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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상문 -
- 요약정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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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는 없다. 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발견했을 때, 사는 게 지루하고 하는 일에서 더 이상 재미를 못 느낄 때가 바로 변화를 시도할 때다. 그것이 지금일 수도 있다.
유서 쓰기
살다보면 무수히 많은 상처를 받게 된다. 그런데 이 마음의 상처라는 것은 오히려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받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 그 중 가장 큰 상처는 아마 배우자로부터 받는 상처일 것이다, 다음으로는 부모나 자식으로부터 받는 상처다. 사랑이 큰 만큼 배반에 따른 아픔이 큰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존경하는 상사, 믿고 의지했던 부하직원, 평소 가까웠던 동료가 무심코 던지는 말 한 마디가 어떨 때는 큰 상처가 된다. 결국 모두 내 마음 같지 않은 것이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머릿속의 생각은 누구나 다르게 마련이다. 모두 남이고 세상에 나만 혼자라는 생각이 든다.
기분이 가라앉아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큰 상처를 받아 마음이 뻥 뚫렸을 때, 도저히 치유되지 않을 것 같을 때 한 마디로 세상 살 맛이 안 날 때 ‘유서 쓰기’를 권하고 싶다. 유서를 쓰다 보면 평소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일들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나 죽자 사자 매달렸던 일들도 별 것 아닌 걸로 여겨진다. 내가 왜 그렇게 사소한 문제에 집착했는지 웃음이 나올 정도이다. 돈 문제, 집 문제, 애들 교육 문제, 직장 문제 등 평소에 중요하다고 생각됐던 것은 별로 떠오르질 않는다. 오히려 예전에 좋았던 일, 섭섭했던 일, 남을 섭섭하게 했던 일, 친했던 친구인데 연락이 끊긴 친구, 용서하지 못하고 있던 사람 등이 떠올랐다. 또한 “집사람과 애들이 나를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을까? 주변의 이웃과 친구들이 나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내 묘비명에는 어떤 말이 쓰여질까?” 등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더 궁금해진다.
비록 가상이라 하더라도 죽음을 생각한다면 세상에 두려울 것도 없어지고, 미운 것도 없어진다. 바로 달려들어 한 대 치고 싶을 만큼 미운 상대도 갑자기 측은하게 생각된다. 너무나 큰 걱정거리로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던 자식도 그저 사랑스럽게만 보인다. 또한 멋진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멋지게 살아야 한다는 깨달음이 온다. 세상이 나를 힘들게 하고, 단 하루라도 더 이상 살맛이 나지 않는다면 내일 모레로 닥친 가상의 죽음을 생각해 보라.
당장 죽음을 앞에 두고도 이 일에 그토록 매달릴 것인가?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혹시 아직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한 사람이 있던가? 아니면 아직 노여움을 풀지 않은 상대가 있던가?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하는데 도움을 주지 않은 사람이 있던가? 이런 질문들을 하다 보면 아직도 많은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직 많은 용서가 남아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런 사랑과 용서를 베풀 수 있는 날이 실제로 단 이틀이 아니라 앞으로 무수히 많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된다.
은퇴란 없다
지식의 반감기가 줄어든 것은 지금 시대의 가장 확실한 변화이다. 예전에 비해 지식의 효용 기간이 대폭 줄어든 것이다. 나이든 사람이 젊은 사람으로부터 배우는 최초의 세대가 지금의 세대이다. 예전에는 일류 학교를 나왔다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의 능력을 검증했다. 고교 시절, 대학 시절에 공부를 잘했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평생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세상이 급변하고, 기술의 발전 속도가 빨라지면서 그런 형태의 패러다임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좋은 학벌을 가지고 기업체에 근무하고 있는 중년 남성들 가운데 상당수는 잠재적 실업자들이다. 아직은 자리를 유지하고 있지만 얼마 후에는 이 자리를 나와 무언가 새로운 일을 시작해야만 하는 처지이다. 지금까지는 예전의 학력과 자격증을 지니고 그럭저럭 현재의 위치까지는 왔지만 더 이상 개인적인 비전도 없고, 발전도 더디다. 회사는 변화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있으나 거기에 자신이 설 자리는 없고, 그런 만큼 회사에서도 눈치를 보게 된다.
회사 안에서야 그럭저럭 존재의 이유가 있었고, 그나마 가치가 있었지만 밖으로 나오는 순간 자신의 역량은 별다른 효용성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들 대부분은 별다른 노력 없이 편안함에 안주해 온 자신의 삶을 뒤늦게 후회하고 있다. 반면 사회적으로는 별 볼일 없는 학력을 가진 사람들 중에 의외로 성공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학력이 나쁘고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더 투쟁하고, 더 열심히 경력을 관리한다. 일종의 두려움이 이들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대학원도 다니고, 최고 경영자 과정에 자신의 돈으로 입학을 하고, 각종 세미나를 다니면서 신기술 동향도 익히고, 좋은 매니저가 되기 위해 책도 많이 읽고. 일류 학교를 나와 별다른 노력을 안 한 사람과 학벌은 떨어지지만 열심히 노력하면서 살아온 사람과는 게임이 안 된다.
21세기가 어떤 시대라는 것은 이미 명쾌하게 정의되었다. 지식의 시대, 계속해서 자신의 가치를 올리기 위해 노력해야만 하는 시대, 지식을 가진 사람은 상류 사회로 올라가고, 지식을 못 가진 사람은 하류 사회로 전락하는 시대, 재산과는 달리 지식은 세습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자신의 성공에 대해서는 자신이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 시대, 수명이 연장되기 때문에 늙어서도 일을 놓아서는 안 되는 시대, 그러기 위해서는 평생 공부를 해야 하는 시대.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이다.
많은 사람이 은퇴를 두려워한다. 하지만 은퇴란 죽음과 마찬가지로 피해갈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다. 피할 수 없다면 거기에 직면하여 준비를 잘 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은퇴는 영어로 리타이어(retire)다. 이를 뜯어서 보면 타이어를 다시 갈아 끼운다는 의미이다. 은퇴를 그저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타이어를 다시 갈아 끼우고 다시 달리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 동안 열심히 사느라고 닳아빠진 타이어를 어떻게 갈아 끼울 것이냐, 타이어를 교체한 후 어느 방향으로 달릴 것이냐를 생각하는 것이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숙고해야 할 주제이다. 은퇴란 없다
유서 쓰기
살다보면 무수히 많은 상처를 받게 된다. 그런데 이 마음의 상처라는 것은 오히려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받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 그 중 가장 큰 상처는 아마 배우자로부터 받는 상처일 것이다, 다음으로는 부모나 자식으로부터 받는 상처다. 사랑이 큰 만큼 배반에 따른 아픔이 큰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존경하는 상사, 믿고 의지했던 부하직원, 평소 가까웠던 동료가 무심코 던지는 말 한 마디가 어떨 때는 큰 상처가 된다. 결국 모두 내 마음 같지 않은 것이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머릿속의 생각은 누구나 다르게 마련이다. 모두 남이고 세상에 나만 혼자라는 생각이 든다.
기분이 가라앉아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큰 상처를 받아 마음이 뻥 뚫렸을 때, 도저히 치유되지 않을 것 같을 때 한 마디로 세상 살 맛이 안 날 때 ‘유서 쓰기’를 권하고 싶다. 유서를 쓰다 보면 평소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일들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나 죽자 사자 매달렸던 일들도 별 것 아닌 걸로 여겨진다. 내가 왜 그렇게 사소한 문제에 집착했는지 웃음이 나올 정도이다. 돈 문제, 집 문제, 애들 교육 문제, 직장 문제 등 평소에 중요하다고 생각됐던 것은 별로 떠오르질 않는다. 오히려 예전에 좋았던 일, 섭섭했던 일, 남을 섭섭하게 했던 일, 친했던 친구인데 연락이 끊긴 친구, 용서하지 못하고 있던 사람 등이 떠올랐다. 또한 “집사람과 애들이 나를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을까? 주변의 이웃과 친구들이 나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내 묘비명에는 어떤 말이 쓰여질까?” 등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더 궁금해진다.
비록 가상이라 하더라도 죽음을 생각한다면 세상에 두려울 것도 없어지고, 미운 것도 없어진다. 바로 달려들어 한 대 치고 싶을 만큼 미운 상대도 갑자기 측은하게 생각된다. 너무나 큰 걱정거리로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던 자식도 그저 사랑스럽게만 보인다. 또한 멋진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멋지게 살아야 한다는 깨달음이 온다. 세상이 나를 힘들게 하고, 단 하루라도 더 이상 살맛이 나지 않는다면 내일 모레로 닥친 가상의 죽음을 생각해 보라.
당장 죽음을 앞에 두고도 이 일에 그토록 매달릴 것인가?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혹시 아직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한 사람이 있던가? 아니면 아직 노여움을 풀지 않은 상대가 있던가?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하는데 도움을 주지 않은 사람이 있던가? 이런 질문들을 하다 보면 아직도 많은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직 많은 용서가 남아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런 사랑과 용서를 베풀 수 있는 날이 실제로 단 이틀이 아니라 앞으로 무수히 많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된다.
은퇴란 없다
지식의 반감기가 줄어든 것은 지금 시대의 가장 확실한 변화이다. 예전에 비해 지식의 효용 기간이 대폭 줄어든 것이다. 나이든 사람이 젊은 사람으로부터 배우는 최초의 세대가 지금의 세대이다. 예전에는 일류 학교를 나왔다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의 능력을 검증했다. 고교 시절, 대학 시절에 공부를 잘했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평생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세상이 급변하고, 기술의 발전 속도가 빨라지면서 그런 형태의 패러다임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좋은 학벌을 가지고 기업체에 근무하고 있는 중년 남성들 가운데 상당수는 잠재적 실업자들이다. 아직은 자리를 유지하고 있지만 얼마 후에는 이 자리를 나와 무언가 새로운 일을 시작해야만 하는 처지이다. 지금까지는 예전의 학력과 자격증을 지니고 그럭저럭 현재의 위치까지는 왔지만 더 이상 개인적인 비전도 없고, 발전도 더디다. 회사는 변화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있으나 거기에 자신이 설 자리는 없고, 그런 만큼 회사에서도 눈치를 보게 된다.
회사 안에서야 그럭저럭 존재의 이유가 있었고, 그나마 가치가 있었지만 밖으로 나오는 순간 자신의 역량은 별다른 효용성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들 대부분은 별다른 노력 없이 편안함에 안주해 온 자신의 삶을 뒤늦게 후회하고 있다. 반면 사회적으로는 별 볼일 없는 학력을 가진 사람들 중에 의외로 성공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학력이 나쁘고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더 투쟁하고, 더 열심히 경력을 관리한다. 일종의 두려움이 이들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대학원도 다니고, 최고 경영자 과정에 자신의 돈으로 입학을 하고, 각종 세미나를 다니면서 신기술 동향도 익히고, 좋은 매니저가 되기 위해 책도 많이 읽고. 일류 학교를 나와 별다른 노력을 안 한 사람과 학벌은 떨어지지만 열심히 노력하면서 살아온 사람과는 게임이 안 된다.
21세기가 어떤 시대라는 것은 이미 명쾌하게 정의되었다. 지식의 시대, 계속해서 자신의 가치를 올리기 위해 노력해야만 하는 시대, 지식을 가진 사람은 상류 사회로 올라가고, 지식을 못 가진 사람은 하류 사회로 전락하는 시대, 재산과는 달리 지식은 세습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자신의 성공에 대해서는 자신이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 시대, 수명이 연장되기 때문에 늙어서도 일을 놓아서는 안 되는 시대, 그러기 위해서는 평생 공부를 해야 하는 시대.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이다.
많은 사람이 은퇴를 두려워한다. 하지만 은퇴란 죽음과 마찬가지로 피해갈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다. 피할 수 없다면 거기에 직면하여 준비를 잘 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은퇴는 영어로 리타이어(retire)다. 이를 뜯어서 보면 타이어를 다시 갈아 끼운다는 의미이다. 은퇴를 그저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타이어를 다시 갈아 끼우고 다시 달리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 동안 열심히 사느라고 닳아빠진 타이어를 어떻게 갈아 끼울 것이냐, 타이어를 교체한 후 어느 방향으로 달릴 것이냐를 생각하는 것이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숙고해야 할 주제이다. 은퇴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