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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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제2 공화국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들어가며

Ⅱ. 본 마당
(ⅰ) 이론적 접근
O'Donnell 의 ‘Bureaucratic Authoritarianism Model'
리더십 이론
‘설득력(power to persuade)'과 '다중(multitude)'
(ⅱ) 구체적 접근
장면의 경제정책
소결론
장면의 외교정책
소결론

Ⅲ. 마치며

본문내용

성학, 안보외교정책과 리더십
장면 정부에서의 정치외교적 과제는 제약된 상황 속에서도 사회의 민주화와 경제건설을 동시에 추구하면서 실현불가능한 유엔을 통한 평화통일까지 추진한다는 이상주의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이의 이행에 대한 국민들로부터의 기대 가능성, 즉 역할에 대한 기대와 정치현상 자체의 문제파악과의 사이에는 간과할 수 없는 하나의 차이가 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문제해결에 있어서 시간적 차원의 차이이다. 장면 정부는 민주사회의 건설이나 경제건설은 모두 일정한 시간이 필요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는 데 반하여 대중의 기대에는 “지금 당장 그리고 한꺼번에”라는 절박성이 깃들여 있었다는 데서 큰 차이점을 엿볼 수 있다. 한승조(편), 리더십 이론과 한국정치, 민족지성사, 1988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면 정부의 통치양식은 이에 대한 적절한 설득력이 부족했다. 서구식 민주주의에서도 책임과 원칙 그리고 국민의 이에 맞는 체질개선과 노력이 선행되어야 하는 등에 대한 명백한 원리를 인식시키지 못했다. 여기서도 우리는 장면의 통치성격의 모호성을 보게 되는데 이는 그대로 자유방임적 그것이었다.
또한 당시의 국민의 정치의식 속에도 병리현상이 분명히 내재하고 있었다. 즉 독재정권 타도에서 세운 눈앞의 성공에 지나치게 자만한 탓으로 정치투입에의 자제를 몰랐던 것이 사실이다. 더욱이 1956년 대통령선거시의 야당의 슬로건이었던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구호는 대중이 대정부 기대에 있어서 지나치게 성급하고 유토피아적인 시간관을 심어준 것이었다.
419 혁명 후 한국사회가 요구한 것은 전자의 길이었으나, 허정 과도정부가 이를 수행하지 못함으로서 장면 정부는 전후자 모두를 수용해야 하는 난관에 직면하게 되었다. 상황적으로 제약되어 있었던 장면 정부의 국내 정치상황에서 제기된 책임내각제의 신화는 “상징적 국가대표로서의 대통령”, “상징적 국군통수자로서의 대통령”이 “국정에 관하여 초연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제 2 공화국의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국무총리는 이 문제에 대해 갈등하고 있었다. 중앙일보사, 광복 50년, 한국을 바꾼 100인, 월간중앙
외교문제와 국군통수권 문제에서의 최고지도자들 사이의 갈등은 곧 국가안보와 외교정책의 큰 위기요인이 될 수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또 장면 정부가 제시한 사회의 민주화와 경제건설은 729 총선에서 공약했던 419 혁명정신의 구현과 경제건설의 청사진을 마련하는 데 있었지만 혁명입법과정에서 치자나 피치자의 정치의식면에서 한국사회에서 서구민주주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심한 우려를 자아내게 했다. 더욱이 한일회담 재개, 한미 원조기술협정 체결 등은 경제건설을 위해서 필요불가결한 자금원이 될 수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비등하는 여론과 대중의 반대 시위는 곧 대미대일 외교를 저해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됨으로써 안보외교의 딜레마를 연출했으며, 미국 맨스필드 상원의원의 오스트리아식 중립통일안, 국내혁신계의 통일안, 일부 대학생의 통일논의는 정국을 겉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 갔다.
외교적 리더십은 어떤 특정한 독트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시대에 당연히 간주되는 사유적 틀을 극복하고 창의력을 적용시킬 수 있는 지성적 용기에 있다. 즉 안보외교정책상의 리더십이란 선동이나 도덕적 설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 속에서 합리적 정책과 이성적 정책을 선택하는 지혜와 용기에 있는 것인데, 장면 정부는 안보와 외교정책이 국가존망과 관련되는 가장 중대한 과제임을 소홀히 한 것 같다.
Ⅲ. 마치며
제2공화국의 상황적 요인과 관련시켜서 장면의 정치적 리더십을 정리해 본다면 다음의 몇 가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첫째, 장면은 9개월의 집권기간에 3차례의 개각을 단행함으로써 즉흥적 리더십의 측면을 노출하였고, 민주사회 건설과 경제재건에 대한 시민사회의 요구와 관련하여 현실적 여건과의 괴리에 대한 유효적절한 설득작업을 취하지 못함으로써 오히려 시민사회로부터 갈등을 초래하는 수동적 리더십의 형태를 보여주었다. 이를 통하여 볼 때 장면의 리더십유형은 자유방임형이라고 평가 할 수 있다.
둘째, 장면은 혁명과업의 수행을 위한 소급입법의 제정을 통하여 기존의 지지 세력을 강화하거나 새로운 정치적 제휴를 조성하지고 못하고 오히려 여러 정치세력들을 체계적으로 소외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즉 혁명과업의 수행에 대한 소극성은 시민사회로부터의 지지를 철회 당하였고, 정치적 불안정과 급진적 통일정책의 대두는 보수 세력으로부터 반발을 초래하였다. 그 결과 장면은 리더십의 발휘를 통한 상충하는 요구를 해결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바탕도 마련할 수 없었다.
셋째, 비록 리더십을 발휘하였지만 자유와 민주정치에 대한 장면의 정치적 신념을 지적할 수 있다. 이러한 정치적 신념을 통하여 볼 때 장면은 민주적 성향의 리더십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신념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능률성을 상실하는 과정으로 나아감으로써 장면의 민주적 리더십이 혁명과업의 수행을 통한 효율성의 증대에는 도달하지 못하였다.
넷째, 장면의 리더십은 그의 개인적 특성과 당시의 정치 환경과의 부조화를 지적할 수 있다. 이것은 권력의 획득과정에서 항상 수동적이었던 장면이 최고 정치지도자가 된 이후에도 추진력을 발휘하지 못함으로써 과단성 있는 결단력이 요구되었던 당시의 정국을 수습하고 효과성을 제고할 수 있는 정치적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비록 장면이 민주적 가치의 덕목인 청렴, 정직성, 권력의 공공성 중시의 성향을 보여주었으나 그것에 선행하여 정치사회로부터 효율적인 정책적 지원과 시민사회로부터 확고한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는 현실감을 견지한 합리적 리더십이 요구되었다고 할 수 있다. 민주적 리더십과 무능한 리더십은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자유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책임을 망각한 가운데 나타난 일부의 혼란을 전부의 문제로 파악한 보수집단과 군부집단의 안정논리가 민주주의의 싹을 짓밟았다는 점에 대해서는 보다 냉철한 분석이 요구된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절차적 민주주의가 선행되지 않고는 실질적 민주주의의 확립은 난망하며 나아가 바람직한 리더십의 출현도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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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9.16
  • 저작시기2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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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767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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