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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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백범 김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론
1.1 백범김구기념관
1.2 연구의 필요성과 목적
1.3 연구 내용 및 방법

2. 백범김구 한국에서의 삶
2.1 백범 김구 성장기
2.2 백범 김구 독립운동

3. 백범김구 중국에서의 삶
3.1 백범 김구 대한민국임시정부
3.2 백범 김구 한국광복군

4. 결론
4.1 백범 김구 나의소원
4.2 답사 소감

본문내용

두 사람이 기쁜 얼굴로 사진을 찍읍시다.”- 이봉창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는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일본왕의 생일 축하 식장에 폭탄을 던져 상하이 주둔 일본군사령관 등을 폭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임시정부의 위상이 제고되었고 장제스의 임시정부지원을 약속받아 한국광복군을 창설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 시계는 6원을 주고 구입 한 것인데 선생님 것은 불과 2원 짜리입니다. 저는 이제 한 시간 밖에 더 소용없습니다. 시계를 바꾸시지요.”, “자, 폭탄을 2개 줄 테니 한 개로는 적장을 그리고 또 한 개로는 그대의 목숨을 끊어라!”, “삼가 가르침에 따르겠나이다.”, “바라옵건데 선생께서는 나라를 위해 몸을 삼가시고 끝까지 분투하소서!”- 윤봉길
이러한 한인애국단의 활동은 우리 민족에게 새로운 조국 독립의 의지와 신념을 불어 넣어주었고 대외적으로는 우리의 독립열망을 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들이 있은 후 일본은 김구를 잡겠다고 혈안이 되어있었다. 의거 후 김구의 현상금은 당시 돈 60만원이었는데 지금의 물가로 환산해보면 무려 198억 정도 되는 돈이었다고 하니 김구 선생이 얼마나 일본에게는 처단하고 싶은 대상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3.2 백범김구 한국광복군
당시 충칭 임시정부는 조직을 재정비하였다.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건국이념에 조소앙의 삼균주의(정치, 경제, 교육)를 받아들이고 민족통일전선 형성을 위해 민족주의 좌파인 조선민족혁명당 김원봉을 합류시켰다.
김구는 1940년 한국광복군을 조직하여 본격적 군사 활동 전개하였다. 한국광복군은 중국내육 충칭에 위치해있었으며 김구와 지청천의 지도하에 운영되었다. 이들은 조선의용대 일부를 편입하고, 중국 국민당 정부와 군사협정을 맺고, 대일본선전포고, 대독선전포고를 각각 1941년, 1942년에 하고, 영국군과 연합작전을 전개하고, 미국 OSS와 연합하여 국내 진입 작전을 준비하는 등 활발한 무장 독립 운동을 전개했다.
4. 결론
4.1 백범김구 나의소원
“네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하나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하면, 나는 또“우리나라의 독립이오.”할 것이요, 또“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기념관의 2층에 가면 김구 선생을 추모하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백범의 위호를 감상하면서 선생의 겨래 사랑과 나라 사랑의 정신을 느껴볼 수 있다. 그리고 김구 선생 뿐 아니라 그를 뒤따랐던 독립 운동가들의 묘역도 함께 마련되어 있다.
“나와 내 동지들은 시대를 업고 허망하게 가지만, 대한민국 방방곡곡에서 울리던 만세의 소리를, 대한민국을 응원케 만들었던 목숨 바친 거사를, 영원히 기억하였으면 한다.”
4.2 답사 소감
내가 백범김구기념관을 알게된건 인터넷에서 근현대사 박물관에 대해 이곳저곳 찾아보다 우연히 본 것이었다. 인터넷에 올라와있는 간단한 약도 하나만 가지고 모르 는 지역을 혼자 찾아갔었는데 막상 가보고는 정말 놀라 지 않을 수 없었다. 그냥 작고 지루한 박물관이겠거니 하고 별 기대 없이 갔는데 엄청 넓고 깨끗한 최신식건 물에 주변 환경도 굉장히 좋았다. 나중에 집에 와서 찾아보니 부지 면적만 5552평이었다. 입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김구 상이다. 새하얀 순백 색으로 만들어진 김구 상은 일단 그 크기와 엄중함으로 사람들을 압도했다. 1층부터 천천히 둘러보는데 내부는 예전에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전시만 돼있는 박물관이 아니었다. 모든 주제별로 버튼을 눌러 영상을 감상할 수 있었고 3D로 되어있어서 실제로 눈앞에 김구의 일상이 펼쳐지기도 했다. 따로 만들어져있는 시청각실에서는 김구의 인생을 압축해 놓은 필름이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이런 시설에 한번 놀랐지만 이런 곳에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점도 두 번 놀랐다. 몇 천 평의 크기가 무색할 만큼 이곳에는 나를 포함에서 5사람 밖에 없었다. 입장료도 무료인데 내가 거의 기념관전체를 대관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이런 의미 있고 좋은 공간을 만들어만 놓고 별로 대중들에게 홍보가 되어있지 않은 것 같아 아쉬웠다. 학교 등에서 단체로 예약해서 오는 경우도 많이 있겠지만 그런 것보다도 개인이 원해서 직접 가서 보면 더 의미 있고 기억에도 남을 것 같다.
관람객 중에는 백발의 노부부와 그 부부를 모시고온 오십 세 정도 돼 보이시는 아드님도 있었는데 이 일행은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어쩌다 같은 구역에서 김구 선생이 고문을 받는 영상을 함께 보게 되었는데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는 “일본 놈, 빠가야로, 악랄한”등의 욕을 하시며 계속해서 한숨을 쉬셨다. 난 영상보다도 할아버지의 말씀에 더 귀가 기울여졌다. 나에게는 역사 속 인물이기만 한 김구 선생이 살아계실 당시 함께 살아계셨을 이 분들을 생각하니 이 분들은 나와 생각하고 느끼는 바가 많이 다르시겠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과제를 위해 열심히 김구 선생의 일생을 필기하느라 정신없는 내 손이 너무 부끄럽게 느껴졌다.
百聞이 不如一見이란 유명한 말이 있듯이 정말 김구 선생의 기념관을 다녀오고 나서 그 분에대해 느끼고 생각하는 바가 전과 많이 달라져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근현대사라는 과목을 배울 때 김구라는 말을 몇 번이나 들었을까. 교과서에 있는 역사는 한 사람의 평생을 이야기해주지 않는 만큼 김구 선생에 대해 충분히 알고 느끼기에 한계가 있었던게 사실이다. 또 난 아직도 내가 살고 있는 이 나라를 위해 힘쓰신 많은 분들에 대해 여전히 아는 바가 거의 없다. 이번 답사를 비롯해 한 학기 한국근현대사 수업을 들으면서 고등학교 시절 시험을 준비할 때처럼 전문적인 용어나 사건들을 줄줄 꿰는 그런 식은 아니었지만 여러 자료들을 보면서 역사속의 사람들이 결코 옛 시대의 위인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고 감정이 있었고 나름의 삶이 분명 있었다는 것을 어쩌면 당연한 이 점을 피부로 많이 느끼게 된 시간이었다. 그래서 그만큼 의미 있고 미련이 남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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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11.16
  • 저작시기2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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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71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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