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 그것들이 사회 내에서 참된 이야기의 기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둘째, 여러 집단이 동일한 이야기를 믿고 있어서 다소 안정된 공동체가 유지된다. 만일 한 공동체 내에서 서로 이질적인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다른 이야기들을 믿게 되면, 그 공동체는 와해되기 시작할 것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삼위일체라고 믿는다. 포스트모더니스트는 이 이야기가 실재와 부합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런 주장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리스도인들은 부합한다고 설명할 것이다. 자연주의자는 '우주가 존재의 전부'라고 실제로 믿겠지만, 포스트모더니스트는 그런 신념이 원리적으로나 실제적으로 입증될 수 없다고 설명할 것이다. 어쨌든, 이야기는 사회를 결속시키는 큰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 이야기가 없다면 서로 이질적인 덩어리에 불과한 사회를 하나로 묶을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에는 "거대담론에 대한 불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 문화에는 구성원들의 충분한 동의를 얻어서 실제로 거대담론의 역할을 하는 이야기가 엄연히 존재한다.
10. 검토된 삶 p.341-353
세계관의 선택 제한된 수의 세계관 중에서 어떻게 선택할 수 있을까요? 초월적이고 인격신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가정하는 세계관과 그렇지 않은 세계관 중에서, 무슨 근거로 선택을 해야 하는가? 적절한 세계관이 되기 위해선 다음의 4가지의 특징을 모두 갖추어야 한다.
(1)내적인 지적 통일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인데 위스콘신 대학의 케이트 얀델 교수 "만일 어떤 개념체계의 본질적 요소가 논리적 일관성이 없는 일련의 명제들로 구성되었으면 그 체계는 틀린 것이다." 라고 말한다. 바로 이러한 근거 위에서 각 세계관이 어떤 점에서 일관성이 없음이 드러났다. 특히 뉴 에이지의 경우에는 많은 점에서 일관성이 없음이 드러났다.
(2) 각자가 일상생활의 의식적 경험에서 수집한 것, 또는 비판적 분석과 과학적 탐구를 통해 얻은 것, 또는 다른 사람의 경험을 통해 들은 것 등 모든 형태의 자료를 포함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죽은 자 중에서 부활했다면 우리의 체계는 그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그런데 그 자료들을 거부하거나 포함할 수 없는 세계관이라면 그것은 거짓 세계관이거나 적어도 부적절한 세계관일 것이다.
(3) 적절한 세계관은 그것이 설명하겠다고 주장한 것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각 세계관에게 던져야 할 심각한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즉 인간은 생각하지만 그것이 불완전하다는 사실, 사랑하지만 또한 증오한다는 사실, 창조적이지만 또한 파괴적이라는 사실, 현명하지만 종종 어리석다는 사실 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진리나 개인적 성취에 대한 인간의 갈망을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쾌락이 완전히 채워질 만큼 충분한 경우는 왜 그리 드물까? 왜 우리들은 항상 더 많은 것을 원할까? 사람들이 비도덕적 행동 양태를 거부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 될 수 있을 것인가? 물론 이것들은 거창한 질문이다. 그러나 세계관이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질문들 때문이다. 즉 이러한 질문들에 답을 하거나 적어도 대답을 제공할 틀을 제시하기 위해 세계관이 있는 것이다.
(4) 적절한 세계관이란 주관적으로 만족스러운 것이어야 한다. "어떻게 한 세계관이 만족을 줄 수 있는가?" 하고 질문했을 때 그 대답은, 세계관은 진실 됨으로써 만족을 준다. 아마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세계관을 검토하게 하는 첫 번째 이유는 만족감의 부재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바, 무엇인가 잘 맞지 않는다는 막연하고 꺼림칙한 감정이 우리로 하여금 만족을 추구하게 한다. 우리의 세계관이 만사형통하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묻어 버리려고 노력하지만 의심은 표면으로 다시 떠오른다. 자신의 불안에 가면을 씌우지만 그 가면은 떨어져 나간다. 사실 우리가 진정한 만족을 누리기 시작하는 때는 바로 의문점을 계속 추구하여 진리를 발견할 때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11. 리뷰
저자는 세계관을 정의할 때 핵심 질문으로 "제1의 실재, 곧 참으로 실재적인 것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제일 먼저 제기하는 것에 대해 이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형이상학(혹은 존재론)을 모든 세계관의 토대로 간주한다. 존재가 인식보다 앞선다. 만일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법이다. 그래서 유신론을 정의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한 것이고,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삼위의 인격이시며, 초월적이고 내재적이며, 전지하시고 주관적이며, 선한 존재로 규정했던 것이다. 유신론의 나머지 내용은 모두 가장 근본적인 존재에 대한 신념에서 나오게 된다. 그러나 기독교 유신론이 포기된 이유는 그것의 내적 비일관성이나 사실 을 설명할 능력이 없다는 점 등에 있지 않고, 그것이 부적절하게 이해되거나 완전히 망각되었거나 혹은 당면한 문제에 적용되지 않은 점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유신론은 의문점들과 거친 부분들을 지니고 있다. 또한 문제점도 있다. 유신론은 “유한한 인간은 어떤 세계관에도 그러한 문제들이 항상 있다는 것”을 설명해 주고 있다. 유신론은 인간이 의미와 중요성을 찾을 수 있는 준거의 틀을 제공한다. 기독교 유신론을 단지 지적 구조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것을 완전히 받아들인 것이 아니다. 이 세계관을 이해하고 이 세계관 안에서 사는 것과 관련된 심오한 인격적 차원이 있다. 왜냐하면 이 세계관은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그 분께 인격적으로 의지하고 있다는 것,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인격적 반역, 그 분과의 교제를 회복하기 위해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등을 인식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제임스 사이어의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은 개인의 세계관을 체계적으로 궁극적인 실재, 인간관, 사망관, 윤리관, 역사관 등에 대한 질문을 중심으로 유신론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신론, 자연주의, 허무주의, 실존주의, 동양 범신론적 일신론, 새로운 의식에 이르기까지 다소 논리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세계관을 이해하고 간파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세계관을 확실히 정립하는데 많은 도움을 되었다.
10. 검토된 삶 p.341-353
세계관의 선택 제한된 수의 세계관 중에서 어떻게 선택할 수 있을까요? 초월적이고 인격신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가정하는 세계관과 그렇지 않은 세계관 중에서, 무슨 근거로 선택을 해야 하는가? 적절한 세계관이 되기 위해선 다음의 4가지의 특징을 모두 갖추어야 한다.
(1)내적인 지적 통일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인데 위스콘신 대학의 케이트 얀델 교수 "만일 어떤 개념체계의 본질적 요소가 논리적 일관성이 없는 일련의 명제들로 구성되었으면 그 체계는 틀린 것이다." 라고 말한다. 바로 이러한 근거 위에서 각 세계관이 어떤 점에서 일관성이 없음이 드러났다. 특히 뉴 에이지의 경우에는 많은 점에서 일관성이 없음이 드러났다.
(2) 각자가 일상생활의 의식적 경험에서 수집한 것, 또는 비판적 분석과 과학적 탐구를 통해 얻은 것, 또는 다른 사람의 경험을 통해 들은 것 등 모든 형태의 자료를 포함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죽은 자 중에서 부활했다면 우리의 체계는 그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그런데 그 자료들을 거부하거나 포함할 수 없는 세계관이라면 그것은 거짓 세계관이거나 적어도 부적절한 세계관일 것이다.
(3) 적절한 세계관은 그것이 설명하겠다고 주장한 것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각 세계관에게 던져야 할 심각한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즉 인간은 생각하지만 그것이 불완전하다는 사실, 사랑하지만 또한 증오한다는 사실, 창조적이지만 또한 파괴적이라는 사실, 현명하지만 종종 어리석다는 사실 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진리나 개인적 성취에 대한 인간의 갈망을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쾌락이 완전히 채워질 만큼 충분한 경우는 왜 그리 드물까? 왜 우리들은 항상 더 많은 것을 원할까? 사람들이 비도덕적 행동 양태를 거부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 될 수 있을 것인가? 물론 이것들은 거창한 질문이다. 그러나 세계관이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질문들 때문이다. 즉 이러한 질문들에 답을 하거나 적어도 대답을 제공할 틀을 제시하기 위해 세계관이 있는 것이다.
(4) 적절한 세계관이란 주관적으로 만족스러운 것이어야 한다. "어떻게 한 세계관이 만족을 줄 수 있는가?" 하고 질문했을 때 그 대답은, 세계관은 진실 됨으로써 만족을 준다. 아마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세계관을 검토하게 하는 첫 번째 이유는 만족감의 부재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바, 무엇인가 잘 맞지 않는다는 막연하고 꺼림칙한 감정이 우리로 하여금 만족을 추구하게 한다. 우리의 세계관이 만사형통하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묻어 버리려고 노력하지만 의심은 표면으로 다시 떠오른다. 자신의 불안에 가면을 씌우지만 그 가면은 떨어져 나간다. 사실 우리가 진정한 만족을 누리기 시작하는 때는 바로 의문점을 계속 추구하여 진리를 발견할 때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11. 리뷰
저자는 세계관을 정의할 때 핵심 질문으로 "제1의 실재, 곧 참으로 실재적인 것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제일 먼저 제기하는 것에 대해 이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형이상학(혹은 존재론)을 모든 세계관의 토대로 간주한다. 존재가 인식보다 앞선다. 만일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법이다. 그래서 유신론을 정의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한 것이고,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삼위의 인격이시며, 초월적이고 내재적이며, 전지하시고 주관적이며, 선한 존재로 규정했던 것이다. 유신론의 나머지 내용은 모두 가장 근본적인 존재에 대한 신념에서 나오게 된다. 그러나 기독교 유신론이 포기된 이유는 그것의 내적 비일관성이나 사실 을 설명할 능력이 없다는 점 등에 있지 않고, 그것이 부적절하게 이해되거나 완전히 망각되었거나 혹은 당면한 문제에 적용되지 않은 점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유신론은 의문점들과 거친 부분들을 지니고 있다. 또한 문제점도 있다. 유신론은 “유한한 인간은 어떤 세계관에도 그러한 문제들이 항상 있다는 것”을 설명해 주고 있다. 유신론은 인간이 의미와 중요성을 찾을 수 있는 준거의 틀을 제공한다. 기독교 유신론을 단지 지적 구조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것을 완전히 받아들인 것이 아니다. 이 세계관을 이해하고 이 세계관 안에서 사는 것과 관련된 심오한 인격적 차원이 있다. 왜냐하면 이 세계관은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그 분께 인격적으로 의지하고 있다는 것,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인격적 반역, 그 분과의 교제를 회복하기 위해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등을 인식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제임스 사이어의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은 개인의 세계관을 체계적으로 궁극적인 실재, 인간관, 사망관, 윤리관, 역사관 등에 대한 질문을 중심으로 유신론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신론, 자연주의, 허무주의, 실존주의, 동양 범신론적 일신론, 새로운 의식에 이르기까지 다소 논리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세계관을 이해하고 간파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세계관을 확실히 정립하는데 많은 도움을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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