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서문---------------- 3
본문---------------- 3
1)-➀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일본에대한 기사 ------- 3
1)-② 이에 대한 고찰 ------------------------ 4
2)-①속일본기에 나타난 신라 ‘번국’언급기사들 ---- 4
2)-➁외교문서에 대한 기록 -------------------- 5
2)-➂신라측에 대응 ------------------------- 6
2)-➃ 이에 대한 고찰 ----------------------- 7
3)-➀ 신라왕자 김태렴의 발언 ----------------- 7
3)-➁이에 대한 고찰 ------------------------ 8
후문---------------- 8
1)속일본기를 바라보는 또다른 눈, 그리고 나의 관점.-- 8
2)후기 ------------------------------------ 9
본문---------------- 3
1)-➀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일본에대한 기사 ------- 3
1)-② 이에 대한 고찰 ------------------------ 4
2)-①속일본기에 나타난 신라 ‘번국’언급기사들 ---- 4
2)-➁외교문서에 대한 기록 -------------------- 5
2)-➂신라측에 대응 ------------------------- 6
2)-➃ 이에 대한 고찰 ----------------------- 7
3)-➀ 신라왕자 김태렴의 발언 ----------------- 7
3)-➁이에 대한 고찰 ------------------------ 8
후문---------------- 8
1)속일본기를 바라보는 또다른 눈, 그리고 나의 관점.-- 8
2)후기 ------------------------------------ 9
본문내용
진의로 받아들여 신라에 종주국의 입장으로 임하였으며, 그것이 신라 측에게 무례하게 비쳐져 추방되었을 것이다.
김태겸 왕자의 발언의 이유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752년 김태렴 방일 목적에 대한 재검토 -이병로- 참조.
하나는 제사참배를 위한 설이었다는 설과 교역을 위한 설이었는데, 이병로 씨는 두가지 목적을 다 고려 하고 있다. 즉, 김태렴을 비롯한 상급관인들은 헤이죠쿄의 여러 사원들을 순례하는 것이었으며, 특히 그 중에서도 동대사의 대불을 참배하는데 목적이 있었고, 거기에 신라상인이 수행하여 일본 지배층과 교역관계를 행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환언하면 신라측은 東大寺 참배와 교역이라는 두가지 목적을 동시에 달성하기 위해 외교적인 편법을 발휘한 것이 된다. 김태렴 일행이 700여명이 된 것도 교역 때문일 것이다. 김태렴의 來日 이후 신라사절의 제사참배는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일본에서도 東大寺의 조관 이후는 대규모 사원의 조영을 볼 수 없게 된 점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730년대부터 양국관계의 악화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사절이 來日한 배경에는 이러한 무역이라는 경제적 행위가 주목적이었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3. 후문
1)속일본기를 바라보는 또다른 눈, 그리고 나의 관점.
속일본기는 간무천황 자신의 혈통이 약한 것을 커버하기 위해 정통성 확립이란 목적이 있었다. 아울러 조정 내에서 자신의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철저하게 백제계 유민을 발탁하여 중용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들 백제계 유민들은 자신의 국가를 멸망시킨 신라를 결코 호의적으로 표현할 수 없었으며, 그 결과 속일본기의 신라 관련 기사는 일본의 번국관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는 시각도 존재하는데, 속일본기의 신라사절기사에 관한연구 -이병로- 맺음말 부분 참조
이런 시각은 개인적으로 공감이 되는 부분이있다. 실제로 몇 년전 일본천황이 칸무천황이 백제계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일본에 흘러들어간 백제계 유민의 신라에 대한 반감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천황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번국관을 이용, 천황은 자국 뿐만 아니라 신라와 발해를 아우르는 존재로 위치 시켰다고 볼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쨌든 이후 양국의 외교적인 분쟁으로 신라사절을 입경하지 못하고 추방을 당하게 되는데, 하지만, 일본 오위이상의 귀족층은 신라상인과의 교역이 성행하는 양면성을 보여주기도한다. 이시기에는 수년에 1번 정도로 신라 사절이 파견되었으므로 매우 불안정 하였으나, 신라인들이 대재부에 정착하여 9세기 들어서면서 일본의 호족층과도 활발한 교역활동이 일어난다.
2)후기
고등학교 시절, 과거 일본의 새 교과서 때문에 논란이 한창 일어났던 시절 한 중학생이 그린 한 풍자화 가 생각이 난다. 우스꽝스럽게 묘사된 일본인이 한 도서관으로 보이는 건물 내부에서 역사란 과 소설란 중간에 서서 ‘이것을 어디에 놓아야 합니까?’라는 대사를 하고 있는 그림이었다. 그것을 보고 한참을 웃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나의 일본에 대한 분노는 좀 막연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우리 교과서에서 배운 그대로를 진리라 받아들이고 생각한다. 하지만 당시 나에게 그럼 임나일본부설이 잘못되는 정확한 근거가 있느냐고 물었으면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이 역사를 공부하는 우리들의 역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동양사세미나 수업은 ‘탈국사학적’이며 한국사의 입장에서 역사를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 벌써 3학년 2학기 이지만 이근우 교수님의 수업을 처음 듣는데, 무척 신선했고, 어떤 사고를 확장 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트였다고 해야 하나?) 수업을 들으면서 교수님의 학자적인 포스(죄송합니다. 대체되는 말이 생각이 나질 않았습니다.) 에 정말 놀랐고, 개인적으로 이런 수업방식은 처음 접해 보는데, 이것이야말로 대학교 강의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라와 일본의 외교관계라는 이 주제통해 과거 일본과 신라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들었고, 대학3년동안 들은 수업 중에 가장 재밌는 수업이었다. 교수님께 진심어린 존경을 표하며 감사드린다.
『참고 문헌』
삼국사기 - [김부식]
속일본기 - 2009지만지 [이근우]
752년 김태렴 방일목적에 대한 재검토 - 이병로
속일본기에 나타난 한국고대사상 -이병로-
속일본기의 신라사절기사에 관한 연구 -이병로-
일본 율령국가의 왕권과 대 신라외교 -박석순-
일본 율령국가와 통일신라 형성에 관한 고찰 -정효운-
김태겸 왕자의 발언의 이유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752년 김태렴 방일 목적에 대한 재검토 -이병로- 참조.
하나는 제사참배를 위한 설이었다는 설과 교역을 위한 설이었는데, 이병로 씨는 두가지 목적을 다 고려 하고 있다. 즉, 김태렴을 비롯한 상급관인들은 헤이죠쿄의 여러 사원들을 순례하는 것이었으며, 특히 그 중에서도 동대사의 대불을 참배하는데 목적이 있었고, 거기에 신라상인이 수행하여 일본 지배층과 교역관계를 행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환언하면 신라측은 東大寺 참배와 교역이라는 두가지 목적을 동시에 달성하기 위해 외교적인 편법을 발휘한 것이 된다. 김태렴 일행이 700여명이 된 것도 교역 때문일 것이다. 김태렴의 來日 이후 신라사절의 제사참배는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일본에서도 東大寺의 조관 이후는 대규모 사원의 조영을 볼 수 없게 된 점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730년대부터 양국관계의 악화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사절이 來日한 배경에는 이러한 무역이라는 경제적 행위가 주목적이었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3. 후문
1)속일본기를 바라보는 또다른 눈, 그리고 나의 관점.
속일본기는 간무천황 자신의 혈통이 약한 것을 커버하기 위해 정통성 확립이란 목적이 있었다. 아울러 조정 내에서 자신의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철저하게 백제계 유민을 발탁하여 중용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들 백제계 유민들은 자신의 국가를 멸망시킨 신라를 결코 호의적으로 표현할 수 없었으며, 그 결과 속일본기의 신라 관련 기사는 일본의 번국관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는 시각도 존재하는데, 속일본기의 신라사절기사에 관한연구 -이병로- 맺음말 부분 참조
이런 시각은 개인적으로 공감이 되는 부분이있다. 실제로 몇 년전 일본천황이 칸무천황이 백제계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일본에 흘러들어간 백제계 유민의 신라에 대한 반감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천황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번국관을 이용, 천황은 자국 뿐만 아니라 신라와 발해를 아우르는 존재로 위치 시켰다고 볼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쨌든 이후 양국의 외교적인 분쟁으로 신라사절을 입경하지 못하고 추방을 당하게 되는데, 하지만, 일본 오위이상의 귀족층은 신라상인과의 교역이 성행하는 양면성을 보여주기도한다. 이시기에는 수년에 1번 정도로 신라 사절이 파견되었으므로 매우 불안정 하였으나, 신라인들이 대재부에 정착하여 9세기 들어서면서 일본의 호족층과도 활발한 교역활동이 일어난다.
2)후기
고등학교 시절, 과거 일본의 새 교과서 때문에 논란이 한창 일어났던 시절 한 중학생이 그린 한 풍자화 가 생각이 난다. 우스꽝스럽게 묘사된 일본인이 한 도서관으로 보이는 건물 내부에서 역사란 과 소설란 중간에 서서 ‘이것을 어디에 놓아야 합니까?’라는 대사를 하고 있는 그림이었다. 그것을 보고 한참을 웃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나의 일본에 대한 분노는 좀 막연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우리 교과서에서 배운 그대로를 진리라 받아들이고 생각한다. 하지만 당시 나에게 그럼 임나일본부설이 잘못되는 정확한 근거가 있느냐고 물었으면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이 역사를 공부하는 우리들의 역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동양사세미나 수업은 ‘탈국사학적’이며 한국사의 입장에서 역사를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 벌써 3학년 2학기 이지만 이근우 교수님의 수업을 처음 듣는데, 무척 신선했고, 어떤 사고를 확장 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트였다고 해야 하나?) 수업을 들으면서 교수님의 학자적인 포스(죄송합니다. 대체되는 말이 생각이 나질 않았습니다.) 에 정말 놀랐고, 개인적으로 이런 수업방식은 처음 접해 보는데, 이것이야말로 대학교 강의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라와 일본의 외교관계라는 이 주제통해 과거 일본과 신라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들었고, 대학3년동안 들은 수업 중에 가장 재밌는 수업이었다. 교수님께 진심어린 존경을 표하며 감사드린다.
『참고 문헌』
삼국사기 - [김부식]
속일본기 - 2009지만지 [이근우]
752년 김태렴 방일목적에 대한 재검토 - 이병로
속일본기에 나타난 한국고대사상 -이병로-
속일본기의 신라사절기사에 관한 연구 -이병로-
일본 율령국가의 왕권과 대 신라외교 -박석순-
일본 율령국가와 통일신라 형성에 관한 고찰 -정효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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