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사의 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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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활동했다. 유림 역시 경상도대표로 선전부 선전위원에 이어 무임소 국무위원으로 활동하다가 해방 후 귀국하였다.
) 旦洲柳林先生記念事業會 편, 『旦洲 柳林-資料集1』, 1991 참조.
Ⅳ. 자주독립, 자유공동체 사상으로서의 한국아나키즘
해 방 이후 한국 아나키스트들은 미-소의 냉전체제와 이승만-김일성의 독재체제 구축의 와중에서 나름대로 제 3의 길을 모색하려 노력하였다. 중국과 일본에서 활동하다가 귀국한 아나키스트들은 1945년 9월 생활혁신을 통해 자치사회를 건설하자는 듯으로 자유건설자연맹을 결성하였다.
이어 이듬해 4월 유림 등은 "자주적 민족국가 수립"을 1차목표로 삼아 독립노농당을 결성하였다. 독립노농당은 강령에서 미-소 군정의 즉각철수를 주장하며 '국가의 완전 자주독립'과 '근로대중의 최대복리' 등을 내세웠다. 즉 한국 민족 스스로 해방을 쟁취하지 못하고 미국과 소련의 분할통치에 처한 실정에서 민족의 자주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전 민족이 합심해 자주적인 민족혁명을 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민족혁명을 통해 민주정치를 달성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아나키스트 사회를 건설해 나가자는 주장이며 그 중심세력으로 임시정부 세력을 추대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독립노농당은 1948년 10월 총선거에서 대부분 원내진출에 실패하였다. 1960년 9월 이 세력은 혁신진영의 통합을 주장하며 자유사회주의집단으로 나아가려 했으나, 이듬해 군사쿠데타로 강제 해산당하고 말았다. 이후 정화암.하기락.양일동 등이 통일민주당을 결성해 원내에 진출하였고, 1973년 2월 선거에는 총투표의 10.2%를 획득한 바 있다.
이와 함께 생활혁신을 통해 자주사회 건설의 기초를 닦자는 일부 세력은 조선농촌자치연맹과 한국노동자자치연맹을 조직하여 민중의 자치조직을 추구하였다. 비록 이 운동은 1970년대 정부의 농촌개량운동과 대한노총 등으로 흡수되어 자주성을 상실하고 말았으나, 오늘날 귀농운동과 지역생태운동 등으로 부활하고 있다.
Ⅴ. 맺음말
한 국아나키스트들은 제국주의 침략과 봉건체제에 맞서 가장 치열한 의열투쟁을 전개했고, 코민테른을 비롯한 공산주의세력과도 가장 처절하게 투쟁했다. 해방 후에는 이승만-박정희의 반통일 독재권력에 맞서 민주화와 통일, 농촌공동체 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아나키즘이 민족주의.공산주의와 더불어 한국 근현대사를 이끈 3대 사상의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일부 논자는 "이념으로서 실패한 역사를 가졌다"고 평가하고 있다.
) 대표적인 논자로 이호룡(『한국의 아나키즘』)을 들 수 있다.
물론 아나키즘이 이론으로나 운동으로서 성공했다고 볼 수는 없으나, 이 사상을 우리 역사상 중요자산의 하나로 복원하고자 하는 의도로 몇가지 반론을 제기하고자 한다.
첫 째, 아나키즘이 개인의 절대자유를 추구하며 조직을 거부하는 관념성과 경직성 때문에 실패했다는 주장이다. 즉 일부 선진적 아나키스트들이 자신들만의 비밀결사를 조직한 채, 민중의 일상생활에 무관심하였기 때문에 광범위한 대중을 조직하거나 지지를 얻는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위의 자아주의나 민중 직접행동론에서 볼 수 있듯이, 아나키스트들은 민중 개개인의 자각과 자아의 확립을 통해 지식인이나 권력자에 의존하지 말고 민중 스스로 운명을 개척할 것을 주장했다. 자각된 민중은 절대권력에 저항하는 한편, 상호부조와 연합주의에 입각해 최고의 자유형태인 자율.자치공동체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상촌 건설과 생디칼리즘 등은 구체적인 민중의 일상생활에 집중하여 실현가능성을 높인 사상으로, 오늘날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둘째, 한국 아나키스트들이 일본무정부공산당과 같은 중앙집권적 조직을 인정하고 나아가 임시정부 및 광복군과 같은 정부와 군대의 존재를 인정해 사상적 독자성을 상실했다는 주장이다. 한국아나키스트들의 정당참여, 임정 활동 등은 물론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이라는 전시체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인 면도 있다. 비록 중앙집권적 조직을 인정했지만, 아나키스트들은 내부의 자유로운 발의와 만장일치 원칙, 결정을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는 자율원칙을 버리지 않았다. 이들이 말하는 黨의 임무란, 혁명 과도기에 생산의 재개를 위해 제일 중대하고 제일 긴급한 문제를 해결하며 노동자의 생산조직을 파괴자로부터 방어하는 것이다. 결국 당은 혁명적 코뮨을 수호하기 위해 과도기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것인데, 그렇더라도 "중앙에는 연락을 위한 종합기관"만을 둔다는 것이다.
) 小松隆二는 무정부공산당이 지금까지의 아나키스트단체와 달리, 혁명이 일어나 성공할 경우 어떻게 혁명을 지켜 나갈 것인가를 정면으로 고민하였다고 보았다. 즉 그들이 의도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국가나 독재권력의 용인이 아니라, 과도기로서의 프롤레타리아국가라는 독재권력을 수립하려는 기도를 저지하기 위해 아나키스트들이 헤게모니를 장악할 필요를 느꼈다는 것이다. 그런 한에서 무정부공산당의 기본자세는 종래의 아나키즘과 원칙적으로 상이한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小松隆二,『日本アナキズム運動史』, 232∼234쪽).
또한 민족해방을 당면과제로 삼아 항일연합전선에 참가했던 '민족혁명론'을 비난할 수는 없다고 여겨진다.
셋 째, 국가와 정당의 존재를 인정하는 '본령에서의 일탈'은 해방 후 한국 아나키스트들이 대의정치와 정당활동에 참여함으로써 스스로 소멸의 길을 걸었다는 주장이다. 여기서 과연 '아나키즘의 본령'이 무엇인가에 대한 인식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국가와 정당-선거 자체를 거부하는 세력과 관료적.강권적 성격대신 민주적.자율적 국가정부를 인정하는 세력으로 구분되기 때문이다. 미소 냉전체제와 반공.전체주의 독재체제에서 극좌와 극우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우리 근현대사의 특수성은 적극적 저항의지의 표현으로 후자를 택했다고 볼 수 있겠다.
이제 우리는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새 시대 새 사상을 갈망하고 있다. 물론 아나키즘사상이 절대유일의 대안이념일 수 없다. 다행이 우리는 근현대 속에서 많은 분들이 꿈꾸었고 몸부림쳤던 아나키즘사상에 대한 귀중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 사상은 분명 21세기 평화와 통일, 자유와 평등을 향한 우리 미래에 빛을 비쳐줄, 소중한 자산의 하나라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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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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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78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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