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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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왕인박사에 대한 소개-
왕인박사는 누구인가

2. 고대문헌상에 나타나 있는 왕인박사
고사기, 일본서기, 속일본기

3. 왕인박사에 대한 상반된 의견들
3-1. 존재에 대한 긍정
3-2. 존재에 대한 부정

본문내용

. 한 마디로 역사를 날조해서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하고 한국 사람을 회유하는 수단으로 이용한 것이다. 왕인 박사도 거기에 동원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일제는 친일파들을 동원해서 동경 우에노 공원에 왕인 박사를 기리는 비석을 세우는가 하면 이등박문이 앞장서서 오사카의 왕인 묘 근처에 왕인 신사를 세우기도 했다. 왕인 박사를 이용해 [내선일체]라는 그들의 식민지 지배 논리를 선전한 것이다.
이러한 내용들은 미즈노 씨가 독창적으로 생각해 낸 것이 아니고 모두 한국인 연구자의 저서에서 인용된 것이다.
해방이 되고 한 때 왕인 박사는 잊혀진 것 같았으나 1970년대 들어 영암군의 향토 사학자가 다시 왕인 박사의 출생지가 영암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해 영암군 거액을 들어 생가 주변을 정비하고 왕인 축제라는 축제까지 벌이고 있다. 최근에는 월출산 자락에 있는 마애불을 왕인 박사를 세긴 거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그것도 모자라 오사카에 있는 왕인 묘에 사절단을 파견하기까지 했다.
참고로 오사카의 왕인 묘라는 것도 17세기 들어서 만들어진 것으로 일본 학계조차 인정하지 않는 의심스러운 사적지다. 게다가 이등박문이 한일합방을 합리화하기 위해 왕인 신사를 세운 장소이기도 하다. 영암군은 한일합방을 정당화하기 위한 유적에 사절단을 파견한 꼴이 되었다.
미즈노 씨의 주장은 왕인 박사의 존재나 백제에 의한 문화 전수를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의 자장은 이러한 의심스러운 유적, 그것도 한일합방을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된 유적을 재활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왕인 박사의 출생지가 영암군이라는 사료가 전무한 지금 상황에서는 그의 주장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최근에 영암군은 그럴듯한 왕인 박사 전설을 내세우고 있으나 지리적 조건이나 전설의 내용을 보아서 왕인 박사의 생가가 영암군 월출산 자락에 있다고 믿기에는 역부족이다)
여기에서 내가 쓴 내용은 미즈노 씨 책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 아니고 한국인 연구자에 의해 이미 논증된 사실들이다. 그 출처는 다음 기회에 밝히고자 한다.
결론적으로 영암군의 왕인 박사 출생지는 일제 시대의 잔재를 이용해서 역사 창조와 지역 개발을 하려 것과 같다. 조상의 친일 행각이 들통나면 개망신 당하는 이 시대에 이게 무슨 촌극인가?
그는 다만 왕인 박사라는 인물이 전라남도 영암에서 출생했다는 영암군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견해는 대체로 우리나라 국내 학자의 견해와 일치한다.
그리고 뜻밖의 사실이지만 우리나라 학계에서도 왕인 박사의 실존 여부에 대해 신중한 의견을 가진 연구자가 많다. 그 원인은 왕인 박사라는 인물이 오직 일본 쪽 사료([일본서기]와 [고사기])에만 나타나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일본서기]나 [고사기]는 8세기에 일본에서 편찬된 역사서로 왜곡 날조된 부분이 아주 많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와 같은 우리나라 역사서에는 왕인 박사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고사기]에는 왕인 박사가 천자문을 일본에 가져갔다고 적혀 있는데 왕인 박사가 일본에 간 4세기 초에는 아직 [천자문]이 성립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왕인 박사의 실존 여부는 지극히 애매한 상태다. 더구나 왕인 박사의 생가가 전라남도 영암에 있다든지 왕인 박사의 묘지가 오사카에 있다든지 하는 기록은 어느 역사서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물론 이 시기에 백제가 왜(일본)에 여러 가지 문물을 전수해 주고 그들을 개화시킨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왕인 박사 같은 인물이 있었던 가능성까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일본 쪽의 사료를 100% 믿어도 된다거나 전라남도 영암을 왕인 박사의 생가 터를 만들어도 된다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는 왕인 박사에 관한 일본 사서의 내용 그대로 옮겨 [왕인 박사가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했다]라고 서술되고 있다. 그런데 국사 교과서의 서술과 달리 국사의 부교재 격인 [한국사신론]에서는 아예 왕인에 관한 기술이 빠져 있다. 이것은 왕인 박사의 실존 여부에 대한 학계의 신중한 입장을 반영한 것이다. 왕인 박사의 존재 여부에 관한 학계의 입장도 이렇게 불확실한 마당에 왕인 박사의 출생지가 영암이라고 주장하는 연구자는 전무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참고로 2003년에 경인문화사에서 [구림 연구 -마을공동체 구조와 변동]이라는 책이 출판되었는데 거기에는 영암의 이른바 왕인 박사 생가 터가 처음에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 합리화에 이용되었다가 해방 후에는 유적지(관광지) 조성에 이용된 경위가 상세히 나와 있다. 미즈노 씨 역시 이 책의 내용(정확히 말하면 이 책을 쓴 김모씨의 발표)을 참고로 했다고 저서에서 밝히고 있다.
그리고 02년 4월 13일자 조선일보는 [왕인 영암 출생설 검증 필요]라는 내용의 기사를 실어 왕인 유적지의 역사적 근거가 희박하고 과거에 일제의 신민지 지배 합리화에 이용된 경위가 있다고 상세히 보도했다. 이것 역시 미즈노 씨의 주장과 일치한다.
결론적으로 영암군의 왕인 박사 출생지(생가 터)는 그 출처가 아주 의심스러운 것이며 미즈노 씨는 저서에서 그 점을 지적한 뿐이다. 그리고 그의 주장은 우리나라 연구자의 견해와 대체로 일치한다.
진정 비판받아야 하는 자는 일제의 잔재로 관광지를 만든 영암군의 공무원과 그들의 동조자가 아닐까? 친일파 후손을 혼내는 것만이 역사 바로 세우기가 아닐텐데 말이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http://100.naver.com/100.nhn?docid=117431
왕인관련 논저의 분석-정성일, 형광석
http://wanginfs.yeongam.go.kr/home/wanginfs/wangin_diary/wangin_diary_datafolder/wangin_diary_studydata/
김계숙,「우리 땅 향토축제/⑩영암 왕인문화축제」,『땅 이야기』, 2003년 봄호, 한국토지공사, 서기 2003년, 16 ~ 18 쪽.
http://gall.dcinside.com/list.php?id=history&no=293991&page=2
이근우, 비판적으로 읽는 백제와 왜의 교류 - 왕인은 실존인물일까?(문화와 나)
박은봉, 한국사 상식 바로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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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11.10.07
  • 저작시기2011.9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06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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