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박지원 생애와 열하일기의 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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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박지원의 생애와 문체반정

1. 박지원의 생애와 교우관계
2. 열하일기와 문체반정


Ⅲ. 박지원의 문장론과 수사적 양상

1. 문장론 - 법고창신
2. 산문의 수사적 양상

Ⅳ. 열하일기 분석

1. 주체적 세계인식과 『열하일기』
2.『열하일기』의 표현양식
3.『열하일기』의 문학사적 의의

Ⅴ. 결론

※ 작가연보

※ 참고문헌

본문내용

인물의 묘사에 있어서 이 사실주의적인 수법을 적절하게 사용하고 있다. 또한 연암은 지배층뿐만 아니라 하층 민중들에게도 시선을 돌려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묘사하고 있다.
3.『열하일기』의 문학사적 의의
연암은 백성을 이롭게 하고 만물을 윤택하게 하려는 지향을 가진 실학사상과 그것을 탁월한 문필로 형상화한 『열하일기』로 해서 우리 문학사에 한 획을 긋는 큰 족적을 남겼다.
우선 연암은 우리 문학사에 가장 뛰어난 한문 단편소설을 남겨놓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양반전」을 포함한 초기 소설을 모아놓은 『방경각외전』 등에는 이전 작품들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소설적 형상화 방법과 풍자적 수법, 해학적 표현과 토속적인 방언 및 속담의 자유분방한 구상 같은 획기적인 표현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열하일기』에서 연암은 그의 실학적인 구상을 다양한 문학 양식과 기법으로 마음껏 펼쳐 보이고 있다. 초기 소설에서 보여주던 소설적인 문체와 대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구어식 한문체인 백화체의 사용, 사실주의적인 묘사 등 실로 근대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의 문학적 장치들이 자유롭게 구사되고 있다.
또한 『열하일기』로 대표되는 연암의 문학은 당시 문단에서도 벌써 연암체로 불릴 만큼 독특한 개성을 보여준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후배들의 문학에 소위 조선풍경향을 불러일으키는 데 기여하였으며, 이옥과 김려 같은 작가의 한문 소설 창작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와 같이 『열하일기』는 단순한 중국방문 기행문이 아니라 그의 개혁 사상과 문학적 포부를 탁월하게 펼쳐 보인 18세기 후반 동아시아의 문명 비평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Ⅴ. 결론
지금까지 연암 박지원의 생애와 대표작인 열하일기에 대해서 알아보고, 박지원 산문에 나타난 수사적 양상을 알아보았다. 연암은 언제나 앞서나가는 문인 이었다. 한곳에 고여 있는 물이 아니라 흐르는 물이라는 것이다. 연암의 사상적 측면도 다른 문인들과 달랐지만 연암이 산문에서 사용하는 자신의 수사적 양식에서도 다른 문인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독창성을 보여주었다. 연암의 작품과 사상을 분석해보면 그의 개방적이고 유동적인 사상을 짐작 할 수 있다. 사실적인 사회상을 반영하는 리얼리즘의 성격을 엿볼 수 있고, 당시 문인들의 사상을 따라가지 않고 외부압력에도 꿋꿋이 맞선 그 자체가 지금까지 연암의 작품과 연암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현실과 이상의 기로에서 과감히 현실을 등질 줄 알고, 부조리한 현실에 순응 하였을 때, 고뇌하는 모습이 진정한 문인의 자세인 것이다. 그리고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중국의 사상을 개방적으로 받아들인 그 자체에서도 연암의 실천주의 또한 현대에서 이야기 될 만한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측면에서 자신의 다양한 재능과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연암 박지원. 그의 근대성과 사실주의는 어쩌면 현대에도 충분히 이야기될 수 있는 살아있는 문인일 것이다.
※ 작가연보
1737년 반남 박씨 박사유와 함평 이씨 사이 2남 2녀 중 막내로 한양 서쪽 반송방(盤松坊) 야동(冶洞)에서 2월 5일 축시에 출생.
1752년(16세) 관례를 올리고 유안재 이보천의 딸과 혼인. 장인 유안재에게 《맹자》를 배 우고, 처숙인 홍문관 교리 이양천에게 문장 짓는 법을 배움.
1754년(18세) 우울증으로 고생함. ‘민옹전’에 나오는 민유신을 만난 것도 이 무렵임. 거지 광문의 이야기로 ‘광문자전’을 지음.
1756년(20세) 김이소, 황승원, 홍문영, 이희천, 한문홍 들과 북한산 봉원사 등을 찾아다니며 공부했다. 봉원사에서 윤영을 만나서 허생의 이야기를 전해 들음 이 무렵 <마장전>과 <예덕선생전>을 지음.
1757년(21세) 시정의 기이한 인물이나 사건을 듣고 ‘방경각외전’을 지음.
1759년(23세) 어머니 함평 이씨가 59세의 나이로 별세.
1760년(24세) 할아버지 박필균이 76세의 나이로 별세.
1765년(29세) 삼일포, 사선정 등 금강산 일대를 두루 돌아보고, ‘총석정 해돋이〔叢石亭觀 日出〕’를 지음
1766년(30세) 장남 종의 출생.
1767년(31세) 아버지 박사유가 65세의 나이로 별세. <우상전>, <역학대도전>, <봉산학자 전>을 지음.
1772년(36세) 박제가의 문집 《초정집(楚亭集)》에 법고창신의 문학론을 담아 서문을 씀.
1777년(41세) 장인 이보천이 64세의 나이로 별세.
1778년(42세) 다시 연암골로 돌아옴.
1780년(44세) 삼종형인 금성도위 박명원을 따라 북경으로 감. 5월에 떠나 6월에 압록강을 건넜고, 8월에 북경에 들어갔다가 열하에 들러 다시 북경으로 돌아와 10월 에 귀국. 돌아오자마자 《열하일기》를 쓰기 시작. 둘째 아들 종채 출생. <허생전>, <호질>을 지음.
1781년(45세)《북학의서北學議序》지음.
1783년(47세) 벗이었던 담헌 홍대용이 53세로 별세.
1786년(50세) 7월 유언호가 천거하여 선공감역에 임명.
1787년(51세) 부인 전주 이씨가 51세로 별세.
1789년(53세) 평시서주부로 승진.
1790년(54세) 말단 벼슬아치로 유유자적 지내는 모습을 ‘재거齋居’란 시로 씀.
1791년(55세) 한성부판관에 임명.
1792년(56세) 안의에 부임
1793년(57세) 열녀 함양 박씨전 병서烈女咸陽朴氏傳幷序 지음.
1796년(60세) 안의현감 임기가 끝나 서울로 돌아옴. 제용감주부에 임명되었다가 의금부도 사로 전보됨.
1797년(61세) 7월, 면천군수에 임명. 정조의 명령으로 ‘서이방익사書李邦翼事’ 지음.
1799년(63세) 농서 《과농소초課農小抄》를 지음.
1800년(64세) 8월에 양양부사로 승진.
1801년(65세) 봄에 양양부사를 사직.
1805년(69세) 노환으로 별세.
※ 참고문헌
고미숙외, 한국고전문학 작가론, 소명출판, 1998.
김혈조, 박지원의 산문문학, 성균관대출판부, 2002.
박기석, 연암소설의 심층적이해,집문당, 2008.
박종채, 나의 아버지 박지원, 돌베게, 1998.
이현식, 박지원 산문의 논리와 미학, 이회, 2002.
민족문학사연구소, 민족문학사 강좌, 2000.
김지용, 박지원의 문학과 사상,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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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10.12
  • 저작시기2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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