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준의 황진이와 홍석중의 황진이 비교분석 및 춘향전과의 영향관계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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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 론……………………………………………………‥5

Ⅱ. 황진이……………………………………………………5

Ⅲ. 이태준의 『황진이』……………………………………‥9

Ⅳ. 홍석중의 『황진이』……………………………………‥11

Ⅴ. 두 작가의 『황진이』 비교 분석………………………14

Ⅵ. 결 론………………………………………………………21

본문내용

하는 사랑의 완성에 대한 낭만적 환상에 빠져 있으면서도 진이는 스스로를 붙임성이 없고 욕구불만에 몸부림치며 안존하지 못하고 무모할 정도로 위험한 열정을 지닌 존재로 인식한다. 그리하여 별당 후원에서 벗어나 사내 옷으로 갈아입고 거리의 풍경을 즐긴다.
달콤한 낭만적 환상과 섬뜩한 현실 세계 사이에 두 발을 걸치고 있던 진이는 어머니로부터 파혼을 통보받은 이유를 들으며, 어머니가 친정에서 데리고 온 교전비 현금이 친어머니임을 친어머니 사후에야 알게 된다. 그 후 그토록 존경과 사랑의 대상으로 흠모하던 황진사가 실은 단지 여색을 밝히던 사람에 불과했음을 알게 된 진이는 사랑에 대해 막연한 환상을 품고 있던 양반소녀에서 종의 신분으로 격하되어 칠성님을 외치며 그러니 이제부터 나는 누구란 말인가? 라는 질문 속에 자기정체성에 대한 회의를 진행하게 된다. 위선과 거짓의 허울이 벗겨진 황진사를 떠올리며 위인이나 성현들의 신비한 우상이 가공된 진실임을 깨닫게 된 진이는 아버지의 족자 두 폭을 불태워버리는 것을 시작으로 자신의 환골탈태를 준비한다. 결국 양반에서 기생으로 변신하고자 하는 진이의 허물벗기는 아버지의 족자 불사르기→놈이가 친어머니를 만났던 자남산 중턱에 가보기→친어머니의 묘소 찾아보기→청교방 색주가 장덕 집에 들러 색주가 여인들에게 큰절 올리기→또복이의 장례 때 혼례 옷을 바치며 저승 사랑 약속하기→놈이에 의한 귀밑머리 풀기라는 단계를 거쳐 초혼 제의로 완성된다.
Ⅶ. 결 론
황진이는 자신의 삶을 관통하는 진한 허무에도 불구하고 펼쳐지는 삶의 아름다운 격자무늬에 몸과 마음을 담고 있기에 거의 기행에 가까운 행적을 남긴 것으로 보이는데 그녀가 지은 시조 몇 수는 오늘날 우리들과 만나면서 아직도 유효하다. 우리 모두가 외울 수 있는 “청산리 벽계수…….” 말고도 “ 동짓달 기나긴 밤 한허리를 버혀내겠다”는 시조와 가곡으로도 불리고 있는 ” 기른 님 만날 길은 꿈길밖에 길이 없어“하고 시작되는 시조는 가히 절창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심심하면 정기적으로 황진이를 드라마 화하고 그때마다 웬만하면 열광한다. 그리고 여배우들은 황진이의 타이틀 롤을 맡으면서 황진이를 재창조하고 톱스타의 반열에 오른다. 그것은 아마도 황진이가 지켜내고 펼쳐내는 격정의 드라마가 우리네 삶의 그대로 투영되어 있기 때문 일 것이다.
조선시대의 신분이라는 굴레가 주는 고통은 삶의 최고조 였을것이니, 불행과 만나서 고통과 악수하고 화해해 본 사람들이 아니면 결코 도달하지 못했을 좁은 문에 그녀가 있기에 이토록 오래도록 고전이 될 수 있는 것일 것이다. 절망의 바닥을 헤매다가 치고 솟구치며 올라오는 찬연한 비상은 아주 짧은 순간에 불과하더라도 오랜 향기를 지닌다. 우리는 그것을 광휘라고도 부른다. 황진이가 맨살로 마주쳐야 했을 당대의 아픔이 승화되어 이토록 오래도록 피어있게 되는 것은 전적으로 문학의 몫이리라. 황진이는 재색을 두루 갖춘 데다 담대함에 있어서 거의 한량이나 진배없는 삶을 살다갔으니 용기에 있어서는 성을 초월한 인간성의 지존이라 할만하다.
황진이를 사모하다가 죽은 동네 청년의 관이 그녀의 집 앞에 멈춰 움직이지 않았다는 말은 아마도 상여를 지고 가던 가족들이 문 앞에서 나와 보지도 않는 처녀를 불러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저 혼자 상사병으로 죽었다한들 황진이에게 책임이 없을 것인가? 잎새에 지는 바람에도 괴롭다하는데……. 속설에 의하면 황진이 속치마와 적삼을 관에 넣어주고야 상여가 떠났다고 하는데 이 대목에 서 황진이의 인생은 시작된다. 죽음에 이르러서도 끝장을 내지 못하는 집착의 벼랑 끝을 보아버린 어린 황진이가 겨루었을 수많은 대상들 중에는 벽계수 밀고도 명창 이사종, 10년 면벽의 지족선사와 화담 서경덕이 있다. 지족선사를 파계하고 서경덕을 추앙하는 것은 일설에 의하면 억불숭유의 조선이 불교를 폄하하고 성리학을 존숭하기 위해 꾸며낸 일화라고도 한다. 황진이는 중종 때의 인물이며 화담 서경덕은 조선 성리학을 집대성하기 시작하는 주기론의 대가이다. 황진이를 화담과 함께 송도3절로 말하는 것은 발칙한 일일지도 모르나 지금까지 통용되는 것을 보면 16세기라는 시대의 관용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고 황진이 삶의 파장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의 시대는 조선전기 양반사회의 모순이 첨예화되기 시작하는 시기지만 임진왜란이후의 조선후기보다는 재산 상속 면에서나 법적으로도 여성의 지위가 어느 정도 보장되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황진이 같은 인물도 나온 것이 아닐는지……. 황진이는 죽어서도 한 사람의 고관을 파직시킨다. 조선시대 최고의 로맨티스트 임제가 서도병마사로 부임하는 길에 황진이 묘 앞에서 지었다는 시 때문에 임지에 가지도 못하고 파직당하는 일화는 황진이 전설의 완결편이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은 어디두고 백골만 묻혔는다.
잔잡아 권할 이 없어 그를 설어 하노라임제(林悌) 1549(명종4~1587(선조20): 평안도사(平安都事)로 부임하던 길에 생전에 교분이 있던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보고 지은 것
조선시대 여성의 삶을 말한다는 것이 신분이라는 굴레가 없어진 오늘 이 시점에서도 우리를 끌어당기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해본다. 그것은 아마도 아직도 세상은 모순된 자들이 판을 치고 그 속에서 사는 우리들의 모습이 물색없다 말이나 행동이 형편에 맞거나 조리에 닿지 아니하다.
고 느껴지기 때문이 아닌가?
그러다가 내 안의 모순은 어디쯤에서 판을 치고 있었던가하는 아찔한 생각이 들자 세상을 탓할 것도 없다 하는 마음이 불현듯 들었다.
[주요 참고 문헌]
1) 기본 텍스트
홍석중, 『황진이』, <대훈닷컴>, 2006
이태준, 『황진이』, <작가문화>, 2003
박태상, 『북한문학의 사적 탐구』, <깊은샘>, 2006
유몽인, 『어우야담』, <돌베개>, 2006.12
『창작과 비평』, <창작과 비평사>, 2004
2) 단행본 및 일반자료
제19회 만해문학상 심사평, 2004
최원식, 「남과 북의 새로운 역사 감각들」, <창작과 비평>, 2004. 여름호.
김창수, 「상허 이태준의 《황진이》」, <민족화해 제20호>, 20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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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10.12
  • 저작시기2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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