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사의 과거와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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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형성

2. 설계

3. 구조

4. 시공

5. 발생과 발전과정

6. 서양 건축사

7. 근대건축

8. 현대건축

9. 한국의 현대건축

본문내용

달라스 공항 건물(1958∼62)), P.루돌프의 예일대학 예술학부(1959∼63) 등이 대표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유럽에서는 르 코르뷔지에의 마르세유의 아파트(1946∼52), 롱샹의 교회당(1950∼54), 네르비의 스포츠 전당(1956∼57), M.브로이어의 유네스코 본부(1955∼58), H.샤론의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를 위한 콘서트홀(1956∼63)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현대건축의 특색은 이상과 같은 선단적(先端的) 변화와 함께 근대건축의 일반적인 보급에 있으며, 한국을 비롯한 중진국, 아시아 ·아프리카 등의 후진지역에서 선진국 이상으로 급속히 보급되고 있다는 점에 있다. 말하자면 르 코르뷔지에의 인도의 샹디가르(Chandigarh) 종합 도시계획(1950), 요른 웃존(Jrn Utzon)의 시드니 오페라하우스(1956), O.니마이어의 브라질 종합도시계획(1956) 등은 국제적인 관심을 모은 것들이다.
9. 한국의 현대건축
건축은 거기에 관련된 여러 요인, 즉 사회·경제·정치·문화 등이 합성된 요인의 복합적인 결과로서 시대에 따른 형태와 양식으로써 표현된다. 일제강점기의 서구이식 문화의 식민지적 재이식은 광화문 철거 등에서 보듯이 우리의 정통적 건축문화를 말살하려는 것이었다.
일본이 한국을 강점했던 1910∼45년 사이의 한국에서의 건축활동은 일본의 건축문화의 연장으로서, 일본에서 급속히 성장하고 있던 서구문화가 그대로 이식되던 시기였다. 이것은 우리의 근대건축이 형성될 시기였으므로, 우리의 진실한 건축적 기반이 조성되는 것을 방해하였으며, 나아가서는 8·15광복 후 다른 나라와 보조를 같이 하여 현대건축의 길을 여는 것을 막았다. 이 당시(1920∼30)는 일본의 건축계가 절충주의와 전위적인 서구건축의 시세션(secession) 유파의 건축이 횡행하던 시기이다. 이 당시의 일본 건축계의 사정이 바로 우리 건축계의 현실이었다. 이렇게 한국의 근대 건축은 일본인 또는 외국인의 손을 빌려서 일본인에 의하여 서구건축을 그대로 옮기는 작업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당시의 대표적 건물로는 조선은행(현 한국은행, 1912년 준공)·구 조선호텔(1914)·경성우체국(구 중앙우체국, 1915년 준공)·서울역(1925) 등이 있으며, 이들은 르네상스 건축의 아류(亞流), 또는 절충주의 건축으로 볼 수 있다. 한국에서 양식적 표현이 전혀 보이지 않는 합리주의적 건축의 최초 시도는 1927년 건립된 남대문 옆 구경성상공장려관(대한무역진흥공사 구사옥)이다. 이러한 경향의 건물이 일본에 출현한 시기는 한국과 거의 같은 시기인 1927년의 도쿄[東京] 아사히신문사[朝日新聞社], 28년의 신주쿠[新宿] 무사시노관[武藏野館] 등인데, 이런 사실로 미루어 일본 건축의 식민지적 연장이 그대로 실현된 것을 알 수 있다.
8·15광복 이후 건축문화의 발전을 기대하였으나 식민지 후유증으로 인하여 모진 진통을 겪게 되어, 10년 남짓한 문화발전의 단절기가 오게 되었다. 말하자면 일본은 한국의 기후·전통·민족성을 무시한 채 그들 섬나라의 건축양식을 이식한 결과, 한국 민족만의 건축을 실현할 기회를 얻지 못한 혼란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다. 1950년 6·25전쟁으로 건축문화가 단절되었고, 1955년부터 61년 군사혁명에 이르는 자유당 집권기는, 뒤늦게 개화를 본 국제 건축양식의 무비판적인 도입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는 정치적 혼란 및 경제적 빈곤으로 인하여 건설에 큰 기대를 걸 수 없었던 시기였지만, 운크라(UNKRA)와 유네스코(UNESCO)의 재정적인 도움으로, 서울 대방동에 740평의 국정교과서 주식회사의 인쇄공장이 건립되어 효시를 이루게 된 것은 의의 있는 일이었다. 1955년 김태식 작 국영 제1방송국, 정인국 작 인하공대 기공관 및 기숙사, 종합설계 작 공군본부 청사, 1956년 강윤 작 이화여대 강당, 송민구 작 동국대학 본관, 1957년 강명구 작 서울농대(수원) 기숙사 등은 같은 계열의 작품으로 한국의 근대 건축기술 발전의 시초로 볼 수 있다.
소재로 엮어진 기능 위주의 건물이기 때문에 특이한 차이가 있을 수 없는 한국적 형의 여러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1957년 르 코르뷔지에에게 수학하고 귀국한 김중업(金重業)의 작품으로 명보극장과, 현상설계를 모집하긴 했으나, 실제로는 이천승의 주관으로 설계된 구(舊)시민회관 설계가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작품들은 보다 참신한 건축양식을 띠었다.
1959년에는 ‘가장 기능적이고 이상적인 국회의사당, 대한민국 국회의사당으로서의 품격이 구현된 건축양식’을 내세워 국회의사당 현상설계를 모집한 결과, 재일교포로 구성된 박춘명·김수근·강병기·정경·정종태의 설계팀이 당선되었다. 1962년 위커힐 건물, 같은 해 을지로 입구 오양 빌딩(김수근 작)은 사무소 건축으로 새로운 경지를 보였는데 마감재료의 새로운 경향인 익스포즈드 콘크리트(exposed concrete)를 소재로 하여 새로운 면을 보였으며, 63년 마포아파트 건설은 주택공사의 주관 아래 새로운 도시주거 형태를 제시하였다. 1964년 김수근의 자유센터는 주한 프랑스대사관저(김중업 작) 이후 2번째로 등장한 획기적 작품으로 대두되는 등, 보다 적극적인 건축발전을 보게 되었다. 1965년은 건축가의 직분이 확립되는 해였다.
건축사법이 공포된 지 2년 만에, 제1회 건축사자격시험을 개최하여 많은 건축사를 배출하였다. 1968~69년의 한국 건축의 특징은 점차적인 건물의 대형화·고층화 현상이다. 정부종합청사(21층), 조선호텔(20층), 대연각호텔(20층), 삼일빌딩(31층) 등이 세워졌다. 종합청사는 특이한 구조를 자랑하였고, 조선호텔은 상업건물로서 특이한 평면형과 모든 세부처리방법 등이 한국적 경지를 초원한 예로 들 수 있다.
1969년을 장식하는 건축군으로서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으로서 보다 새로운 감각으로 주위환경에 조화하는 단지를 조성하였다. 1970년대 플라자호텔, 구 반도호텔 자리에 건설된 롯데호텔, 남산의 하얏트호텔과 1980년대에 대한생명63빌딩, 무역센터, 예술의 전당 등 국제적 수준의 건물들이 들어서서 건축 양상은 다채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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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23페이지
  • 등록일2011.10.19
  • 저작시기2011.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09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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