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향촌사회 = 향촌지배와 국가와 사족, 그리고 전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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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의 향촌사회 = 향촌지배와 국가와 사족, 그리고 전란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머리말
2. 조선건국 초기의 향촌지배조직
3. 16세기 향촌 내 사족지배 질서의 강화
1) 향촌 내 재지세력의 변화
2) 16세기 사족지배질서의 강화-16세기의 사회문제와 향촌지배
4. 양란 직후의 향촌상황
5. 양란이후 향촌지배 질서를 위한 대책과 대응
1) 정부의 대책
(1) 양민 확보정책 - 호패법
(2) 생산력 복원정책 - 개간사업과 부세제도의 개
(3)국가재정 확충정책
2) 사족들의 대응-경재소의 혁파와 향촌지배
6. 맺음말

본문내용

이라는 명목으로 육의전에 대해 일종의 특별세를 징수한 것이다. 그리고 청에 보낼 공물을 조달 할 필요에 의해서도 금난전권은 필요했다. 즉 종래의 상업세보다 훨씬 부담이 큰 국역을 부과하고 그것을 담당하는 시전에 대해 독점상업권을 부여한 것이다. 또한 상공업의 발달과 함께 화폐유통에서 또한 국가재정을 확충하려고 하였다. 화폐의 유통과 더불어 광업에 관한 일련의 정책 또한 국가재정의 확충이라는 목표아래 시행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다음으로 관둔전의 확대를 통해서도 국가재정을 확충하려고 하였다. 장기간의 전쟁으로 생산체계가 붕괴되면서 국가기구의 물질적 토대의 확립은 절실한 문제가 되었다. 따라서 정부는 전후 늘어난 무주지를 지급하여 각급 관청의 재정을 충당하고 동시에 황폐한 농지의 개간을 통해 농업 생산력 체계의 복원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하려고 한 것이다.
또한 정부는 전란이 가져온 군사적·재정적 긴급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군공수직, 납속책 등을 취하였는데 이는 종래의 엄격한 신분질서를 이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가운데 납속은 임란 때 국가재정의 고갈과 군량미의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행해졌으나 이 제도는 임란이후 국가의 재정이 어려울 때마다 수시로 실시되어 신분제의 이완을 야기 시키게 되었다.
2) 사족들의 대응-경재소의 혁파와 향촌지배
전란으로 인해 전국은 처참한 피해를 안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재지사족 또한 그 참화를 모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재지사족의 향촌 내 영향력 확보에 전란은 도움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전란의 영향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것은 전국적인 범위에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고 있던 중앙 관료였다. 토지의 황폐화와 노비의 사망과 도망에서 오는 경제적인 몰락은 그들이 더 이상 정치적으로 강력한 세력으로 존재할 수 없게 했다. 재지사족 또한 피해를 입었으나 그들은 신속한 복구 작업을 통해 피해를 어느 정도 최소화 했으며, 전란 중에 그들이 펼친 의병활동은 그들의 세력기반을 어느 정도 보호 할 수 있게 했다.
이러한 향촌사회의 변화는 1603년 경재소의 혁파로 나타나게 된다. 경재소의 혁파로 재지사족은 중앙권력의 통제와 간섭을 배제하고 독자적인 향촌지배를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 또한 대부분의 지역에서 사라진 전란 이전의 향촌지배 조직을 복구하거나 또는 향약과 동약을 새로이 실시하고 있었던 것은 사족의 독자적인 향촌지배를 위한 노력의 사례이다. 특히 이러한 향촌사회에서의 움직임은 전란전의 지배조직을 단순히 복구하는 차원을 넘어 일정한 범위에서의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고 있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6. 맺음말
지금까지 조선의 향촌사회의 운영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조선왕조의 향촌지배 질서는 각 시기마다 정치적, 경제적 모습에 따라 달라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극심한 전란을 겪은 후 향촌지배는 그 변화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고 할 수 있다. 전한이후의 정책에서 주목하는 것은 17세기 국가재조와 관련하여 향촌지배정책의 전환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는 전통적인 군현제 정비 및 수령제 강화정책에서 한걸음 더 나가가 보다 구체적인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시행하고자 했던 것이다. 즉, 전란 이후의 왕들은 전란의 극복을 위해 생산현장이자 통치의 객체인 향촌사회, 민에 대한 통치조직을 정비하고 운영하고자 한 것이다. 17세기 조선왕조는 향촌정책을 통해 기존의 재지사족 뿐 아니라 농민, 신흥세력의 이해관계를 나름대로 조정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정책들이 실현되고 운영되는 향촌지배의 실상을 파악하는 것은 조선후기의 역사를 보는데 유용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주로 국가에 의한 향촌지배의 모습을 서술하였다. 따라서 국가 이외에 다른 재자 사족층이나 직접적인 정책의 수혜자가 되는 농민들과 같은 일반 하층민에 대한 설명은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국가의 정책과 그들의 반응이라는 측면과 조선왕조가 건국 초기부터 향촌 구석구석까지 영향력을 미쳐 일원적인 중앙집권체제를 추구한 점을 미루어 보았을 때 향촌사회에 중앙정부가 미친 영향은 적다고 할 수 없을 것이고, 그러한 정부의 노력을 살펴보는 것 또한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31, 탐구당, 1995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34, 탐구당, 1995
정진영,「16·17세기 재지사족의 향촌지배와 그 성격」,『역사와 현실』, 역사비평사, 1990
오영교,「양난이후 향촌사회의 운영실태」『조선후기 향촌지배정책연구』, 혜안,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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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3.06
  • 저작시기2012.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3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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