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문] 오아시스-이중환상의 감옥에 유폐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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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문] 오아시스-이중환상의 감옥에 유폐된 사랑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감상문] 오아시스-이중환상의 감옥에 유폐된 사랑

본문내용

그녀의 삶에 자리 잡은 이 사회의 폭력의 상징이다.
공주에 비해 종두는 난해한 캐릭터이다. 슬쩍 발달장애의 경계선을 넘어섰거나 걸쳐 있는 것 같은 알쏭달쏭한 인물이다. 그러나 이따금 주변에서 봄직한 그리 낯설지는 않은 인물이다. 이러한 종두라는 애매한 인물을 설경구는 놀랍게 형상화해 내었다. 뭐라 진단하기도 명명하기도 어려운, 어쨌든 현재 전과 3범의 사회부적응자로 삶이 진행되어온, 설 쇠면 서른이 되는 종두라는 인물을 형상화 해낸 설경구의 연기는 신기마저 느껴진다.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잣대로 가늠하기에 도무지 모호한 경계선에 걸쳐 있는 이 사회의 다양하고 수많은 사회 부적응자들. 종두가 출소해서 집에 돌아오자 형수는 종두에게 직접 대고 이야기 한다.
“미안한 말인데요, 난 정말 삼촌이 싫어요, 정말로 미안한 말인데요, 삼촌이 안 계실 때는 살 것 같았어요”
미안한 줄 알면서도 세상은 왜 사회 부적응자를 싫어할까?
그것은 사회적응자가 가지고 있는 공포의 투사 때문이다. 사회순응자는 그렇지 않은 예외자들에게 무의식적인 공포를 가지고 있다. 동성애 포비아, 장애 포비아 등 일탈과 부적응에 대한 공포와 그로 인해 따라오는 안전의 결핍은 혐오로 나타난다. 사회부적응자들의 예측하기 어려운 마음과 비일상적인 리액션과 비상식적 행동은 사회순응자들에게 불안을 불러일으키고 그 불안은 폭력을 예상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부적응에 관한 연구들은 부적응과 폭력성은 직접적 상관성이 없다고 보고되고 있다.
서른 안쪽에 이미 이 사회에서 전과라는 딱지를 달았지만 일반인들의 선입견처럼 종두에겐 폭력성향이 거의 없다. 출소 후 피해자의 집에 과일 바구니를 들고 찾아갔고 형을 대신해 전과 2범이던 자신이 자진해서 교도소에 갔다 온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세계는 대다수의 사람들과 자주 어긋난다. 배달간 부동산 중개소에서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도 그런 예이다. 일반적이지 않고 세련되지 않아서 그렇지 종두는 그가 사랑을 느꼈을 때 진정으로 여자를 사랑할 줄 아는 남자이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오인되고 그의 진정은 유린된다. 그러한 최악의 폭력적 상황에서 그는 경찰서를 탈출해 그의 연인이 무서워하는 나무그림자를 자르기 위해 나무에 올라간다. 경찰들이 뒤쫓아 오고 동네 사람들은 구경나오고 공주는 라디오의 볼륨을 최대치로 올린다. 한밤중 온 동네가 어수선하고 난리다. 그가 높은 나무 위에 올라가서 나무를 쳐내는 것, 이것은 이 사회에서 언어와 몸짓을 결박당한 인간의 사자후이며 그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항거인 것이다.
세상은 연인들을 좋아한다. 그나 그녀가 사랑을 하면 세상은 훨씬 부드러워지고 평화로워진다. 상사가 연애를 하면 그 팀은 덜 스트레스적이 되고 좀더 너그러워진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적으로 위협적이지 않을 경우에만 그렇다. 거기에는 우생학적인 요인이나 정책적인 함수가 개입하고 작용하게 된다. 특별한 위기의 시대가 아닌 한 사회는 연인들의 사랑을 부추기고 사랑의 환상으로 유도한다.
우리는 너나없이 사랑을 좋아한다. 때문에 현실에서 불가능한 사랑이나 금기적인 사랑의 욕망을 영화의 인물들에게 투영하고 영화 속의 그와 그녀를 지지하게 된다. <오아시스>를 보고 나오면서 우리는 종두와 공주라는 이 사회 극하위주체들의 사랑을 이해한다고 생각하며 대단히 포용적이 된다.
그러나 그건 순진한 착각이며 안일한 기만이다. 과연 종두가 출소한 후 우리들의 바람처럼 그들이 사랑을 실현할 수 있을까? 우리의 낙관적인 기대와는 달리 종두와 공주가 처해있는 이 사회는 그들의 사랑을 말랑말랑하게 지지하지 않는다. 그들 사랑의 실천은 오히려 그들의 처지를 더욱 불리하게 억압하는 기제로 작용할 것이다. 종두는 이 사랑으로 별을 하나 더 달고 가족으로부터 절연당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으며 공주는 장애인 임대 아파트를 포기하지 않을 오빠 내외의 강화된 저지하에 놓이게 될 것이다. 우리가 만능키와도 같은 모든 것을 초월하는 “사랑의 승리와 희망”이라는 자기기만적인 허위 이데올로기로 후퇴하는 동안 이 사회 하위주체들의 사랑은 우리 사회의 위선적인 이해심과 전시적인 관용 뒤에서 실재하지 않는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실현 불가능한 꿈으로 묻혀질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이중의식은 이 시대 하위주체 또는 모든 소수자와 이반들의 사랑과 성을 다룬 영화들에서 종종 제 속내를 드러낸다. <죽어도 좋아>에 대해 쏟아진 찬사와 격려는 공론을 장을 벗어난 사적 공간에서 너무도 쉽게 외면과 회피로 전환된다. <죽어도 좋아>는 노인의 성을 그리면서 일체의 환상을 배제시키고 미화나 기교를 쓰지 않았다. 디지털 카메라로 70대 노인의 섹스를 날것 그대로 찍었다. 영화 괜찮았다고 , 노인의 성과 사랑에 대해서 매우 교양 있고 관용적인 태도로 이야기하던 사람도 “그런데 꼭 영화를 그렇게 찍을 필요가 있었을까?”하며 결국 자신의 완고한 의식의 폐쇄성을 드러내기 일쑤다. 우리들 중 대다수는 환상이 아닌 리얼리티를 수용할 진정으로 열린 가슴이 준비되지 않았다. 그들이 어떤 영화언어로 에워가며 이야기를 해도 “스스로 거울에게조차 보이고 싶지 않은 쭈글쭈글한 육체의 처참함”을 보고 싶지 않은 것, 그것에 플래쉬를 갖다 댄 것에 대한 분노와 추함에 대한 공포와 혐오감 때문에 소화가 안 되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가 인정하고 자찬해 마지않던 의식의 유연성과 똘레랑스라는 미덕의 성취는 결국 외적 의식과 내적 의식의 이중성을 확인하는 것으로 그 허위성을 드러낼 뿐이다. 그러한 이중성의 허울들을 걷어내고 증류시켜 버리고 나면 남는 것은 폭력이라는 결정체이다.
이 지구상에 함께 숨쉬며 살아가는 많은 예외자들, 장애우, 노인, 아이, 사회 부적응자, 동성애자, 전과자 등등······ 많은 이탈자와 소수자들이 이러한 폭력의 유탄을 맞지 않는 세상은 언제나 가능한 것일까? 이창동 감독은 스스로가 말했듯이 긍정주의자, 낙관주의자, 이상주의자로서의 모범생적인 희망을 남겨 놓는다. 나도 그렇게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그러나 안일하게 환타지로 현실을 덮고 가혹한 현실에 놓인 그들에게 무책임하고 철딱서니 없이 환타지의 공간으로 밀어 넣으며 자기위안을 삼아선 안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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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4페이지
  • 등록일2012.06.10
  • 저작시기2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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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753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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