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길수를 먼저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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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라면 1945년 2월 15일 이후에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람은 독립유공자에 포함될 자격이 안 되는 것임. 이뿐만이 아님. 독립운동에 지속적으로 자금을 대준 사람 등은 포상심사 기준에 포함도 안 되고 있음. 따라서 현재의 이러한 독립유공자 포상심사 기준은 대폭 완화 및 보완되어야 함.
전병헌 의원은 “역사적 편의에 의해 가려지고 숨겨진 희생과 헌신의 역사를 찾아내어 정당한 평가와 합당한 예우를 해주는 것도 올바른 과거사 정리의 일환으로 꼭 필요하며,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우리의 아이들이 정의와 양심이 살아있는 바른 미래를 만들어 가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시간을 되돌리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함.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은 독립 후 친일파 척결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히려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했다고 봐야 옳다.
사사오입이라는 국제적으로도 망신스러운 방법으로 개헌을 하여 장기집권을 꾀하며. 2차 대전 당시 미국의 한국인 사회에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와 불화·반목·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자기와 적대관계에 있는 한인을 용공분자(容共分者)로 몰아붙이는 사람으로 그때부터 알려져 있었다. 당시 미 국무성의 일부에서 신임을 얻고 있던 한길수와 제휴할 것을 종용받자 이승만은 한길수와 합작하는 것은 공산주의자들을 이롭게 할 뿐이라는 엉뚱한 주장을 하여 중국의 외교부장 송자문(宋子文)으로 하여금 루즈벨트에게 \"한국인은 너무 분열도가 심해 효과적인 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보고를 하게 한 바 있었다. 이러한 사정 때문으로 당시 임시정부가 대일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를 하고 임정을 연합국의 한나라로 인정받도록 이승만으로 하여금 미 국무성에 교섭케 했으나 미 국무성이 이승만을 전혀 상대조차 해주지 않아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조선민족혁명당
朝鮮民族革命黨
⇒ 민족혁명당
민족혁명당
民族革命黨
1935년 7월 중국 난징[南京]에서 민족주의 정당이었던 한국독립당·조선의열단·미주대한독립당·신한독립당·조선혁명당 등 5개 단체가 통합하여 결성된 통일전선적 성격을 지닌 정당.
한국민족혁명당·조선민족혁명당이라고도 한다. 토지와 중요산업의 국유화, 인민무장 등의 강령을 내걸고 당면 과제로서 국내 혁명적 대중을 중심으로 한 전민족적 통일전선의 결성과 중국항일전의 참여를 채택했다. 민족혁명당은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통일전선 결성에 나서 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혁명자연맹과 더불어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고, 1938년 10월 중국군사위원회의 지원 하에 조선의용대 결성을 주도했다. 조선의용대는 1938년 10월부터 2년간 중국 남방의 각 전구(戰區)에 배치되어 활동하다가, 1941년 4월 역량의 80% 정도가 화베이로 이동하여 큰 전과를 올렸으나, 점차 중국 팔로군에 편입되면서 민족혁명당의 영향에서 벗어났다.
조선의용대를 화베이로 북상시킨 민족혁명당은 1941년 5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참여를 선언하고 이듬해인 10월 임시정부 국무 위원회에 2명의 국무위원, 임시의정원에 다수의 민족혁명당 당원을 의원으로 선출시킴으로써 임시정부에 정식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민족혁명당은 임시정부 내에서 임시정부를 개조·확대시켜 전민족의 통일전선기구로 만들고자 했다. 그 결과 1944년 봄에 국무위원회의 주석과 국무위원으로 김원봉(金元鳳)·장건상(張建相)·김상덕(金尙德)·성주식(成周寔)·최석순(崔錫淳)이 대한 외교적 관계 강화를 위해 노력했다. 민족혁명당은 임선출되었고, 이듬해 봄에는 의정원에 독립운동가 대회 안을 제출해 관철시켰다. 민족혁명당은 화베이의 의용대에 대한 영향력 회복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미국에 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를 결성했고, 영국·미국·중국에 시정부에 가담하기 전부터 인도 캘커타에 민족혁명당 대표부를 두었고 임시정부에 가담한 후에는 미얀마 전선에 광복군의 일원으로 민족혁명당원들을 파견했으며
\"한길수(韓吉洙)를 통해 미국 국무부와 교섭했다.\"
해방이 되면서 민족혁명당은 임시정부의 일원으로 귀국했다. 귀국 후 국내 좌우 세력의 통일에 적극 노력했으나 실패하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탈퇴하고 1946년 2월 15일 민주주의민족전선에 가담했다. 8·15해방 직후부터 1946년 3월까지 민족혁명당은 주로 간부들 중심으로 임시정부 또는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일원으로 활동했으나, 중국에서 대부분의 민족혁명당원들이 들어온 4월부터는 당을 점차 복원시켜 나갔다. 1946년 8월 좌익 3당이 통합을 논의하게 되자, 민족혁명당은 여기에 가담하지 않고 독자적인 당 건설을 추진했고, 1947년 여름에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자 보다 적극적인 민주적 임시정부 건설에 노력한다는 취지에서 당명을 인민공화당으로 바꾸었다.
http://www.kbs.co.kr/1tv/sisa/wedplan/vod/1256997_1068.html
(2002년 KBS 한국방송공사에서 방영한 \"수요기획\" 한길수 X-파일 1부)
http://www.kbs.co.kr/1tv/sisa/wedplan/vod/1256998_1068.html
(2002년 KBS 한국방송공사에서 방영한 \"수요기획\" 한길수 X-파일 2부 )
한길수에 대해 조사하기 위해 많은 고생을 했다.
없는 책을 찾아 도서관을 다 뒤져야만 했으며,
각종 비디오 대여점을 방문해서 한길수에 대한 영화를 찾아야만 했고
유면항 영화가 아니다 보니 대여 하거나 구매 할 수가 없어
인터넷 자료실에서 한길수에 대한 영화를 일정 금액을 주고받아야 했고
며칠에 걸쳐서 한길수에 대한 다큐를 검색 겨우겨우 봤으며…….
한길수에 대한 논문을 찾기 위해 해외사이트까지 검색 하여야만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한길수에 대해 자세히 기록된, 누군가에게 권할 수 있을만한 자료는 없었으며 그나마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영화와 위 링크의
지난방송 다시 보기 뿐이었다.
이중첩자라는 명분이 그분의 업적을 가리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저 자료들을 보고 읽고 찾아다니면서 느낀 점은…….
“어쩌다가.....” 라고 평가하기엔 저분의 업적은 애매하다는 것이다.
보이는 면만을 보았을 시 대단한 분이지만 보이지 않는 부분을 놓친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리하여 뭐라 감히 평가 하지 못하고 미봉책성의 글만을 남겨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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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4페이지
  • 등록일2012.10.19
  • 저작시기2009.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49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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