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평가 조사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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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 광주항쟁의 인식

2. 5․18 광주항쟁의 배경

3. 5․18 광주민중항쟁의 일지

4. 시민 전쟁으로 본 광주항쟁

5. 민주와 민족통일의 도정에서 본 광주항쟁

6. 결 론

본문내용

어느 한 곳을 겨냥하여 집중적으로 행사되지 못하도록 분산시키는 전술을 펼쳤다. 무엇보다 두드러진 것은 광주 희생의 정신을 이어받아 꺾일 줄 모르는 전투력을 구사한 것이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광주의 유혈 진압이 야기한 결과로 인해 통치기간 내내 시달린 탓에 또다시 같은 사태를 연출한다는 것은 엄청난 부담이었기 때문에 손쉽게 항쟁을 제압하지 못하였다. 전두환 정권의 후견 역할을 해온 미국에서도 군대의 사태개입을 묵과하지 않는다는 높은 강도의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즉 광주 희생의 중압감이 6월항쟁에서 폭력적인 공권력을 무력화시켰다. 광주 희생의 의의를 계승함으로써 새로운 희생 없이 6월 항쟁의 승리를 일궈 낸 것이다.
이는 우리도 바야흐로 투쟁의 업적이 축적되고 항쟁의 정신이 계승되는 역사를 열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과 항쟁의 과정은 한국의 1980년대 민주화운동, 민주변혁운동, 사회운동이 학생, 지식인과 결합하여 사회의 총체적인 변혁을 지향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운동모델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런 전통을 올바르게 계승하고 또 확고하게 정립할 때 비로소 우리는 미래에 닥칠 변혁과 통일의 역사를 최소한의 대가만을 치르는 가운데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의의를 계속 이어가기 위해서 광주시민과 사회단체들은 5월 광주의 역사적 진상규명과 학살만행자들에 대한 재판을 지속적으로 요구해왔다. 이러한 국민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1988년 6얼 27일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11월 18일 청문회를 진행하였지만, 국민적 분노에 아랑곳없이 정부여당은 전두환의 대국민사과성명을 계기로 문제의 종결을 선언하였고 여야는 청문회장이 아니라 밀실에서 협상과 타협을 통해 이를 정치적으로 해결해버렸다. 청문회를 통해 비록 진상을 제대로 규명하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불과 8년 전 광주에서 살기 등등한 모습으로 민중 앞에 군림하던 자들이 8년 후에 초라한 행색으로 국민 앞에 불려와 비굴한 변명을 늘어놓는 것을 보면서 역사의 위력을 실갈할 수 있었다.
전두환노태우 등을 1993년과 1994년 고소 고발한 것으로 시작한 518학살자들에 대한 사법심판운동은 우여곡적을 겪으면서 1997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검찰은 ‘내란에 의해 만약 국가의 기본 통치 조직이 변경되고 지배 권력이 교체되는 등 그 변혁에 성공하였을 경우에 행위시의 법질서는 구질서에 지나지 않게 되는데 그 구질서를 가지고는 새로운 체제의 주체를 처벌할 수 없다’는 형식논리를 세워 공소권 없을 처분을 하엿다. 이는 안보와 국가이익을 빙자한 지난 독재정권하의 몰역사적인 통치논리를 그대로 재현해 놓은 것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518의 항쟁정신은 우선 여론에 떠밀린 국회의 ‘518민주화운동등에 관한 특별법’ 제정을 통해 일부 구현되었다.
이렇게 1979년 10월 26일 이후 전두환과 노태우로 대표되는 신군부가 폭력으로 우리 헌정 질서를 짓밟고 학살만행을 저지른 행위애 대해 뒤늦게 사법 판결의 형식을 빌어 심판하였다. 또 이러한 폭압과 인권유린의 범죄행위에 대한 민중항쟁의 정당성을 실정법적으로도 인정하게된 성과를 이룩한 것이다. 물론 이후 이들 역사적 범죄자들에 대한 사면과 복권은 재판의 의미에 대해 혼란스러움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비록 명목뿐이었더라고 이 재판 과정은 지난 역사의 시비를 분명하게 가린 것이었고 쓰라린 역사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중요한 계기였다. 이는 광주시민들이 비록 1980년에는 최정예의 특수부대를 앞세워 자행된 학살만행에 한때 패배하였지만 역사 속에서 마침애 그 반역의 현실을 뒤엎고 승리를 기록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재판의 전 과정은 헌정질서 파괴 범죄에 대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억지 논리와 궤변을 물리치고 그것이 사법적 판단의 대상이 됨을 분명하게 확인했다는 데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재판을 통해 오욕의 과거를 청산하려는 것은 혁명과정에서 수행할 과업을 대신하는 것으로 우리는 20세기 한 때 많은 지역에서 만연했던 군사독재를 사법적 단죄를 통해 역사적으로 심판하는 것인데 이는 인류 역사의 진보에 있어서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현대사가 파행으로 이어지는 이유로 과거 청산이 제대로 이루이지지 못한 점을 들고 있다. 독재권력의 그늘에서 배양된 잔재들이 청산되지 않고 살아남아 우리 역사에 계속 존재한다면 슬픈 비극의 악순환이 계속 될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다가올 통일과 변혁의 과정에서도 또 다른 희생이 없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과거의 청산되지 않은 자재들이 발목을 잡지 못하도록 광주항쟁의 교훈을 현명하게 계승하여 새로운 민주적 도약의 계기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6. 결 론
20세기의 세계사에서 우리 사회처럼 인류역사의 진보와 발전을 위해 온갖 희생을 무릅쓰면서 투쟁하는 경우도 흔치 않을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우뚝 솟아있는 518 광주민중항쟁은 은폐와 침묵에 맞서 광주의 진실을 전하고 그 의미를 역사 속에서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 하였다. 그 결과 이제는 그 정당한 의미와 계승의 방향을 모색할 수 있게 되었다.
아름다운 역사가 아닌 고통스러운 역사를 들추어내서 분석하고 논쟁하는 것은, 현재라는 것이 단절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연장선상에서 오늘의 삶을 규정하고자 하는 까닭도 있겠지만,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운 역사라면 다시는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일 것이다. 한국현대사의 최대 비극인 518을 창출한 군부세력의 폭력성과 만행에 대해 분개할 수 있지만 그전에 어째서 그런 상황이 벌어졌는지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는지 이성적인 눈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할 때만이 과거의 암울한 비극이 오늘이라는 자리에서 힘을 발하는 빛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518은 이미 20여년이 지난 과거의 일이고 현실적으로도 더 이상 우리 사회의 진보를 만들어가는 데서 핵심적인 쟁점일 수는 없다. 그렇지만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점을 감안해본다면, 새로운 현재적 관점에서 끊임없이 재해석하고 또 그것을 통해서 현재를 바라보는 눈을 더욱 풍부화시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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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12.01
  • 저작시기2009.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62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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