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관계의 변화
본 자료는 7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해당 자료는 7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7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북미관계의 변화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 앞의 글, 180쪽.
11) 제네바합의 이후 북한의 내부논쟁의 핵심은 ‘미국이 과연 제네바합의를 준수할 것인가’의 문제였다고 한다. 북한의 국가전략을 둘러싼 군사 우선 대 경제 우선, 선군주의 대 선경(先經)주의, 군대 우선 대 인민 우선 입장 사이에서 벌어진 탈냉전 이후 북한 최대의 논쟁은 궁극적으로 미국에 대한 인식문제의 연장이었다. 김일성 주석의 사망과 최악의 경제 위기 상황에서 미국의 정책을 예의주시하던 김정일 위원장은 4년의 내부논쟁을 거쳐 1998년 마침내 국가의 자원과 역량을 군대에 집중하는 ‘선군주의’로 결론지었다고 한다. 박명림, 앞의 글, 180쪽. 이 해 8월 말에 이루어진 ‘대포동미사일 시험발사’는 선군정치의 위세를 과시하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12) 셀리그 해리슨, 「Did North Korea Cheat?」, Foreign Affairs, Vol. 84. 여기서는 김연수, 「탈냉전기 한반도 평화의 위기와 공존의 모색」,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체제통합연구회 편, 2005, 백산서당), 116쪽에서 재인용.
13) 노무현대통령은 북한의 NPT 탈퇴 이후인 2003년 2월 “북한에 대한 무력공격은 한반도 전쟁을 유발할 수 있는 심각한 문제이기에 지금 단계에서는 사전 검토 자체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14) 김경일, 「한반도평화체제 구축과 새로운 동북아국제질서」, 2007. 5.
15) 정세현, 「3대정권 대북협상 주역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의 충격 특강」, 『신동아』 2005년 3월 호, 116쪽.
16)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 <조선신보>는 제4차 6자회담에서 합의된 ’9.19공동성명’을 한반도 정세의 ’전변(轉變)’이라고 평가하면서 이는 북한의 핵보유 선언 때문에 가능했다는 기사를 게재하였으며(2005년 9월 24일자), 고 밝혔다. 그리고 미국에서 발행되는 <민족통신>에는 “고난의 행군을 견뎌내며 이룩한 선군정치의 결실이 2.13합의로 나타났다”는 내용의 북한방문기가 소개되었다(2007년 2월 25일자). 이 두 매체는 북한의 입장을 반영하는 대표적 해외언론이다.
17) 박명림은 북핵문제를 둘러싼 북한 권력의 협상 성과를 ‘국가안보의 성공이 인간안보의 실패로, 주권 수호의 성공이 인권 보호의 장애로 연결’된 것이라며 이러한 성공이 진정한 성공이라 할 수 있을지, 그리고 누구의 성공인지 무겁게 되묻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박명림, 앞의 글, 184쪽)
18) 박명림은 이것을 ‘체제 안전의 이름을 빈 분단 고착’에 대한 미국의 직접 담보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박명림, 앞의 글, 183쪽.
19) 북한의 이러한 태도는 제1차 핵위기 시에도 마찬가지였다. 북한은 92년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을 체결하였지만, 93년에는 NPT를 전격 탈퇴하였다.
20) 지난 5월의 남북장관급회담을 사실상 결렬에 이르게 한 것은 핵 동결의 가시적 조처가 있어야 대북 쌀지원을 하겠다는 노무현 정부의 전형적인 ‘출구론’적 태도 때문이었다.
21) 박명림은 남북정상회담 시 공동선언 등이 있을 경우 북한의 국가전략을 고려하고 평화를 위한 한국의 적절한 이니셔티브를 확보하기 위해 평화, 안보, 긴장완화 문제에 대한 내용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는 견해가 제기되었지만 이것이 결과적으로 수용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박명림, 앞의 글, 183쪽.
22) BDA문제와 관련, 지난 6월 3일 송민순 외교부장관은 "BDA문제가 법적.기술적 장애로 교착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각국의 전략적 판단이 요구된다고 말했는데, 이는 2.13합의의 조속한 이행을 위해 BDA 경영진 교체 등의 조치를 신속하게 취해줄 것을 중국측에 간접 촉구한 것으로 해석된다.
23) 박순성은 6.15담론에 대한 북한식 해석을 ‘민족공조를 통한 반미통일론’으로 요약하였다. 그는 “이러한 북한의 교조적 해석 또는 통일전선적 반미통일론의 핵심은 민족해방전쟁론이라고 할 수 있다. 교조적 해석에 따르면, 평화는 민족의 생존과 통일의 이름하에 군사주의에 자리를 내주고, 민족은 반미주의 또는 반제국주의의 형태로만 존재한다”고 지적하고 있다(박순성, 「북핵실험 이후, 6.15시대 담론과 분단체제변혁론」, 『창작과비평』, 2006년 겨울호, 338 쪽).
24) 이대훈은 남북관계에서 국가주동성이 증대되고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통일운동과 통일담론이 국가주도성을 전면 인정하고 스스로 이에 대한 들러리 역할로 축소되었다고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이것은 ‘남북관계는 근본적으로 통일의 문제이며, 이는 근본적으로 국가간 관계이고 여기에 시민사회의 역할은 보조적이다’는 명제가 도전받지 않았던 논쟁의 부재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대훈, 「평화와 통일에 대한 시민운동의 방향과 의제」, ‘남북관계에 대한 시민사회의 성찰과 재인식’ 워크샵 발제문(2006. 6. 1.) 참조.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다. 남북관계는 북과의 관계를 ‘발전’시켜야 하는 측면과, ‘성찰적 변화’를 추구해야 하는 양 측면이 동시에 존재하는데, 이대훈은 단지 ‘성찰적 변화’의 한 측면만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역사적 컨텍스트를 무시한 운동의 비약은 있을 수 없다. 또한 이들은 국가의 폭력성이란 명제를 넘어서는 시민사회의 평화담론 실천방향을 ‘평화국가만들기’로 제기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검토는 이승환, ‘안보적 통일담론에서 평화지향적 통일담론으로 전환해야’, 『민족화해』 통권 24호(2007년 1-2월 호)를 참조하라.
25) 박명림, 앞의 글, 177쪽.
26)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의 한 간부가 ‘우리 시민운동은 전통적 통일담론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통일운동을 바라보면서 박수나 치고 있거나, 혹은 그들의 협조 요청에 들러리나 서주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라고 한 고백은 한국 시민사회의 ‘통일’에 대한 인식과 실천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포스트를..
덧글 3개 엮인글 쓰기
평화를 지향하는 통일 이야기 6월항쟁 20년, 남북관계 및 북미 관계의 변화와 평화체제의 전망
평화를 지향하는 통일 이야기 6월항쟁 20년, 남북관계 및 북미 관계의 변화와 평화체제의 전망
  • 가격3,000
  • 페이지수22페이지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08.0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78768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