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 론
2. 본 론
1)하 왕조의 기원과 건립
2)하 왕조의 실재성
·이리두 문화
3.하 왕조의 경제생활
1)농업
2)천문·역법
3)목축업
4)수공업
4.하왕조의 멸망
·걸왕
5.결론
2. 본 론
1)하 왕조의 기원과 건립
2)하 왕조의 실재성
·이리두 문화
3.하 왕조의 경제생활
1)농업
2)천문·역법
3)목축업
4)수공업
4.하왕조의 멸망
·걸왕
5.결론
본문내용
청동기작방의 규모는 매우 커서 그 면적이 대략 1만㎡에 달한다. 여기에서는 청동 제련과 청동기 주조에 사용된 도가니, 화로, 주조 틀, 청동 찌꺼기 등이 발견되었다 한편 궁성 남쪽 담장의 남측 약 20m 지점에서는 녹송석 폐료구덩이가 발견되었다. 여기에서는 수천 매에 달하는 녹송석 조각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 상당수에는 절단과 연마의 흔적이 남아있어서, 녹송석작방이 남겨 놓은 흔적으로 판단된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리두유적은 300만㎡를 초과하는 대규모 유적으로서, 여기에서 담장으로 격리된 항축대기(궁성)과 그 위에 빼곡하게 들어선 대형지상건물(궁전), 주거 공간, 지배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청동예기와 녹송석장식품 등이 발견되었다. 이리두유적과 그 출토 유물에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현상은, 이 유적이 이미 상당한 권력을 장악한 지배자, 대규모 노동력을 동원하여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일 수 있는 풍부한 잉여생산과 발달한 행정조직, 그리고 특수한 물건을 생산하는 전업적 장인 집단까지 두루 갖춘 거대한 고대 도시유적이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이리두유적에서 중국 최초의 ‘문명’을 보게 되는 것이다.
3.하왕조의 경제생활
1)농업
·하왕조의 유적이라고 추정되는 이리두유적의 위치는 낙양시가 위치하고 있다.
낙양은 평원지대와 고원·산악지대가 서로 마주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중국에는 광활한 대륙을 관통하는 황하와 장강이 있다. 냑양의 전략적 중요성은 중국의 수계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즉 낙양은 황하를 끼고 있는 도시이면서 동시에 장강수계를 장악할 수 있는 이상적인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낙양 일대는 황하 및 황하로 흘러드는 수많은 하천의 지류가 제공하는 풍족한 수원 그리고 이들 하천이 만들어준 두터운 퇴적토양으로 인해 농업생산에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리두문화가 발전했던 기원전 2000년 무렵 낙양 일대는, 아열대기후와 온대기후가 교차하여 농업이 발전 할 수 있는 최적의 지역이라고 말할수 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농업을 하는데 있어서 커다란 혜택을 받았고 중국 최고의 인구밀집 지역이였을 것 이다.
2)천문·역법
농업생산 발전에 따라 천문역법지식을 장악하고 실천
문헌 중 ‘하나라 때의 시간(夏時)'에 관한 기록
《하소정(夏小正)》(전국시대)
3)목축업
당시 하대에는 수많은 노예가 목축업에 종사하고 있었고, 또한 전문적으로 목축업을 관리하는 관리가 있었는데 이를 목정(牧正)이라고 불렀다.
4)수공업
수공업 생산은 규모가 확대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술 역시 향상되었으며, 청동기의 주조 등 새로운 생활이 출현하게 되었으니 하대는 이미 청동기 시대로 진입하였음을 짐작 할 수 있다. 고고학 자료 중에서도 역시 이 시기의 청동기 찌꺼기·주조할 때 남은 파편이나 작은 청동기 제품이 적지 않게 발견되고 있다. 청동기 제련 기술의 발명은 생산력의 발전에 있어 거대한 촉진작용을 하고 농업과 수공업 발전의 기초를 다졌을 것이다.
4.하왕조의 멸망
·걸왕
·하나라 마지막 왕으로 이름은 이계이다. 상나라 주왕과 더불어 중국 역사상 폭군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53년간 재위하였으며, 나라가 망하자 추방되어 굶어죽었다. 힘이 장사인 걸왕은 언제나 힘만 믿고 백성들을 괴롭혔는데 그는 포악한 정치로 농업생산을 파괴하였으며, 대외 원정을 남발하여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약탈하였다. 그는 즉위한지 33년째 되던 해에 병력을 동원하여 유시씨(有施氏)를 정벌하였는데 거기에서 유시씨는 걸왕에게 말희라는 미녀를 바쳤다. 걸왕은 말희를 매우 총애하여 그녀가 부탁하는 것이라면 다들어줬는데, 옥으로 장식한 화려한 집, 주지육림등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면서 향락을 즐겼다. 나중에는 상(商)부락의 장인 탕(湯)이 군사를 일으키자 명조에서의 전투에서 패하여서 하왕조는 멸망하고 탕은 상(商)조를 건국하게 된다.
5.결론
하왕조는 기록으로만 존재할 뿐 그 실재가 드러나지 않아서 전설상의 왕조로만 치부되어왔다. 하지만 이리두 유적의 발굴으로 인해 하왕조의 실체가 드러나게 되었다. 여지껏 중국 최초의 왕조는 상왕조라고 알려져 있었지만 이리두 유적의 발굴으로 인해 중국은 국가창건의 시기를 한단계 앞당기게 되었다.
이리두 유적에서 나온 항축대기, 청동기 유물등 그리고 유적이 발굴된 중국의 지정학적 위치를 보면 당시 중국인들의 생활과 경제 활동등을 유추 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마지막 왕이었던 걸왕의 폭정으로 인해 멸망을 하게 되었지만 하왕조는 중국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리두유적은 300만㎡를 초과하는 대규모 유적으로서, 여기에서 담장으로 격리된 항축대기(궁성)과 그 위에 빼곡하게 들어선 대형지상건물(궁전), 주거 공간, 지배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청동예기와 녹송석장식품 등이 발견되었다. 이리두유적과 그 출토 유물에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현상은, 이 유적이 이미 상당한 권력을 장악한 지배자, 대규모 노동력을 동원하여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일 수 있는 풍부한 잉여생산과 발달한 행정조직, 그리고 특수한 물건을 생산하는 전업적 장인 집단까지 두루 갖춘 거대한 고대 도시유적이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이리두유적에서 중국 최초의 ‘문명’을 보게 되는 것이다.
3.하왕조의 경제생활
1)농업
·하왕조의 유적이라고 추정되는 이리두유적의 위치는 낙양시가 위치하고 있다.
낙양은 평원지대와 고원·산악지대가 서로 마주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중국에는 광활한 대륙을 관통하는 황하와 장강이 있다. 냑양의 전략적 중요성은 중국의 수계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즉 낙양은 황하를 끼고 있는 도시이면서 동시에 장강수계를 장악할 수 있는 이상적인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낙양 일대는 황하 및 황하로 흘러드는 수많은 하천의 지류가 제공하는 풍족한 수원 그리고 이들 하천이 만들어준 두터운 퇴적토양으로 인해 농업생산에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리두문화가 발전했던 기원전 2000년 무렵 낙양 일대는, 아열대기후와 온대기후가 교차하여 농업이 발전 할 수 있는 최적의 지역이라고 말할수 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농업을 하는데 있어서 커다란 혜택을 받았고 중국 최고의 인구밀집 지역이였을 것 이다.
2)천문·역법
농업생산 발전에 따라 천문역법지식을 장악하고 실천
문헌 중 ‘하나라 때의 시간(夏時)'에 관한 기록
《하소정(夏小正)》(전국시대)
3)목축업
당시 하대에는 수많은 노예가 목축업에 종사하고 있었고, 또한 전문적으로 목축업을 관리하는 관리가 있었는데 이를 목정(牧正)이라고 불렀다.
4)수공업
수공업 생산은 규모가 확대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술 역시 향상되었으며, 청동기의 주조 등 새로운 생활이 출현하게 되었으니 하대는 이미 청동기 시대로 진입하였음을 짐작 할 수 있다. 고고학 자료 중에서도 역시 이 시기의 청동기 찌꺼기·주조할 때 남은 파편이나 작은 청동기 제품이 적지 않게 발견되고 있다. 청동기 제련 기술의 발명은 생산력의 발전에 있어 거대한 촉진작용을 하고 농업과 수공업 발전의 기초를 다졌을 것이다.
4.하왕조의 멸망
·걸왕
·하나라 마지막 왕으로 이름은 이계이다. 상나라 주왕과 더불어 중국 역사상 폭군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53년간 재위하였으며, 나라가 망하자 추방되어 굶어죽었다. 힘이 장사인 걸왕은 언제나 힘만 믿고 백성들을 괴롭혔는데 그는 포악한 정치로 농업생산을 파괴하였으며, 대외 원정을 남발하여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약탈하였다. 그는 즉위한지 33년째 되던 해에 병력을 동원하여 유시씨(有施氏)를 정벌하였는데 거기에서 유시씨는 걸왕에게 말희라는 미녀를 바쳤다. 걸왕은 말희를 매우 총애하여 그녀가 부탁하는 것이라면 다들어줬는데, 옥으로 장식한 화려한 집, 주지육림등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면서 향락을 즐겼다. 나중에는 상(商)부락의 장인 탕(湯)이 군사를 일으키자 명조에서의 전투에서 패하여서 하왕조는 멸망하고 탕은 상(商)조를 건국하게 된다.
5.결론
하왕조는 기록으로만 존재할 뿐 그 실재가 드러나지 않아서 전설상의 왕조로만 치부되어왔다. 하지만 이리두 유적의 발굴으로 인해 하왕조의 실체가 드러나게 되었다. 여지껏 중국 최초의 왕조는 상왕조라고 알려져 있었지만 이리두 유적의 발굴으로 인해 중국은 국가창건의 시기를 한단계 앞당기게 되었다.
이리두 유적에서 나온 항축대기, 청동기 유물등 그리고 유적이 발굴된 중국의 지정학적 위치를 보면 당시 중국인들의 생활과 경제 활동등을 유추 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마지막 왕이었던 걸왕의 폭정으로 인해 멸망을 하게 되었지만 하왕조는 중국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