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제국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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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영국의 제국주의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영국 제국주의의 성격
2. 영제국의 팽창과정
 1) 1870년 이전
 2) 1870년 이후
 3) 1870년대 영국의 제국주의 정책의 변화 요인
3. 영국의 제국정책과 인도
 1) 제국정책
 2) 인도
 *지도자료*
 <대영제국의 영역변화>
 <각제국의 영역>
4. 제국의 경제적 수익성
 1) 상품 및 자본시장으로서의 가치
 2) 방위비
6. 제국의 해체

본문내용

동인도회사를 해산하고 직접통치를 결정하였다. 영토의 2/3에 해당하는 영국령 인도는 영국의 직접통치 아래 있었고, 나머지에 있는 600여개의 공국에서는 기존의 세습지배자들에 의한 간접통치가 행해졌다.
인도의 정부예산은 주로 토지세와 소금 등의 전매상품 판매수입이었다. 영국은 정부예산의 40%를 차지하는 토지세 징수를 위해서 인도를 제정적인 구역으로 나누어서 징세업자들에게 각 구역을 맡겼다. 이 구역이 사실상의 행정단위였으며 이 징세업자들이 바로 지방의 실직적인 통치자들이었다. 제국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영국납세자들에게 부담을 주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영국은 통치비용과 군대유지비를 인도가 자체 부담하는 원칙을 취하였다. 20세기 초에 이르면 인도에서는 4,000명의 영국인 관리들이 5만 명의 영국인 군인(전체 병력 수는 20만 명)과 9만 명의 민간인의 도움으로 1억 명의 인구를 지배하고 있었다.
*지도자료*
<대영제국의 영역변화>
<각제국의 영역>
4. 제국의 경제적 수익성
에덤 스미스, 리처드 코브던 등 여러 반대자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경제적 가치는 당연시 되었는데 , 최근 경제사연구들은 제국이 수지맞는 사업이 아니었음을 밝히고 있다.
1) 상품 및 자본시장으로서의 가치
19세기 말 영국경제는 이미 산업자본주의 단계를 지나 금융자본주의 단계에 도달해 있었고,1870-1914년간 영국경제의 가장 큰 특징은 해외투자의 급증이었다. 따라서 제국주의의 경제적 가치에 대한 논의도 상품수출보다는 자본수출에 집중되어 있다. 우선 간략하게 상품시장 및 원료공급지로서의 제국의 가치를 분석해보면, 최근 연구들은 제국이 원료공급지나 상품시장으로서의 식민지의 중요성을 너무 강조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엄청난 규모의 해외투자가 일어난 원인에 대해서 연구자들 간에 합의된 의견은 없다.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해볼 수 있는데, 첫 번째 견해는 국내투자로부터 오는 수익률이 너무 낮았기 때문에 자본수출이 발생했다는 견해이고(push 요인), 두 번째 견해는 국내 수익률도 괜찮았지만 해외투자가 제공하는 수익률이 국내의 그것보다 월등히 높았기 때문에 자본이 해외로 유출되었다는 주장 (pull 요인)이다. 이제까지 진행된 연구자들의 논의를 종합해보면, 아마도1870 - 1913년의 대규모 자본수출은 두 가지 요인 모두 에 의해서 진행되었지만, 후자가 좀더 강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엄청난 규모의 자본수출에서 제국에의 투자는 어느 정도였는가? 한마디로 말해서 투자가들은 명백히 식민지보다는 해외독립 국가를 선호하였다. 결론적으로 영국의 자본투자와 이 당시 진행되던 식민지 획득과는 거의 관련이 없었다는 것이 연구자들 대부분의 견해이다 만약 식민지가 독립국이었고 실제보다 낮은 정도로 국제경제에 참여하였다면, 영국과의 무역은 실제의 25%에 그쳤을 것이며, 제국에 대한 영국자본의 투자는 실제의 70% 정도에 머물렀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2) 방위비
현재까지의 연구성과를 종합해볼 때 제국으로부터의 경제적 수입은 피상적으로 인정되어온 것처럼 큰 액수는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분명히 존재하였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어쨌든, 제국의 수지계산에서 중요시되는 요인이 바로 방위비이다 영국이 세계 최대의 부유국 일 때방위비용은 국민소득의 1-2%에 불과하였다. 19세기 말이 되면 영국민 일인당 방위비는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훨씬 더 높고 세금도 더 높게 책정되었다.
영국경제의 세계지배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 정도의 방위비는 어쨌든 필요했을 것이다. 제조업자들이 해외투자에 대해서 가장 관심이 적었고 특히 제국에의 투자에 관심이 없었던 반면, 지주 등의 엘리트층이 제국에 가장 열성적이었다. 비록 전체로서의 영국은 제국으로부터 경제적 이익을 얻지 못했지만 개별 투자가들은 이익을 얻었던 것이다. 반면 부담은 국민 다수에게 이전되었다. 결국 제국주의란 대다수 납세자로부터 제국에 투자한 소수에게로 수입이 이전되는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6. 제국의 해체
1947년 8월 인도와 파키스탄의 독립과 함께 식민지 해방의 막은 올랐지만, 1960년까지 영제국 해체의 실적은 미미하였다. 그러나 1960-70년대에 대부분의 식민지들이 독립하였고, 1997년 홍콩의 중국반환에 까지 이른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성립된 노동당 정부는 전반적으고 식민지 독립에 소극적이었고 제국문제에 대해서 무지하였으며, 영국에 우호적이 아닌 민족해방세력이 주도권을 쥐고 있을 때에는 무슨 수를 써서든지 독립을 막으려고 꾀하였다.
이처럼 영국이 탈식민화에 소극적이었던 원인은 1945년 이후 여전히 강대국으로 인정받고 그 지위를 누리려는 환상에서 비롯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남아 탈식민지화가 이루어졌는데, 그 원인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제국유지의 부담이 너무 커지는 반면 제국이 기대하였던 경제적, 전략적 목표론 수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제국 포기를 결행했던 것이고, 둘째는 전후 미소 두 강대국이 주도하던 세계에서 영국은 세계체제를 유지하기에 너무 미약하였으며, 마지막으로 식민지 민족주의의 발달이 필연적으로 독립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탈식민화는 민족주의의 강화만이 아니라 국제정치적, 사회경제적 요인들로 인해서 제국지배에 유리하게 작용하던 주변부에서의 협력 균형이 반 제국주의자에게로 기울고 대줌이 동원되어 민족주의 의식이 발달하고 보다 더 어려워진 반면에 중심부가 압도적 힘을 행사할 수 없을 때 가능해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에 들어 식민지의 민족주의적 추세를 간파한 영국은 1926년 영국연방이라는 개념을 공식적으로 규정하여 1931년 웨스트 민스터 법에 의해서 권위를 부여받고 1945년 이후 독립된 식민지들이 회원국으로 가입함으로써 규모가 커졌다. 영국은 식민지해 방 후에도 영연방을 통해서 세계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영연방은 바라던 정치적, 전략적, 경제적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였다. 식민지의 존재 여부는 더 이상 영국의 운명에 큰 의미가 없게 되었다. 영국민은 이미 스스로를 제국이 아니라 유럽의 일원으로 동일시하려는 노력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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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11.13
  • 저작시기2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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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775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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