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과 교수, 학습 지도안(4/8)> 조선 시대 통합 단원 구성 - 사극으로 보는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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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사과 교수, 학습 지도안(4/8)> 조선 시대 통합 단원 구성 - 사극으로 보는 조선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단원 개관
 가. 단원 명 …………………………………… 1
 나. 단원분석 …………………………………… 1
 다. 대단원 선정 이유 ………………………… 2
 라. 단원 학습목표…………………………………… 3
 마. 학습자 분석 및 이해 …………………………… 4

2. 교수학습 계획
 가. 교수학습방법 …………………………………… 7
 나. 단원 교수학습 계획 …………………………… 11
 다. 지도상 유의점…………………………………… 12

3. 본시 교수학습 계획
 가. 제재 선정 이유…………………………………… 13
 나. 본시 지도 방안 및 계획 …………………… 13
 다. 본시학습 지도계획안 ………………………… 14
 라. 학습지 및 활용자료 ………………………… 16

4. 교재 연구 ……………………………………… 26

본문내용

능상으로 분리하고 있는 반면, 이 성곽은 피난처로서의 산성을 설치하지 않고 보통 때 거주하는 읍성의 방어 기능을 향상시키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이처럼 대규모의 축성이 이루어지게 된 것은 이곳이 정조의 생부인 정헌세자의 원이 있는 곳이면서 수원이 전략적, 지리적으로 한성 남쪽의 중요한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정조가 성역을 직접 감독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이 성의 완성과 관련하여 정조의 수원 천도 주장이 여러 차례 논란이 되었다.
6. 명성황후 : 고종 “을미사변-을미의병”
1) 개관
일본의 요동 진출에 위협을 느낀 러시아·독일·프랑스가 이른바 ‘삼국 간섭’으로 일본에 외교적 압력을 가하여 일본을 요동에서 물러나게 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한반도에서 러시아의 위상이 높아졌다. 이에 일본의 침략에 불만을 품고 있던 고종과 명성황후가 러시아 세력을 이용하려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일본은 이러한 반일 친러의 장본인으로 명성황후를 지목하여 궁궐에 침입하여 시해하는 을미사변(1895)을 일으켰으며, 이어서 친일 정부를 구성하여 갑오개혁의 연속인 을미개혁을 실시하였다. 그러자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의 강제 시행에 분노한 국민들이 유생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이 주제는 당세의 국제 정세와 국내 정세를 역동적으로 파악함으로써 우리 민족이 해결해야 할 과제와 향후 민족운동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2) 을미사변과 단발령
① 의미
1894년 일본은 조선에 대하여 갑오개혁을 추진하게 하고 청·일 전쟁에서 승리하자, 더욱 그 침략성을 드러내고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여 박영효, 김홍집 등으로 친일 내각을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삼국 간섭으로 일본의 위신이 국제적으로 떨어지자 명성 황후를 중심으로 한 민씨 일파는 러시아 세력을 등에 업고 일본세력을 몰라내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박영효의 음모 고발 사건을 계기로 친일 내각을 무너트리고 친러파인 이범진, 이완용이 등용된 제 3차 김홍집 내각이 구성되었다. 이처럼 조선 내에서 친러파가 득세하여 일본 세력이 약화되자, 일본은 이노우에 공사를 군인 출신인 미우라로 교체하여 세력 만회를 도모하게 되었다. 친러파 내각이 일본인 교관이 훈련시킨 군대를 해산하고 친일 내각이 이룩하여 놓은 신제도의 파괴에 착수하자 미우라 공사는 민씨 정권의 정점인 명성황후 제거라는 비상 수단을 강구하여 명성황후시해 사건을 일으켰다.
이어 일본은 친러파를 축출하고 김홍집, 유길준 등으로 하여금 내각을 다시 조직하여 개혁을 더욱 급진적으로 강행하였다. 양력의 사용을 비롯하여 종두법의 실시 소학교설립 우편 제도실시 연호사용 군제개편 등을 단행하고 단발령을 내리기가지 하였다. 특히 단발령은 전 국민에게 상투를 자르라는 법령으로 고종황제가 솔선수범하였다. 이는 전근대 사회의 상징적인 상투를 자름으로써 개혁을 급진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시도였다. 그러나 이 사건은 국모시해와 더불어 민심을 크게 자극하여, 유생들을 중심으로 거족적인 항일 의병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② 을미의병
을미의병은 유림의 영도 아래 倡義討倭의 깃발을 들구 피의 응징을 위해 일어났다.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사람은 을미사변 직수 보온에서 의를 일으킨 문석봉이었다. 그러나 의병 활동이 본격화된 시기는 단발령이 시행된 이후부터였다. 홍주에서는 김복한, 이설, 안병찬, 이세영, 이근주 등이 의병을 일으키고, 안동에서는 권대일, 권세연이 진주에서는 노응규, 전라도에서는 기우만등이 의거했다. 그리구 유인석은 이춘영, 안승우, 홍사구, 김백선, 서상열 등의 추대를 받아 제천에서 기치를 올리고, 이소응은 춘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러한 초기의 의병활동은 특히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지방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의병들은 격문을 통해 임진왜란 때의 의병 전통을 계승하여 왜를 무찌르고 조국을 수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국모 시해를 복수하고 단발령 반대의 실천방법으로 침략자인 일제와 친일 분자를 제거할 것을 천명하였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항일 의병은 단순한 복수나 단발령에 반대하는 근시안적 궐기가 아니라 일제 침략에 대한 근본적인 항거운동 이었다. 그리하여 의병들은 일본 거류민과 일본군을 공격하고 친일 분자를 숙청하엿다.
③ 명성황후 시해를 지령한 인물 - 미우라 고로 일본공사
미우라가 서울에 부임한 것은 1895년 7월 13일 이었다. 그는 전임 공사 이노우에와 동향인으로 메이지 초에 군부에서 활약한 예비역 육군 중장이었으며, 군공으로 자작이된 이래 일본 궁실의 고문으로 있었던 인물이다. 이러한 그를 조선에서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더구나 그는 부임한 뒤 불교의 참선승을 자처하며, 고종에게 신임장을 제정하는 자리에서도 정치에 대해서는 애당초 관심이 없다는 듯 불교에 대한 말만 늘어놓다가 마지막에는 필요하다면 관음경 일부를 사경하여 명성황후께 바치겠다는 등 엉뚱한 제안을 하고 물러갔던 것이었다. 이리하여 황후는 그를 가리켜 금강산의 한 승려라고 별명을 붙일 정도로 안심하였고, 이후 미우라는 독경 공사라는 이름을 들어가며 남산의 일본 공사관에 틀어박혀 외부와의 연락을 단절한 채 명성 황후를 시해할 흉계를 꾸미고 있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터지자, 미우라 공사는 자기들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발뺌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의 서울 주재 1등 영사인 우치다가 외무대신 서리 사이온지에게 보낸 비밀 보고서에 “황후는 우리 육군 사관의 손으로 참살되었다고 하는 자가 있으며, 다나카야말로 그 하수인이라고 하는 자도 있다. 요코, 사카이 양 순사도 누군가를 살상했다는 혐의가 있고, 다카바시도 확실히 어느 부인을 살해하였다.”고 하였다. 영국인 매칸지는 오카모토를 하수인으로 지목하였다.
서울 주재 구미 열강 외교관들의 강력한 항의에 굴복한 일본정부는 하는 수 없이 미우라 공사 외 48명을 본국으로 소환하여 ‘모살급 흉도 소집죄’로 히로시마 감옥에 수감하였다. 그러나 이후 일본은 서울의 친러, 친미파 관료들의 고종황제 파천 미수사건인 춘생문 사건을 빌미로 명성황후 시해 사건도 정치적인 사건으로 해석하여 황후 시해범들을 증거불충분이라는 이유로 1896년 1월 20일 전원 석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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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10.12
  • 저작시기20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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