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불교 전래와 공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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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신라의 불교 전래와 공인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서론

Ⅰ. 불교의 전래

1. 전래 시기
2. 전래 과정

Ⅱ. 불교의 공인

1. 법흥왕의 개혁과 불교의 공인

1-1 4~5세기의 신라
1-2 법흥왕의 개혁
1-3 불교의 공인

2. 설화에서 보는 불교의 공인의 어려움

2-1 사금갑 설화
2-2 이차돈의 순교설화

결론

본문내용

얼굴빛이 변하면서 아무 말도 못하였다. 대왕은 분노하여 베어 죽이라고 명령했다. 유사(有司)가 그를 묶어 관아로 끌고 가니 사인이 맹세했다. 옥리(獄吏)가 그의 목을 베니 허연 젖이 한 길이나 솟구쳤다.
-『삼국유사』권 3. 흥법 3.
삼국사기에서는 이차돈의 죽음에 대해 순교(殉敎)의 형식으로 기록하고 있다. 법흥왕이 홀로 불교의 수용을 주장하는 이차돈을 처형한 것이다. 처형 후 이차돈이 미리 예고한 대로 흰 피가 솟구치는 이상한 일이 일어나자 다른 신하들이 불교 공인에 대해 다른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는 내용이다. 여기에서는 흥륜사 건립에 관한 이야기가 언급되지 않는다.
해동고승전이나 삼국유사에는 법흥왕이 흥륜사 건립에 관해 책임을 물어 이차돈을 처형시켰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두 기록에서는 이차돈의 처형이 있기 전에 법흥왕과 이차돈이 그의 처형에 대해 서로 모종의 계약이 있었다고 전한다.
각 기록에서 차이가 보이지만 이차돈 설화에서 가장 주목해야할 점은 법흥왕이 불교 공인을 하기위해 샤머니즘적 신앙을 고수하려했던 귀족세력과 대항하는 과정에서 이차돈이라는 젊은 신진 관료가 희생당했다는 사실이다.
신라의 귀족세력들은 고구려, 백제에 비해 강력한 세력을 유지해왔다. 그 기원은 시조인 박혁거세가 육부(六部)의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는데서 시작한다. 때문에 육부의 씨족장들은 신라 국사의 비중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그 대표적인 예로는 귀족들의 만장일치에 의해 의결되는 화백회의라는 특별한 제도를 들 수 있다. 이 연맹 귀족 세력들은 이미 법흥왕의 일련의 개혁정책 즉, 병부 설치, 율령 반포 등의 왕권강화 정책에 커다란 불만을 품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법흥왕이 개혁의 연장선상으로 왕즉불(王卽佛) 사상을 내포한 불교를 내세우자 샤머니즘적 신앙에 기반을 둔 귀족세력은 기다렸다는 듯 당시 신라의 지배적이었던 신앙체계인 샤머니즘을 옹호, 불교를 배척하는 ‘무속 옹호 불교 배척’의 명분을 내세워 배불세력을 결성, 법흥왕의 개혁정책을 저지하고자 한다. 이때에 이르러 법흥왕의 개혁은 위기를 맞는다.
이 위기를 타개한 것이 바로 ‘이차돈의 순교’였다. 법흥왕은 이를 통해 위기를 기회로 만든다. 친불(親佛)세력 즉 자신의 측근이었던 이차돈의 순교의지를 활용, 그가 왕명을 위조하여 불사를 일으킨 혐의를 적용하여 처형하는 대신 귀족들에게 불교 공인을 요구한 것이다. 이처럼 법흥왕은 불교 공인의 단호한 의지를 드러냈다. 병부의 설치로 인해 병권의 상당 부분을 상실하고, 관등의 정비, 골품제의 성립에 의해 그 세가 많이 약해진 귀족들로서는 이러한 법흥왕의 거래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기록에서 이차돈의 순교 이후 흰 피가 솟고 꽃비가 내렸다는 것은 종교인의 순교에서 흔히 보이는 이적설화적 요소라고 볼 수 있다. 이 설화적 요소는 왕과 귀족간의 팽팽한 대립을 다소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이차돈의 순교에 하늘(天)이 개입함으로써 귀족 세력들이 그토록 반대해오던 불교를 수용할 수 있는 명분을 준다고 볼 수 있다.
結 論
신라의 불교공인은 고구려나 백제보다 약 150년 정도 늦게 이루어졌고 그 진척의 속도도 매우 느렸다. 그 원인은 유이민 집단에 의해 건국된 고구려나 백제와는 달리 신라는 토착집단에 의해 세워진 국가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샤머니즘적 토착 신앙에 기반을 둔 종래 부족, 씨족장 출신의 귀족들은 왕즉불 사상 등으로 왕권강화에 기여하는 불교의 공인에 강력히 반발하였던 것이다. 또한 신라가 중국문화와 교류하는데 지리적 약점을 갖고 있었다는 데도 그 원인이 있다. 일찍부터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였던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신궁(神宮) 등의 자체적인 신앙체계를 가지고 있었던 신라는 그 폐쇄적인 성격 때문에 불교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다.
4~5세기 무렵 농경의 발달로부터 비롯된 경제성장은 계급사회와 권력구조를 강화하였고 이는 부족연맹체 성격이 짙은 신라사회를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성장할 수 있게 만드는 기반이 되었다. 이 무렵 왕위에 오른 지증왕은 일련의 개혁정책을 통해 이후 아들인 법흥왕의 왕권 강화 정책의 기반을 마련한다. 이로써 5세기 말, 6세기 초 무렵에 신라는 새로운 사회구조를 형성하는데 있어 정치, 경제적인 기반을 갖추게 된다.
지증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법흥왕은 528년 불교를 공인한다. 법흥왕은 불교의 공인을 비롯하여 왕권강화를 골자로 하는 여러 개혁정책을 폈다. 불교의 왕즉불사상이나 윤회사상은 법흥왕의 개혁정책에 이념적 체계로 작용하여 신라의 신질서, 신체제 구축을 도왔다. 신라에서의 불교 공인은 기존의 씨족, 부족 단위로 분할되어있던 신라인을 불교라는 하나의 사상적 체계로 통합하는 역할을 했다.
법흥왕 이후 진흥왕 대에는 신라 최대의 절인 황룡사, 법주사 등을 비롯한 많은 사찰을 건립하여 불교를 장려하였고, 특히 불교의 호국적 성격을 강조하여 신라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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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신라,   불교,   전래,   공인,   법흥왕,   이차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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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2.29
  • 저작시기200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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