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권으로 본 성동구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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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문화권으로 본 성동구 역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개관
㈀ 성동의 명칭 -page3
㈁ 동명의 유래 및 행정구역 개편 -page4
⑴ 중앙지역
⑵ 동부지역
⑶ 서부지역
㈂ 성동구의 주요 연표 -page 10

2. 성동구의 지리적 조건 및 문화적 성격 -page 11
㈀ 성동구의 지리
㈁ 성동구의 기후
㈂ 성동구의 문화적 성격

3. 성동구의 사회경제적 기반 -page 12

4. 시대별로 나타난 성동구 -page 13
㈀ 역사 이전부터 삶의 터전이 되었던 성동 벌판
㈁ 삼국(三國)의 쟁패(爭覇)와 삼국통일의 기초가 된 성동구
㈂ 조선의 수도가 될 뻔 한 성동구
㈃ 사진 속 근현대의 성동구

5. 느낀점 -page 41

6. 참고자료 -page 42

본문내용

위의 특이한 모습을 보고 설화를 지어내었다고 생각된다. 설화속의 임금님은 우둔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조정을 비꼬기 위해 만들어낸 설화인 듯 하다. 지금도 아기장수바위를 가만히 살펴보면 바위무덤이 열릴 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전설은 전국적으로도 비슷한 유형이 많다. 구세주 영웅을 기다리는 민중들의 소망이 만들어낸 전설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는 영원한 기다림으로 남게 되었지만 오늘날의 서민들에게도 기다림의 희망은 마찬가지가 아닌가한다.
㉹ 쌍호정과 조대비 생가터
서울시 성동구 옥수동 295번지는 조선 익종의 부원군인 풍원부원군 조만영의 집터이다. 당대 세도가인 조만영은 글친구와 사귀기를 좋아해 옥수동 한강변 동호에 쌍호정을 지어 강의 풍취와 문우와의 교류를 즐겼다고 한다. ‘쌍호정’이라는 명칭은 조만영의 따님 신정왕후 조씨가 태어날 때 태몽을 꾸었는데 쌍호랑이 두 마리가 정자 옆에 앉아 있었다고 해서 ‘쌍호정’이라고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쌍호정이 유명한 것은 신정왕후의 탄생과 관련이 있다는 데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신정왕후는 1808년 순조 8년 12월 6일에 태어나 12세인 1819년 10월11일 왕세자빈으로 책봉돼 1827년 헌종을 낳았다. 헌종이 왕통을 이어받자 왕대비에 올랐다. 시어머니 대왕대비 순원왕후가 승하하자 대왕대비가 되어 왕실의 권한을 한 손에 틀어지고 당시 세도가 안동김씨의 세력을 누르고 흥선대원군의 아들을 고종으로 왕통을 잇게 하는 풍운의 여걸이었다. 고종이 즉위하자 내전에 옥좌를 마련하고 수렴청정을 하며 민비가 세력을 잡기까지 흥선대원군과 함께 정국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1960년대까지 신정왕후의 집터는 남아 있었는데 지금은 쌍호정도 그녀가 태어났던 터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고층 아파트 앞에 작은 표지석만 그 곳이 한 때 시대를 주름잡았던 한 여걸의 집터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 사진 속 근현대의 성동구
< 금호동시내버스개통 >
사람들이 버스안에 굉장히 빽빽이 들어서 있다. 왼쪽에 있는 여성의 흰색 저고리와 검은색 치마는 시대를 짐작케 해준다.
<두모포(옥수동) 부근>
한강을 바라보는 옥수동 두모포 앞에는 큰 집들이 보인다.
<외국인주택이 들어선 한강변>
경치가 좋은 이곳은 서구식의 외국인 주택이 많이 들어서 있다.
<한남동 일대 한강변>
현재의 한남동을 떠올릴 수 없을 만큼 한적하다. 한강이 얼어있는 겨울이다.
<금호동 응봉동 일대>
집들이 굉장히 빽빽하다. 현재도 그런 모습이 조금 남아있긴 하다.
<금호동 수해현장>
비가 그쳤는지 사람들이 이동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배수시설이 당시열악했던 모양이다.
<1970년 청구역 사거리와 현재>
금호동과 신당동을 잇는 도로. 좌측에 새롭게 건설되는 '흥인초등학교'모습과 우측에 '문화탕' 간판과 영화 홍보포스터가 상징적으로 보인다.
<1963년 11월 12일 금호동~신당동 대로 개통식 사진>
현재 '대경정보상업고등학교'입구. 멀리 보이는 곳이 문화동이다.
<1976년 4월 12일 금호동 무쇠막 모습>
강변을 달리는 콘보이, 나무심은지 얼마되지 않은 헐벗은 산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우측에 보이는 한옥들이 1990년경 재개발로 인해서 없어진 금호동 마지막 한옥일 것이다.
<1974년 금호동 무쇠막>
우측에 보이는 유수지는 어린이들에게 겨울철 스케이트 장으로 인기였다고 한다. 용비교 진입로에 톨게이트가 있었던 것은 처음 알게 되었다.
<1976년 4월 14일 금호동 무쇠막 삼각지>
강변도로, 옥수동쪽에서 봇짐을 메고 오는 어르시네의 모습. 저멀리 금호동 1가 해병대산 물탱크, 우측하얀색으로 치장된 '현대극장'의 모습이다.
▶ 청계천의 변천사
<1910년 청계천의 모습> <1920년 청계천의 모습>
<1960년 청계천 복개공사>
<1968년 청계천>
< 1960년대 복개공사가 진행중인 모습> <복개공사로 인한 가건물 강제철거>
<1963년 청계천변> <청계천의 목조건물>
청계천의 복개공사가 1960년대부터 이루어진지는 꿈에도 몰랐다. 꽤 빠른 시기에 성동구의 많은 변혁이 있었다. 복개공사로 인하여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시민도 보인다. 지금 현재 모습과 많이 다르지 않은 사실에 안타까운 마음이 먼저 든다. 청계천 복개공사를 시작으로 성동구는 교통의 도시로서 한껏 변모하게 된다. 대신 청계천은 썩어가면서 환경오염의 시작을 알리기도 했다.
5. 느낀점
성동구는 역사상으로 현재 위치로 보아서 서울에서 대단히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백제 왕조 건국의 터전이며 조선 왕조 초기 창업과 그후 수성의 현장이며 군사면이나 산업면에서도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육운과 수운의 요로가 된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같고 앞으로도 같을 것이다. 성동구는 건설 면에서 활기차게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데 앞으로 문화적인 면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길 것이다.
성동구 지역엔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충분히 가질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다만 사람들의 관심이 미치지 않아 그것들이 방치되다시피 있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부군당’을 비롯하여 ‘남이장군사당’같은 것은 정말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있는지 조차도 모르기 십상이다. 한편 최근에 유서 깊은 절 ‘안정사’가 방치되다가 아파트 공사 때문에 결국 다른 지역으로 옮기는 일까지 벌어진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특히나 안정사는 조선 개국 당시 무학대사가 수도를 정하기 위해 기도를 했던 곳으로 그 역사적인 가치를 고려해 볼 때도 우리가 문화재를 얼마나 가볍게 인식하고 있는지 한 번 쯤 반성해봐야 할 것 같다. 문화는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자존감이다. 우리가 우리의 자존감을 지키지 않고 어떻게 문화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지역 문화부터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부터 길러야겠다.
6. 참고자료
성동구의 구비설화 (최래옥, 강현모, 김낙효)
성동구의 지명유래 (최래옥, 강현모, 성동문화원)
성동구의 민간신앙 (최래옥, 강현모, 성동문화원)
성동구 근현대 사진이야기 展 (향토생활문화연구단)
성동구청 홈페이지 (http://www.sd.go.kr/main/)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http://culture.seoul.go.kr/)

키워드

성동구,   역사,   유적,   유물,   문화,   문화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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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5.24
  • 저작시기2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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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749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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