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초기 김포지역 전투에 대한 연구 (1950. 6. 25 ∼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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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6.25전쟁 초기 김포지역 전투에 대한 연구 (1950. 6. 25 ∼ 28)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 론
Ⅱ. 전쟁초기 피아 작전계획 및 배치
Ⅲ. 김포지구전투 경과
Ⅳ. 김포사령부의 지연작전 분석
Ⅴ. 결 론

본문내용

즉, 국가의 패망과 직결된 1분 1초였던 것이다. 김포사령부의 북한군 진출 지연은 최초에는 ‘한국군 주력이 한수이북에서 포위섬멸되느냐 아니면 철수하느냐?’, 28일부터는 시흥사령부의 편성 및 배치의 여건조성, 또한 북한군의 한강 도하 저지, 그리고 UN군의 증원 시간획득, 와해된 한국군의 수습 등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즉, 김포사령부의 지연작전은 초기작전간 피·아 작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전투로서 북한군 제1군단의 포위섬멸 기도를 좌절시키고, 한강 방어선을 형성하고 유지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렇듯 수도권 서측방어를 위한 김포반도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였다. 비록 6.25전쟁 초기에는 육군이 전투를 수행하였지만, 이후 해병대가 담당하면서 오늘날까지도 그 중요성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해병대가 김포지역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6.25전쟁 중인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여 작전을 성공리에 마치고 서울탈환을 위해 김포지역을 경유하여 서울로 진격하게 되면서 부터였다. 해병대는 6.25전쟁 개전당시 창설된 지 1년 밖에 되지 않은 2개 대대 규모의 병력과 60밀리 박격포 4문, 81밀리 박격포 2문, LMG 경기관총 6정 등의 장비로 전쟁에 임하게 되었으나, 전쟁기간 중에 급진적으로 성장하여 휴전 당시에는 사단규모의 병력으로 성장하였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 요약』(서울 :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86), 82쪽.
김포지역에 대한 작전을 수행하면서 9월 20일 새벽 행주 대안에 도착한 해병대 제2대대는 미 해병대 제5연대와 함께 한강을 도하하여 교두보를 확보하였으며, 이어서 제1대대도 행주나루에서 한강을 도하하여 서울로 진격하였다. 제3대대는 김포지역에서 철수하지 못한 북한군에 대한 소탕전을 전개하면서 김포, 부평지역을 담당하였다. 제3대대는 9월 30일 북한강 지역으로 이동할 때까지 김포지역의 잔적 소탕작전을 전개하였다.
그 후 중국군의 개입으로 서울이 다시 적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고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고 있을 때, 해병대 독립 제5대대가 1951년 2월 16일 인천으로 상륙하여, 인천과 김포지역의 잔적을 소탕하고 서울 재탈환전에 참가하기 위해 김포지역에 주둔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해병대 독립 제5대대는 인천을 방어하는 한편, 유엔군이 2월 하순에 반격을 개시하여 3월 4일 서울을 재수복할 때 김포지역으로부터 적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정찰대를 영등포 일대까지 파견하는 등 서울 공략전에 참가하였다.
당시 북한군은 이미 임진강 북방으로 후퇴하여 개성으로 집결하고 있었으나, 소수의 북한군이 아직 김포지역 일대에 잔류하고 있었다.
아군측에서는 육군 제1사단 제12연대가 소사에 주둔하여 이 지역 일대를 경비하고 있었고 해병대 독립 제5대대는 본부를 부평에, 제21중대는 양곡리에 두었으며, 제22중대는 김포에 위치하여 북한군의 김포지역 진출에 대비하고 있었으며, 1951년 4월 초부터 7월 21일까지 3개월간 약 50여 회의 정찰을 통해 김포지역 너머 한강 이북지역의 개풍군 일대와 개성 부근까지 정찰을 실시하였다.
그 후 해병대 독립 제5대대가 서측방 방어임무를 수행하여 오다가 1959년 2월 해병대 제1임시여단이 창설되어 수도관문인 서부전선 방어임무를 수행하다가, 1966년 11월 제1임시여단을 근간으로 해병대 제5여단이 창설되었다. 1979년 12월에 청룡부대가 베트남에서 개선하여 귀국하자, 해병대 제6여단과 부대교대하여 해병대 제2여단(청룡부대)의 위용을 과시하게 되었다. 1979년 12월부터 해병대 제2여단 예하에 연대규모의 강화부대를 신편하였으며, 1981년 4월 16일 해병사단으로 증편되어 오늘날까지 수도권 방어에 일익을 담당해 오고 있다. 제2해병사단, 『청룡간부의 맥(21세기를 향한 간부의 위상 확립)』(김포 : 해병대 제2사단, 1992), 23-24쪽.
오히려 많은 사람들은 김포반도의 중요성을 다소 낮추어 보기도 한다. 서울이 바로 1시간 거리인데 김포지역이 무슨 전방지역이냐고 하기도 한다. 강원도 북쪽지역이나 경기도의 임진강 지역 등과 같은 지역만 전방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김포반도에서도 우리 해병대는 북한을 마주보면서 근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항상 긴장된 가운데 근무하고 있는 우리 해병대야말로 우리가 근무하고 있는 지역의 전투사를 알고 이에 대한 연구를 통해 유사시를 대비한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북한군이 6.25전쟁의 실패를 거울삼아 전후 분석을 실시하여 전략·전술의 보완하고 당시에 실패하였던 공격축선에 대한 전술적 보완을 실시하였다고 가정할 때, 김포반도에 대한 분석과 조치가 이루어졌음은 분명하다. 6.25전쟁시 도하장비가 미흡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전차를 도하시켰던 전례를 상기하면, 도하장비가 발달된 현재의 한강은 장애물로서 역할이 미흡할 것이고, 김포반도는 한국군의 배후로 기동할 수 있는 양호한 접근로가 될 것이다. 한강도하에 성공하여 교두보를 확보한다면 수도 서울의 측방 및 배후로 기동이 가능하므로 김포반도에 대한 전장정보분석 및 작전준비를 철저히 하여 이에 대비하여야 하겠다.
<참고문헌>
국방군사연구소. 『한국전쟁』(상). 1995.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소련 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의 6.25전쟁 보고서』(제1권).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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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 요약』. 1986.
백선엽. 『길고 긴 여름날 1950년 6월 25일』. 서울 : 도서출판 지구촌. 1999.
예프게니 바자노프나딸리아 바자노바 공저. 『소련의 자료로 본 한국전쟁의 전말』. 서울 : 도서출판 열림. 1998.
육군본부. 『군사용어사전』. 야전교범 3-0-1. 2006.9.30.
제2해병사단. 『청룡간부의 맥(21세기를 향한 간부의 위상 확립)』. 1992.
최용호. “한국전쟁시 북한군 제6사단의 서남부 측방기동 분석”. 『전사』제4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2. 6.
______. “한국전쟁 초기작전 연구”. 육군본부. 『군사연구(제117집)』.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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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7.25
  • 저작시기20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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