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도를 통한 조선중화주의와 서구식 세계지도의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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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들어가며

2.15세기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3.17세기 이후의 천하도

4.조선중화주의와 서구식 세계지도의 반응

5.결론

본문내용

족의 통일과 청의 건국 및 중원의 통일, 두 차례의 호란 등과 그에 수반된 국제정세의 변동이 있었다. 이것을 바탕으로 조선의 세계인식 및 자아타자인식은 변화하였다. 명을 중심으로 하는 중화적 사대교린체제가 붕괴되면서, 조선의 대청대일 외교체제의 변동이 이어졌다. 양란 후 17세기 전반기 조선의 사상계에서는 극단적인 화이준별론이 강조되면서 외래문화와 민족에 대해 배타적인 인식이 심화되었다. 조선전기의 소중화의식이 ‘조선중화주의’로 더욱 강화되어 문화주의적 화이관의 논리에 따라 조선이 중화의 유일한 계승자이자 수호자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하우봉, 「조선전기 대외관계에 나타난 자아의식과 타자인식」,『한국사연구』123, 한국사연구회, 2003, pp266-267.
이렇게 ‘조선중화주의’로 조선이 새로이 자기정체성을 확립해나갈 때, 한 편에서는 서양문물이 조선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1602년에 <곤여만국전도>를 입수한 이래로 여러 경로를 통해 서구식 세계지도를 들여왔다. 혼란의 시기였던 17세기에는 조선왕조의 외래문화 수용이 시간적, 공간적으로 제약될 수밖에 없었다. 사행을 통한 간헐적인 서양문물의 유입은 정보 네트워크나 인맥에 따라 편재, 또는 두절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초기 서학에 대한 이해는 사행을 통해 서학에 접할 수 있었던 일부 인사들에 제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17세기 후반을 지나면서 대청관계가 점점 안정되고 서학에 접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도 좀 더 무르익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서구식 세계지도를 비롯한 서학에 대한 반응은 다양하게 나타났다. 오상학, 같은 책, pp205-206.
이런 환경에서 <천화도>와 같은 직방세계 중심의 지도들이 민간에서 다시 나타났다. 서구식 세계지도는 많은 사람들의 세계관에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조선후기의 우리나라 지식인들은 서구식 세계지도를 세계 혹은 천하를 보여주는 유일한 지도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땅이 평면이 아니라 구체이며 지구 위에 여러 대륙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한 것도 물론 아니었다. 배우성, 「옛지도와 세계관」, 『우리 옛지도와 그 아름다움』, 효형출판, 1999, p159.
그러나 조선에게 있어서 유일한 중화였던 명이 사라지고, 다른 세계는 타자화하고 조선의 세계에서 제외시켜버리는 세계인식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천하고금대총편람도>의 경우 의도적으로 과거 중국인 명 때의 모습을 그리고 있기도 하다. 조선후기 새롭게 나타난 지도를 통해서 당시 사람들이 인식한, 보다 의미 있는 세계의 범위를 알 수 있다.
또 유교적 사회였던 조선에서 이단서로 취급되던 『산해경』을 활용하고, 도교적인 상상적 세계를 지도에 반영하기도 했다. 직방세계를 뛰어넘는 세계를 표현할 때 주로 이런 상상적 세계로부터의 지명을 사용했다. 이것은 서구식 세계지도의 유입에 의해서 세계의 외연이 넓어진 것을 반영하는 조선의 독특한 반응이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사실 서구식 세계지도를 처음 접했을 때 아무리 그것이 표현하고 있는 세계가 넓고 또 객관적으로 나타나 있다고 해도 당시 사람들에게는 관념의 세계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의미 있는 세계만을 중시하던 당시 조선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러하였고 또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넓어진 세계의 외연을 객관적 세계로 인식하려는―는 그다지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중화적 세계관을 나타내는 지도를 그리면서도 이러한 유교적 근본원리를 저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도교적 신선사상 등 상상적 세계를 반영하는 지도를 그렸고, 또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현상은 자연과학적 지식에서도 나타난다. 서구의 자연과학 지식이 들어왔을 때 당시 가지고 있던 인식의 틀을 버리지 않고 그것 속에서 새로운 자연과학적 지식을 도입하여 해석해 내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다. 18세기 조선 지식인들의 우주론 논의를 살펴보면 우주론 내의 상수학적 체계의 심화확대라는 측면과 정밀하고 우수한 서양 과학 지식의 확산이라는 측면이 또 하나의 축을 이루고 있었다. 이 두 가지 측면은 서로 상이한 전통과 내용의 것이었지만 각각 분리되어서 전개되었던 것은 아니었고 하나의 우주론 내에서 양면을 구성해 상호영향을 주면서 풍부한-현대적 의미에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는-우주론을 낳았다. 문중양, 「18세기 조선 실학자의 자연지식의 성격-상수학적우주론을 중심으로-」,『한국과학사학회지』21, 한국과학사학회, 1999, pp27-57.
같은 맥락에서 서구의 지리지식이 들어왔을 때 당시 사람들은 기존에 그들이 가지고 있던 인식의 틀 안에서 그들 나름의 해석을 시도한 결과 탄생한 것이 <천하도>인 것이다.
5. 결론
17세기 이후 조선에서는 <천하도>라는 중국과 일본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특이한 지도가 출현하였다. 겉보기에는 15세기 세계적으로 우수하다고 평가받고 있는 <강리도>에 비해 원초적인 이 지도가 왜 나타났으며, 늦게까지 인기를 끌었을까? 그것은 조선에서 17세기 이후 ‘조선중화주의’의 대두와 서구식 세계지도의 유입이 반응한 결과로 보여진다. 당시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세계였던 중국 중심의 직방세계를 중심에 두면서도 그 밖의 세계에 대해서는 관념의 세계, 상상의 세계로 그리게 된 것이다. 특히 세계지도의 유입으로 세계의 범위가 직방세계 밖으로까지 확대되었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조선만의 방식으로 나타나게 된다. 특히 늦은 시기까지 <천하도>가 민간에서 보급되고 인기를 끈 것은 세계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태도가 조선에서 그만큼 늦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조선 전기의 자존의식을 갖게 했던 소중화의식과 조선후기의 조선중화주의 모두 문화주의적 화이관에 기반하고 있다. 중화주의적 화이관 조선시대를 통틀어 조선의 정체성을 구성했지만 그 결과 새로운 문물, 새로운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능력을 결여하게 한 측면이 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일본 류코쿠대 도서관 소장 오상학, 같은책, 본문시작하기 앞서 3번지도.
<천하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오상학, 같은책, 본문시작하기 앞서 15번지도.
각주 16) 개리 레드야드가 추정한 내대륙 진화과정 그림 오상학, 같은책, p245.
<천하고금대총편람도>-숭실대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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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12.17
  • 저작시기20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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