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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한국의 건축

Ⅱ. 북한의 건축

Ⅲ. 이탈리아의 건축

Ⅳ. 네덜란드의 건축
1. 쌍자현상
2. 공동결정
3. 원형(原形)의 해석
4. 시간의 내면성과 투명성
5. 수의 미학

Ⅴ. 스페인의 건축

Ⅵ. 아잔타의 건축

Ⅶ. 러시아의 건축

Ⅷ. 에트루리아의 건축

참고문헌

본문내용

을 따라 연속적으로 배치되어 있고 이 골격의 양 측면인 운동장, 수영장 등의 공원지역에 500m 간격으로 공동시설이 배치되어 있다. 긴즈부르크의 전반적인 전략은 모스크바의 기존 인구를 점진적으로 이주시키기 위하여 주요 간선도로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가장 추상적이고 이론적이며 일관성 있는 제안은 밀류틴이 전개한 [선형도시 원리]였는데 그는 1933년 사회주의도시에서 그의 도시성장에 관한 이론을 전개시켰다. 밀류틴은 도시의 확장과 조닝개념을 효과적으로 통합하였다. 1930년 6개의 평행한 지역으로 이루어진 연속도시를 제안했다: 1. 철도지역/ 2. 공업지역/ 3. 녹지지역/ 4. 주거지역/ 5. 공원지역/ 6. 농업지역
1929년 소비에트 정부는 우랄 정부의 철광자원을 개발하기 위하여 마그니토고르스키라는 도시를 건설하려는 의도를 발표했고 밀류틴, 긴즈버그, 레오니도프와 그 밖의 현대건축가동맹의 건축가들은 새로운 도시를 위한 도식적 계획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추상적 계획안은 당국에 의해 거부되었다. 그 대신 당국은 독일의 건축가인 어니스트 메이와 프랑크푸르트의 단체에 도시 계획을 의뢰하였다. 소비에트 당국은 러시아 전위 건축가들의 이론논쟁에 따른 당파성 문제를 회피하고 경험 있고 실용적인 바이마르 공화국의 좌익 계열의 건축가들을 초대해서 그들의 규범적인 계획 및 생산 방법을 1차 5개년 계획의 건설을 실현하는 과제에 적용하려 한 것이었다.
한편 역사적 상황이 그러하여 대중들은 사회주의 지식인들이 제안하는 삶의 방식을 대부분 채택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그들의 가상적인 계획을 기술적 수용의 적당한 수준과 적절히 조화시키는데 있어서의 건축아방가르드의 실패는 당국의 신임을 잃게 하였다. 마침내 국제적인 사회주의 문화에 대한 호소는 1925년 이후 소비에트 정책-스탈린의 \'한 국가에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라는 결정-과 정반대가 되어 버리고 만다.
Ⅷ. 에트루리아의 건축
에트루리아인은 토목건축에 뛰어나 로마인에게 도시건설을 가르치는 등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의 무덤으로 원형무덤인 투물루스(tumulus)는 에트루리아의 부유층의 묘지거리에 줄지어 있었다. 가난한 이들의 무덤은 지반에 파인 상자형태의 직사각형 구덩이에 매장되었다.
체르베테리에 있는 초기 무덤 중에서 가장 큰 무덤 가운데 하나는 첫 탐사자의 이름을 따서 레골리니-갈라시(Regolini-Galassi Tomb)로 알려져 있다. 이 무덤의 일부는 원래 암석을 파내고 일부는 다듬은 석재로 건축한 통로와 내실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발견된 부장품으로 전통적인 형태의 많은 피불라와 함께 더 정교한 피불라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장신구 제작자의 기교를 얼마나 과시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체르베테리의 방패와 의자의 무덤은 600년경 유물로 추정되며 이 무덤은 내실들의 복합체로 구성된 전형적인 내부구조를 보여주는 예이다. 층계로 이루어진 입구의 통로는 내실이 늘어선 복도로 이루어지고 복도에는 장례용 긴 의자가 줄지어 있는 더 큰 방으로 연결 되는데 주실 뒤에는 또 다른 세계의 내실이 있다. 내실은 영혼을 위한 일종의 안식처 역할을 했다. 내벽에 조각된 의자와 방패는 가정적인 분위기를 제공하고 이런 건축구조는 오두막형 유골 단지의 축소된 형태의 가옥이 실제 규모로 더 복잡하게 발전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헬레니즘 시대의 무덤인 부조의 무덤(the Tomb of the Reliefe)은 더 후대의 것으로 벽의 조각 장식이 더 다양하고 정교해 졌음을 보여준다.
에트루리아의 신전은 후대 로마 신전의 모델이 되었다.
초기 신전으로 에트루리아 도시에 베이(Veii)에 있는 것으로 기원전 500년경에 만들어 진 것이다. 이 신전은 남아 있는 것은 없으나 건물 기초를 통해 평면도를 알아 볼 수 있어 이를 근거로 신전형태를 추론할 수 있다. 로마 건축가 비트루우스는 건물 전면에 두 줄의 기둥으로 된 현관 즉 프로나오스(Pronaos)가 있고 셀라(cella)라고 하는 신을 위한 성소는 신전 후부에 위치하고 있다고 추정한다.
에트루리아인은 신전 건축에 목재와 흙, 벽돌, 테라코타를 사용하여 현존한 것이 거의 없다. 베이의 신전은 높은 기단위에 있어 신저에 접근하려면 전면에 있는 계단을 통과 해야만 했다. 이는 그리스 신전과 구별되는 분명한 특징이다. 또한 에트루리아 신전은 전면부의 현관에만 기둥을 배치해 놓은 반면 그리스 신전은 사면에 기둥을 세워 놓은 차이점을 보인다.
로마의 카피톨리누스 언덕에는 지명을 딴 카피톨리움(Capitolium:카피톨리누스 신전)이 있었다. 이 신전은 에트루리아 양식으로 지은 것으로 에트루리아 출신 조각가 불카(Vulca)가 만든 예배용 조각상이 안에 들어 있었다. 이 신전은 남아 있지는 않지만 평면도를 통해 알 수 있으며 알려진 가장 큰 에트루리아 신전으로 넓이로만 치자면 가장 큰 그리스 신전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
에트루리아의 주거지에 대한 발굴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지난 40년 동안 바테르보 근방의 아쿠아로사, 시에나 근방의 무를로 등을 포함한 여러 지역에 주거 건축흔적이 발견 되었다. 무를로에서는 테라코타 타일을 발견 했는데 이 판은 주로 지붕 선 아래 건물 외벽을 장식하는데 사용되었으며 화려하게 채색하여 건물 외부를 장식해 마을 전체에 생동감을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냈을 것이라 추축한다.
그 밖에 고유하게 발전시킨 건축양식이 있는데 교외에서 시내로 물을 공급해 주는 수도, 건물의 입구나 창문의 반원 모양으로 된 궁륭식 아치, 지붕 양식으로는 둥근 밥공기를 엎어 놓은 모양으로 된 원개(돔)가 있다. 또 그리스의 열주식 건물 양식이 아닌 석축으로 벽을 만들고 내부공간을 실용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견고한 건축양식을 발전시켰다.
참고문헌
93대전 엑스포 스페인 관 엮음 : 스페인의 오늘, 도서출판 빛샘
김현수(1994) : 북한의 도시계획에 관한 연구, 서울대
김문덕(2000) : 네덜란드 근대건축의 상황과 전개, Plus
박만식(1988) : 이탈리아 합리주의 건축과 쥬세페 테라니에 관한 연구, 충남대
북하우스 : 한국 전통건축과 동양사상
현대건축연구회 : 지중해건축과 만남, 교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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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10.03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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