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삶에서의 이순의 의미 (耳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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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보는 편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공자가 보기에 안회가 하늘의 이치를 읽는 혜안은 높지만 실생활의 안목에서는 자공보다는 떨어진다고 말이다.
증삼과 유약은 공자의 학문을 계승한 제자들이었다. 둘 다 후대에 증자曾子와 유자有子라는 존칭을 받았다. 특히 증삼은 효에 관한 유교의 경전인 《효경孝經》의 저자로도 알려져 있을 정도로 공자 생존시부터 높은 학식을 인정받았다. 이들 외에도 《사기》의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에 보면 공자에게서 학업을 닦은 자 중에 육예에 통달한 인재가 77명이었다고 한다.
육예는 당시 관리가 되려는 자들에게는 필수학문이었다. 즉 공자의 제자들이 육예에 통달했다함은 그들이 관리가 되고자 하는 취지에서 육예를 배웠을 수도 있음을 시사하는 말이다. 공자부터가 열심히 갈고 닦은 학문을 정치에 반영하고자 했다. 물론 그 이상을 제대로 펼치지는 못했지만 그런 그의 사상이 교육에 반영된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선보單父의 읍재가 된 자천子賤에게 공자가 벼슬을 한 후 얻은 것이 무엇이냐 물으니 그는 배운 것을 실행하게 되어 배운 것이 더욱 분명해졌다고 대답했다. 자기가 가르친 대로 배운 것을 정치에 반영하고 그것을 통해 다시 배움을 얻는 제자가 공자는 몹시 기특했다. 그리하여 공자는 흐믓한 나머지 “군자로다, 자천같은 사람은!〈공야장〉”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제자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낄 수밖에 없는 공자의 마음은 착잡했을 것이다. 자기를 수양하여 백성을 평안케 하는 것이 군자의 길이라 생각한 공자는 정치를 통해 그것을 구현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그는 큰 뜻을 품고 천하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사상을 전파했다. 그러나 패권 다툼에 혈안이 된 열국은 선정과 치세는 안중에도 없었다. 제후들이 당장에 필요로 한 것은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는 군사정책과 통치기술이었다. 당장 나라의 위기가 닥칠지 모르는 판국에 한가롭게 미래를 꿈꾸며 공자의 도덕정치를 실험하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그 결과 천하의 어떤 나라도 선뜻 공자를 기용하려 하지 않았다. 마침내 공자는 지친 노구를 이끌고 다시 노나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결국은 제자리였다. 이때 와서 공자는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는 겉돌기만 하던 자신의 정치 역정에 종지부를 찍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도 다스린 사람은 순임금이시다. 그 분이 어떻게 하셨는가? 몸을 공손히 하고 남쪽을 향해 앉아 있었을 뿐이다.”〈위령공〉

키워드

공자,   이순,   60세,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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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6.14
  • 저작시기2012.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53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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