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로마인이야기를 읽고(율리우스 카이사르/C. IULIUS CAES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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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처음

2. 본 론
 1편 1장. 유년시절(카이사르 탄생~6세)
 1편 2장. 소년시절(카이사르 7세~16세)
 1편 3장. 청년시절(카이사르 17세~30세)
 1편 4장. 장년시절(카이사르 31세 ~ 39세)
 1편 5장. 중년시절(카이사르 40세 ~ 50세)
 2편 6장. 원숙기(카이사르 50세~55세)
 2편 7장. 기원전 44년 ‘3월 15일’
 2편 8장.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대 옥타비아누스

3. 맺으며.

본문내용

면서 쓰러졌고, 잠시 후 숨을 거두었다. 오랜 정적이었던 폼페이우스의 입상 발치였다고 한다. 본문인용, 2편 391p
2편 8장.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대 옥타비아누스
놀라운 것은 카이사르가 그의 후계자로 지목한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가 암살당할 당시 18세였다고 한다.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후계자 지목 이였다. 그 당시 가장 촉망받던 카이사르의 후계자는 그의 부하 ‘안토니우스’였다. 이 안토니우스는 훗날 클레오파트라와 연분이 있었던 그 ‘안토니우스’였다. 하지만 정계에서 듣도 보도 못했던 옥타비아누스라니?.
카이사르 암살이후 옥타비아누스가 다시 권력을 잡아나가는 과정을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는 서술해 나가기 시작한다. 옥타비아누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름을 물려받고 키케로의 도움을 받아 카이사르가 암살되기 직전 조직된 군대를 물려받는다. 이를 바탕으로 입지가 굳건했던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라는 인물과 함께 제 2차 삼두정치를 펼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카이사를 암살했던 일당들을 ‘살생부’를 만들어 숙청하기 시작한다. 카이사르가 생전에 가장 싫어했던 방식으로. 결국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와의 대결에서 패하고 이집트로 도망가나 그곳에서 클레오파트라와 후일을 도모하지만 결국 역부족으로 패하고,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에서 최초로 ‘존엄한자’의 지위인 “아우구스투스”의 지위를 받는다.
카이사르의 후계자의 최후의 승리, 결국 카이사르의 승리인 것이다.
3. 맺으며..
로마의 기존 정치형태는 과두정치였지만 카이사르는 로마의 이 기존 정치형태를 독재정치로 바꾸었으며 그 정치형태의 지속성은 그가 죽은 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때 만약 카이사르가 정치형태를 바꾸지 않았다면, 그리스도교 시대가 시작되기 전에 서양의 그리스 로마 세계는 이민족 침략자들에게 굴복했을지도 모르며 또한 동방의 그리스 로마 세계는 파르티아 제국에 파괴되었을지도 모른다. 흔히 ‘로마황제’의 탄생으로 제국주의의 시작이라고 쉽게 생각 할 수 있으나, 동양에서의 전통적인 ‘황제’의 개념과는 전혀다른 개념이다. 즉 무분별하게 전횡하고 부인을 수백명 거느리며, 하늘의 대리자, ‘천자(天者)의 개념과는 다르다. 1인에 의한 지배가 역사의 흐름에 있어서 그릇되게 평가되는것은 오늘날 민주주의가 정착되었기 때문이지 그것이 ’악‘이라고 판단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리스 로마 문명의 연장은 곧 역사적 결과의 변동을 가져왔다. 다분히 서양식 사고일 수도 있겠지만,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은 600여년 남짓 동안 근동 지방에는 헬레니즘 문명이 깊이 스며들었는데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그리스도교나 이슬람교에 고대 그리스의 요소가 결정적 영향의 결과를 안겨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갈리아 지방 역시 카이사르에게 정복당하지 않아 500년이 넘도록 지중해 연안의 문명세계와 접촉하지 않았다면, 프랑크족의 침략을 받았을 때 미개 상태로 더 깊이 빠져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율리우스 카이사르, 그의 정치적 업적은 제한되어 있었다. 몽고의 칭기즈칸, 중국의 진시황제, 우리나라의 광개토대왕 등등 세계의 훌륭한 지도자들 역시 정치적 업적이 제한되어 있었으나 그들 모두는 자신의 인간한계에서 최선을 다해 그 빛을 발했다. 카이사르 역시 이들과 견주어 볼 때에도 손색이 없으나 그만이 갖고 있는 특징에서는 다른 이들과 독특한 차이를 가진다고 여겨진다. 이상할 정도로 위기에 강하고 언제나 웃음을 잃지않는. 군사적 재능이 역사상 손꼽힐 정도였으나 정사에도 능한.그야말로 서양역사에서 ‘가장 완벽했던’ 인물일 것이다.
이 책을 통해 그에 대해서 더욱 심취했으며 카이사르의 저서인 ‘갈리아 원정기’도 탐독해 보았는데 개인적으로는 전쟁이야기만 해서 다소 지루하였는데 역사가들은 세계의 필작이라고 일컫는다고 한다. 그의 문체가 너무나 간결하고 이를통해 그의 성격을 알수 있기 때문이라고한다.
세계 위인들의 인물전을 읽어보면 새삼스레 공명심과 영웅심 그리고 존경심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영웅에 대한 동경뿐 아니라 그 영웅의 무대였던 그 시대의 생활상과 더불어 역사의식에 대한 통찰력 생긴다.
법학도로서 가장 많이 듣던 제일 유명한 명제인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르라.\" 라는 글귀를 귀 기울여볼 때 역시 로마의 위대함과 그 정신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로마인 이야기 4 5권에서는 대개 힘으로 해결한 자는 오래가지 못함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예외들도 몇몇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자신의 권력과 권위를 누릴 때는, 법이라는 슬로건 하에서 자신들의 권력을 향유했는데 법이 수단화되어 오히려 영웅들의 권력향유에 날개를 붙여준 셈이 된 것과 같다. 그것의 선 악 판단여부는 사회의 도덕적 관념에서 평가되어질 것이긴 하나,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시대에서 그의 업적과 행동들은 천재적이었으며 독창이고 독재적인 성격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그의 언행에 있어서 훌륭한 점은 바로 정치적인 면인데 그것은 어떤 행동을 함에 있어서 안전의 확실 불확실 여부를 떠나서 오로지 자신의 신념에 따라서 과감하게 나아가는 그의 태도이다. 오늘날의 세계 지도자를 보면 자신의 신념고수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권력과 부와의 타협에서 벗어난 신념의 외길 걷기는 분명 성인다운 면모이며 인간 승리의 표본적 단면임을 두말 할 나위 없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시대와 동 시대를 비교해 볼 때 그는 위대한 인물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정치적인 면에서의 지도자 역량에 천재적인 것이지 다른 모든 면에서 월등히 뛰어난 인물임을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지도자의 핵심은 바로 존경심이다.
그 존경심이야 말로 권력을 오랜 시간토록 보존케 하며 영구성을 갖게 하는 핵심이 되는 것이다. 카이사르는 동시대의 남들이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이였다. 그래서 그것을 십분 활용했다. 그러함에 그의 능력은 배가 되었으며, 그의 이름은 후대를 잇게 된 것이다. 그가 남겼던 말을 남기며 글을 맺고자 한다.
“사람은 누구나 모든 현실을 볼 수 있는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현실밖에 보지 않는다.” - 율리우스 카이사르-
-교수님 한 학기동안 수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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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9.25
  • 저작시기2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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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756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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