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지역사의 전개와 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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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역사적 배경 - 동아시아 지역사의 변동과 연속성

2. 개항장 네트워크

3. 동남아시아를 둘러싼 유럽과 중국

본문내용

중계지가 되어있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서양제국은 먼저 개항장을 설정하고 거기에 있어서 교역활동을 확보하는 방법을 택했다. 싱가포르와 홍콩이 개입한 동남아시아의 해역교역 외에는 동남아시아 각지로부터 중국의 개항장과 교역을 의도한 개항장 간 네트워크의 형성이 계획되었다. 베트남북부와 윈난성의 교역, 미얀마와 윈난성의 교역사례 등이 있다. 또한 1886년의 미얀마·티베트에 관한 영국과 청조의 조약 제14조에서는 랭군의 외국상인에게 중국의 개항장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다.
또한 항구법률의 소유권을 둘러싼 조약의 예로써 1787년에 코치시나와 프랑스 사이에서 결성된 공수동맹조약이 있다. 여기에서는 쯔런항을 형성하는 도서의 소유권 및 통치권을 프랑스 국왕에게 일시 양여하는 것이 규정되었다. 또한 이곳을 거점으로 상업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시험을 하였다.
항률(港律)통치는 해역통치와 관련이 있었다. 1874년 프랑스와 안남 사이에 결성된 강화 및 동맹에 관한 조약의 제5조에는 안남국왕이 프랑스에 대해 이하의 범위에 걸친 완전한 주권을 승인하고 있다. 즉 동은 남중국해 및 안남왕국 빈·튜안지방, 서는 샴만, 남은 남중국해, 북은 캄보디아 및 안남왕국 빈·튜안 지방까지의 범위이다. 여기에는 해역통치의 사고방식이 도입되어 항만통치가 해역통치를 지탱시켜 준 것으로 볼 수 있다.
유럽과 조공관계
중국과 대항하기 위해 위의 동남아시아측이 서구열강을 이용하려고 한 점도 인정된다. 즉 19세기에 아시아의 근대화 움직임은 모두 이른바 ‘서양화’로 파악되어 왔지만 이 서양화는 그 자체가 목적이었다고 하기보다는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중국으로부터의 영향을 어떻게 단절시킬 것인가 하는데 목적을 둔 수단으로서 동남아시아의 각지에서 채용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베트남·타이·미얀마 등에서 중국과의 관계를 중시하고 그것을 유지하려고 하는 ‘중국파’와 중국의 영향으로부터 이탈하려고 하는 ‘독립파’가 항쟁하여 후자가 유럽 열강을 이용하려고 하는 예가 많았다고 할 수 있다.
조공관계에 대해서는 조공의 이념을 부정하고 조공을 단지 무역활동으로 보아 조공무역의 형식을 유지시키는 예가 보인다. 1886년(광제 12년)에 영국과 청조 사이에서 체결 된 미얀마 및 티베트에 관한 조약 (전5조)에 다음의 규정이 있다.
제1조 십년마다 사절을 청국에 파견하여 지방의 물산을 증정하는 것이 미얀마의 관례였던 점을 고려하여, 영국은 미얀마의 최고관이 상례에 따라 십년에 한번 사절을 파견하는 것에 동의한다. 다만 사절의 일행은 미얀마인 일 것.
제2조 청조는 영국이 현재 미얀마에서 행하고 있는 권력 및 지배에 관계된 사항에 대해 영국이 적절하고, 정당하다고 인정되는 모든 조치를 자유롭게 얻는 것에 동의한다.
여기에서 가리키고 있는 문제는 제1조에서 청조의 용인과 제2조에서 그 부정에 있다. 양자는 언뜻 모순된 것 같지만 조공관계는 역사적으로 볼 때 청조 측이 규정한 수순에 따라 사절이 파견된다면 조공국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이러한 이념에서 생각해 본다면 즉 상대방의 주권 인지와 관계가 없다는 것에 비추어 본다면, 양자는 병존한다. 달리 말하자면 유럽은 한편으로 중국의 일반적 영향력을 인정하고 그것을 이용함으로써 중국 채널을 확보하였고, 동시에 자신들의 세력지역에 관한 통치권을 인정시키려고 했다. 따라서 양자는 대립관계라고 하기보다도 서로 다른 통치이념이 병존한 상황이었다고 볼 수 있다.
먼저 미얀마인을 통한 조공이라는 규정은 종래 화교상인이 요청하여 맞은 조공무역이었던 것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또한 유럽은 이하와 같이 주권의 상호 확인과 호혜라고 하는 관념에 근거하여 실질적으로 조공원리와 충돌을 회피했던 것이다. 1886년, 청프전쟁 후 천진에서 맺은 프랑스와의 통상조약 제4조에는
청국 국민은 안남국의 전 지역에서 토지를 소유하고 가옥을 건설하며 상관을 개설하고 점포를 경영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청국 국민 또는 그 가족 및 재산은 유럽의 최혜국 국민과 동등한 보호와 보장을 누린다.…… 프랑스국민은 청국으로부터 이와 동등한 특전에 따라 대우받는다.
여기에서는 중국인을 외국인으로 파악하고 그에 대해 프랑스가 보호와 특전을 주는 것으로 되어 있다. 조공관계에서 쌍방의 교류는 서로 인지해야 할 권리가 없고, 조공무역의 틀 내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다. 여기에서 화교는 외국인으로서 취급받고 있으며 이민에 있어서 법적지위가 명문화 되어있다.
덧붙여서 유럽제국은 ‘관세’ ‘영사’ ‘외교권’ 등을 사용하여 조공관계와 대응하고 있으며,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조공체제에 대해 19세기 중엽 이후의 청조중앙의 약체화와 주변의 활성화라고 하는 상황에도 대응하여 중국에 대한 자기주장이 강화되었다. 이것은 베트남의 국호문제(1800년대 초, 제2장 52쪽 참조), 샴의 조공정지(1852년) 등을 포함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움직임이 동아시아에서도 보여지며 일본에 의한 조선 자주론이나 류큐의 조공정지(1872년) 등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주변 내셔널리즘이라고 말할 수 있는 움직임 안에서 구미제국의 아시아 진출은 조공국에 의한 대청 관계의 변화를 강화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형식으로 채용되어 그것이 주변지역의 청조 대응력을 강화시키게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다만 중국으로부터 보면 이것을 당사자로서 받아들이기 보다는 오히려 “엇갈림”의 인식으로서 양자를 병존시키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동남아시아의 근대는 대서구관계와 동시에 대중국관계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라고 하는 이중 과제를 짊어지고 있었다.(2008.4.28)
<참고서적>
伊藤博文, 필서류찬 조선교섭자료 전3권, 원서방, 1974.
伊藤博文, 필서류찬 대만교섭자료 원서방, 1970.
神用彦松修, 일한교섭사자료 4-6권 (일한합병편 상·중·하), 엄남당서점, 1964-1965.
<주>
1) 川勝平太 編, 바다로부터의 세계사(미스즈서방, 1996년). 購口雄三他 編 아시아로부터 생각(2) 지역시스템 동경대학출판회, 1993.
2) 平野建一郞 編, 강좌 현대아시아 4, 지역시스템과 국제관계 동경대학출판회, 1994.
3) 拙稿, 바다와 국가 헤르메스 제55권, 1995.

키워드

동아시아,   역사,   전개,   근대
  • 가격3,300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12.04.17
  • 저작시기2012.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40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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