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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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들어가며

Ⅱ. 흥선대원군의 일생

Ⅲ. 당시의 국제정세

Ⅳ. 흥선대원군의 정치

Ⅴ. 병인양요 신미양요 척화비

Ⅵ. 오페르트와 대원군

Ⅶ. 세도정치를 종식시킨 조대비

Ⅷ. 나가며


<참고문헌>

본문내용

아마 흥선대원군은 위인이 됐을 것이다.
Ⅷ. 나가며
너무 안타깝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우선 이 시기에 다른 나라들은 자의든 타의든 서양과의 교류를 준비하고 있었지만 우리나라는 세도정치의 폐해로 나라전체가 혼란과 동요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또한 지리적 영향으로 서쪽은 중국대륙, 동쪽으로는 일본열도로 둘러싸여있어 유럽의 열강들과 미국과 직접 닿을 수 없었다. 물론 이들과 바로 맞닥뜨리지 않았기에 서구열강의 침략을 막을 수는 있었겠지만 이로 이해 우리의 문호개방은 늦을 수 밖에 없었고 오히려 일본이라는 제3자로 인한 피폐가 더욱 커지는 계기가 되었다.
대원군은 꽤 괜찮은 인물이었지만 세계정세에 어두운 사람이었다. 그의 개혁정치는 혁신적이었으나 세도정치로 약화된 왕권을 강화시키는 목적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의 반대세력이 나타나게 된다. 또한 오페르트의 남연군 묘 도굴사건으로 인한 감정의 개입이 쇄국정책을 강화시킨 것은 큰 실수였다고 본다. 그는 막강을 권력을 잡았던 몇 안되는 사람중에 한명이었다. 그 권력으로 우리나라를 더욱 발전시킬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 자신이 세계정세에 밝지 못했고 너무 큰 욕심이 있었고 명성황후와 고종과의 갈등으로 결국 실각되었다. 그의 집권 초기에 외국인들은 통상수교를 요구해 왔다. 조약도 불평등하지 않았고 침략의 의도도 없었다. 아니 그들 나라의 내부사정이 좋지 않았기에 침략에 모든 힘을 쏟을 여유조차 없었다. 하지만 역사의 우발과 흥선대원군의 쇄국의지가 빚은 안타까운 사건은 우리나라를 뒤쳐지게 했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를 조사함으로써 우리는 우리나라의 미래와 후손들은 위해 지금이 제2의 흥선대원군의 시대로 평가되지 않도록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한편으로 이로 인해 자발적 근대화를 이루지 못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던 역사는 우리의 국민성에 영향을 줬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외국인들의 조선사회에서의 생활기를 보면 ‘조선 사람들은 느긋하고 서두르는 법이 없다’는 내용을 찾을 수 있다. 한가롭고 여유로우며 자연과의 조화를 이룬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나라는 ‘빨리빨리’와 ‘냄비근성’으로 표현되어진다. 하지만 외국인들의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원래 그런 것은 아니다. 미처 준비하지 못하고 강제적으로 개항해야 했던 그리고 남들보다 느림으로 인해 식민지가 되어야 했던 현실로 인해 바뀐 것은 아닐까? 서두르지 않으면 빼앗기거나 고통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에 말이다.
서양과 직접적이며 우호적으로 교류하지 못한 것과 지배층의 이념에 따라 한나라의 운명이 결정되는 현실이 안타까우며 지금의 지배층은 지금의 권세를 누리기 위해 나라의 운명을 단축시키는 일은 만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참고문헌>
신복룡 외 『신복룡교수의 이방인이 본 조선 다시읽기』
이영화 『조선시대 조선사람들』
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한국』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이규태 『개화는 싫어 개국은 더욱 싫어』
류시원 『풍운의 한말 역사 산책』
이민수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치와 그 한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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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3.07
  • 저작시기2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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