대단히 신성한 일로 신비화시키는 것도 문제이겠지만, 그것이 얄팍한 장사치의 일로 전락하는 것도 참 보기에 안 좋은 일이다. 그러지 말아야 할 일이, 끝끝내 그것만은 아니어야 하는 일이 그렇게 되어버리는 것은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 그래가지고는 이 세상이 자신을 반성할 수 있는 마지막 기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므로.
사람들은 이제 어떤 추문도 악명도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것도 유명해지는 것이고 유명해지면 잘 팔리고 돈이 벌리니까. 오히려 좋은 이름과 명예로운 희생보다는 악명과 추문이 얻기 쉽고, 또 사람들은 고맙게도 금방 잊거나 용서하고는 한다. 일단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만 하면 된다.
그 센세이션의 가장 대표적인 방법이 너무나 속 들여다 보이는 논쟁이다. 소위 논쟁. 논쟁 같지도 않은 논쟁.
과거 마광수씨가 \'즐거운 사라\'라는 소설 때문에 잡혀 들어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알고 지내던 출판사로부터 표현의 자유를 탄압하는 사법당국에 항의하는 성명서에 서명해달라는 전화를 받고 참 씁쓸했다. 거절하고 전화를 끊고 나서 세상이 참 알다가도 모를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마광수씨도 마광수씨지만 그의 소설을 출간하고 추문을 일으켜 돈을 벌려고 했던 그 출판사 사장, 그리고 그 출판사의 언저리에서 먹고 살아야만 하는, 소위 고귀한 문학의 이름을 빌어먹고 살아야만 하는 알만한 얼굴들이 떠올라 갑자기 서글퍼지는 것이었다. 거기에 무슨 거창한 명분이 필요한가. 그저 먹고 살려고 한 짓이라고 진술하면 그만이지.
참고문헌
김정일(1992), 음악예술론, 조선로동당출판사
김홍희 저(1995), 정보예술, 서울 : 삼신각
이광수(1998), 대중문화와 문화산업론, 서울 : 나남
와타나베 마모루(1994), 예술학, 현대미학사
우도 쿨터만(1997), 예술이론의 역사, 문예출판사
크레이그 드리즌 외, 이은옥·용호성 역(1997), 예술경영 어떻게 할 것인가, 서울 : 민음사
문학과 산업이 소통이 중요하다면 이제 그 방법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억지 춘향이 식으로 이런 일이 진행된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문학과 산업의 소통이 1)실제로 부가가치를 창출하야 하고 2)새로운 정보혁명의 흐름에 맞게 진행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야만 새로운 패러다임이 자연스럽게 창출될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선 본인의 졸고 <새로운 패러다임의 창출>이 있으니 www.koreapoem.co.kr에서 참고해 주길 바란다. 제도와 조직과 방법이 박자가 맞아야 함은 두말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Ⅷ. 예술과 외설
『미란다』, 이 연극은 한때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어냈었고 연출자는 \'더 이상 벗길 것이 없다\'라는 어떤 황색저널리즘의 기사제목을 큼지막하게 복사해서 간판에 걸어놓고는 연일 만원사례를 구가하던 화제의 연극 \'미란다\'에 사법당국의 제재가 가해질 것이라는 풍문이 돌더니, 여배우는 옷 입고 도망가고 연출자는 다시는 이런 연극을 하지 않겠다는 양심선언을 한 것이다. 물론 잘나가던 연극은 중단되었다. 그래서 언젠가 시간이 나면 꼭 한 번 보고 말리라던 기대가 좌절된 예비관객 중의 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사실은 할 말이 뻔하다. 그런 작품을 비판하고 탄압(?)하는 쪽이나 비판당하고 탄압(?)당하는 쪽이나 하는 말이 항상 뻔한 것처럼 \'미란다\'의 여배우는 대학을 갓 졸업한 아직은 어리다고 할만한 순진한 아가씨였다고 한다. 그 불쌍한 아가씨의 말이, 처음에는 예술적 의도라고 해서, 혹은 조금만 벗기로 약속하고, 벗기 시작했는데, 갈수록 많이 오래 벗기고, 그래서 점점 이건 예술이 아니라 외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믿자. 일단 믿어보기로 하자. 그 아가씨의 말이, 점차 자기의 벗은 몸 앞에서 침을 꼴깍꼴깍 삼키는 뭇사내들의 표정 때문에 소름이 끼쳐서 더 이상 무대에 설 수 없었다고 한다.
극단 대표이자 연출자이자 남자 주인공이기도 했던 한 흉측한 사내의 말은 더 가관이다. 공연을 갑자기 중단하게 되었어도 하나도 사람들에게 미안하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연극을 보았거나 보려 한 사람들은 다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므로. 이건 무슨 역설인가?
처음에는 거의 홍보성의 비판기사를 쓰다가 나중에는 지극히 도덕적인 입장에서 매도의 기사를 써댔던 저널리즘의 태도는 어떤가? 신문이나 좀 더 팔아먹고 시청률이나 올려보자는 뻔한 속셈이 역겹다. 자기는 반성하지 않고 매일 세상에 대고 반성을 촉구하는 무책임한 언론 사법당국의 몰상식성은 또 어떤가? 천재지변에 가까웠던 이번 여름의 무더위로 흉흉해진 민심을 다스리기 위한 도덕적인 캠페인인가? 그래도 권력은 정당하다는 실력행사인가?
비슷한 류의 연극을 하던 어떤 극단의 대표는 자기의 공연에 대해서도 내사를 하겠다는 사법당국의 처사에 강경하게 항의하면서 자기의 연극은 외설이 아니라 예술이라고, 예술은 사법적 심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끝까지 자기의 예술적 의지를 굽히지 않겠노라고 TV프로그램에서 열변을 토했었다. 그 말은 꼭 이렇게 들린다. 이제 우리 연극을 보러오세요. 우리도 많이 벗어요. 예술적으로.
다들 자기의 소견을 너무나 그럴듯하게 잘도 피력한다. 틀리는 말이 없다. 너무나 맞는 소리다. 너무나 맞는 소리들만 하니까 그게 쇼 같다. 거기에다 대고 무슨 말을 할까?
요즘 들어 출판이나 영화나 연극이나 온통 문화니 예술이니 하는 것도 다 이제는 꽤나 괜찮은 돈벌이가 되어버린 탓일까? 문화예술을 무슨 보통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는 대단히 신성한 일로 신비화시키는 것도 문제이겠지만, 그것이 얄팍한 장사치의 일로 전락하는 것도 참 보기에 안 좋은 일이다. 그러지 말아야 할 일이, 끝끝내 그것만은 아니어야 하는 일이 그렇게 되어버리는 것은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 그래가지고는 이 세상이 자신을 반성할 수 있는 마지막 기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므로.
사람들은 이제 어떤 추문도 악명도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것도 유명해지는 것이고 유명해지면 잘 팔리고 돈이 벌리니까. 오히려 좋은 이름과 명예로운 희생보다는 악명과 추문이 얻기 쉽고, 또 사람들은 고맙게도 금방 잊거나 용서하고는 한다. 일단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만 하면 된다.
그 센세이션의 가장 대표적인 방법이 너무나 속 들여다 보이는 논쟁이다. 소위 논쟁. 논쟁 같지도 않은 논쟁.
과거 마광수씨가 \'즐거운 사라\'라는 소설 때문에 잡혀 들어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알고 지내던 출판사로부터 표현의 자유를 탄압하는 사법당국에 항의하는 성명서에 서명해달라는 전화를 받고 참 씁쓸했다. 거절하고 전화를 끊고 나서 세상이 참 알다가도 모를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마광수씨도 마광수씨지만 그의 소설을 출간하고 추문을 일으켜 돈을 벌려고 했던 그 출판사 사장, 그리고 그 출판사의 언저리에서 먹고 살아야만 하는, 소위 고귀한 문학의 이름을 빌어먹고 살아야만 하는 알만한 얼굴들이 떠올라 갑자기 서글퍼지는 것이었다. 거기에 무슨 거창한 명분이 필요한가. 그저 먹고 살려고 한 짓이라고 진술하면 그만이지.
참고문헌
김정일(1992), 음악예술론, 조선로동당출판사
김홍희 저(1995), 정보예술, 서울 : 삼신각
이광수(1998), 대중문화와 문화산업론, 서울 : 나남
와타나베 마모루(1994), 예술학, 현대미학사
우도 쿨터만(1997), 예술이론의 역사, 문예출판사
크레이그 드리즌 외, 이은옥·용호성 역(1997), 예술경영 어떻게 할 것인가, 서울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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