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교과서 인물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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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황성신문》의 주필로 활동했으며 독립협회에도 가입하였다. 대동교(大同敎)를 창건하고 신한청년당을 조직하는 등 활발한 항일활동을 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267)최남선
한국의 사학자·문인. 잡지《소년》을 창간,〈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했다.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 중 하나이다. 독립선언문을 기초하고 민족대표 48인 중 하나였지만, 이어 친일 활동을 하였다. 진흥왕순수비를 발견하였다.
(268)서재필
독립운동가.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 개화파의 일원으로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자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여 의사가 되었다. 미국으로 귀화하였으나, 귀국하여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독립협회(獨立協會)를 결성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도 독립운동에 여러 방향으로 도움을 주었고, 광복후에는 미군정청고문으로 일하다가 미국에서 영면하였다.
(269)손병희
1906년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하고 제3세 교주에 취임, 교세 확장운동을 벌이는 한편, 출판사 보성사(普成社)를 창립하고 보성(普成) ·동덕(同德) 등의 학교를 인수하여 교육 ·문화사업에 힘썼다. 민족대표 33인으로, 3·1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되었으며 교육 ·문화사업에 힘썼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270)한용운
독립운동가 겸 승려, 시인. 일제시대 때 시집《님의 침묵(沈默)》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였다.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주요 저서로 《조선불교유신론》 등이 있다.
(271)장지영
한글학자. 한글학회 전신인 조선어연구회를 조직, 한글말살정책에 맞서 한글사전 편찬에 진력하였다.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 투옥되었다. 광복 후, 한글학회 이사, 연세대학 교수를 역임했다. 저서는《한글운동》이다.
(272)정인보
한학자·역사학자. 양명학 연구의 대가였으며 한민족이 주체가 되는 역사체계 수립에 노력한 역사학자였다. 광복이 되자 곧 서울로 상경하여 일제의 포악한 민족말살정책의 금압으로 가려졌던 국학의 부흥과 교육에 진력하여 민족사를 모르는 국민에게 바른 국사를 알리고자 1946년 9월 《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를 간행하였다.
(273)문일평
한국의 사학자 겸 언론인.《조선일보》 편집고문등으로 활약하였으며, 국사 연구에도 노력을 기울여 많은 논문을 집필하였다. 저서에 《조선사화》, 《호암전집》, 《한국의 문화》 등이 있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274)안재홍
한말의 독립운동가·정치가·사학자. 조선일보사 사장, 물산장려회 이사로 국산품 장려운동을 벌였다. 조국의 암담한 현실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민족정기를 되찾는 것이라고 생각, 국사(國史)를 깊이 연구하였는데 특히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 초반까지 고대사(古代史) 연구에 몰두, 일제 관학자(官學者)들의 식민사관(植民史觀)을 극복하고자 애썼다.
(275)남궁억
한말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이며 언론인. 궁내부 별군직(別軍職), 칠곡부사(漆谷府使), 내부 토목국장(土木局長) 등을 역임하였고 독립협회에서 활약하였다. 양양군수(襄陽郡守), 대한협회장, 관동학회(關東學會) 회장 등을 지내고 배화학당 교사로 있으며 교과서를 편찬하고 교회와 학교를 세웠다.
(276)손진태
한국의 사학자, 민속학자. 한국 최초 민속학회지 《조선민속》 간행, 진단학회 창설에 참여했다. 서울대학교 문리대 학장, 문교부차관 겸 편수국장을 지냈다. ‘신민족주의사관’을 제창했다. 저서는《조선고가요집》등이다.
(277)전형필
한국의 교육가이자 문화재 수집가로 민족문화재를 수집하는 데 힘썼으며 한남서림(翰南書林)을 지원·경영하며 문화재가 일본인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았다. 보성(普成)고보를 인수하여 교주가 되었으며 광복 후, 보성중학교 교장과 문화재 보존위원을 역임하였다.
(278)김소월
한국 서정시의 기념비적 작품인 《진달래꽃》으로 널리 알려진 시인이다. 한국의 전통적인 한을 노래한 시인이라고 평가받으며 짙은 향토성을 전통적인 서정으로 노래하여 오늘날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 《산유화》외 많은 명시를 남겼다.
(279)이육사
일제강점기에 끝까지 민족의 양심을 지키며 죽음으로써 일제에 항거한 시인으로 목가적이면서도 웅혼한 필치로 민족의 의지를 노래했다. 1933년 육사라는 이름으로 시 《황혼(黃昏)》을 《신조선(新朝鮮)》에 발표하여 시단에 데뷔, 저작으로는《청포도(靑葡萄)》, 《교목(喬木)》 등이 있다.
(280)윤동주
일제강점기에 짧게 살다간 젊은 시인으로, 어둡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 인간의 삶과 고뇌를 사색하고, 일제의 강압에 고통받는 조국의 현실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 고민하는 철인이었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그의 얼마되지 않는 시 속에 반영되어 있다.
(281)홍난파
한국의 작곡가·바이올리니스트. 도쿄신교향악단의 제1바이올린 연주자가 되었으며 조선음악가협회 상무이사를 지냈다. 총독부의 정책에 동조하여 대동민우회(大同民友會), 조선음악협회 등 친일단체에 가담했다. 작품에《봉선화》,《성불사의 밤》,《옛동산에 올라》, 《달마중》, 《낮에 나온 반달》 등이 있다.
(282)현제명
한국의 성악가, 음악교육자. 그의 업적은 음악교육과 창작활동에서 두드러졌으며, 특히 연희전문학교 재직 때에는 관현악단취주악단합창단중창단 등을 조직하였다. 이름을 구로야마[玄山濟明]으로 창씨개명하고, 친일 단체인 조선음악협회, 경성후생실내악단 등에 가담해 친일 활동을 하였다.
(283)안익태
한국의 작곡가·지휘자. 대한민국의 국가 애국가를 작곡했으며, 대표 작품으로 한국환상곡이 있다. 일제시대의 친일 행적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마요르카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를 지냈다. 문화포장을 받았으며 사후 문화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284)나운규
한국의 영화인.《아리랑》, 《벙어리 삼룡》, 《오몽녀》등의 영화를 제작하였다. 1936년 마지막 작품 《오몽녀(五夢女)》를 포함해서 모두 15편이 넘는 영화의 원작·감독·주연·제작을 맡았다. 1993년 항일영화를 만들어 민족혼을 고취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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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11.13
  • 저작시기2012.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75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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