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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길
2차 세계 대전 후에 유럽은 전승국들에 의해 재조정되었다. 패전국들의 각 지역들이 세 전승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된다는 것은 명백하였다. 전승국의 영향 아래 들어간 국가들은 대개 그 곳을 점령한 전승국의 헌법과 체제를 따라야 했다.
미국은 NATO(북대서양 조약 기구)를 중심으로 동맹 체제를 구축하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마셜 플랜(Marshall Plan)과 함께 유럽을 재건하는 데 많은 경제적 지원을 하였다. 소련 연방은 바르샤바 조약 기구와 COMECON(경제 상호 원조 회의)의 설립으로 이에 대응했다.
1871년과 1945년 사이에 프랑스와 독일은 서로간에 세 차례의 전쟁을 치렀다. 이 시기에 독일의 슈바르츠발트와 접해 있는 프랑스의 알자스 주는 네 번이나 통치자가 바뀌었다. 유럽 사람들은 전쟁에 지쳐 있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서로 적대시하지 않는 새로운 유럽이 만들어지기를 원했다.
이 생각의 단초는 1차 세계 대전 직후의 시기로 거슬러올라간다. 니콜라우스 폰 쿠덴호프 칼러기 백작(Nikolaus Graf von CoudenhoveKalergi)은 오스트리아 귀족의 후손으로, 1923년에 『범유럽주의』라는 책자를 썼다. 그는 모든 국가의 국민들이 평화적으로 상호 공존하는 하나의 유럽에 대한 사고에 몰두하였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빈의 왕궁에 그의 사무실을 차리는 것을 허가해 주었다. 쿠덴호프 칼러기 백작은 범유럽주의 운동을 기초하였으나, 현실 정치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다. 단지 유럽 국가들의 정치가들이 이러한 유럽에 대한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많은 추종자들이 그를 따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정권의 잦은 교체와 민주주의의 불안정, 어려운 경제적 상황으로 그의 목표는 성취되지 않았다.
나치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진 1945년은 범유럽주의의 시대였다. 한때 협의체 형식의 유럽 의회가 설립되었는데, 거기에 모든 유럽 국가들이 대표를 보내 공동의 문제를 토론할 수 있었다. 유럽 의회는 정치적 힘은 없었지만 도덕적인 힘을 지니고 있어, 의회는 한 나라에서 소수 민족들의 권리 침해가 일어나면 이를 비판하였다.
ECSC(유럽 석탄 철강 공동체:1952년)에서 유럽 국가들의 경제적 연합에 대한 생각이 기초되었고(프랑스, 베네룩스, 이탈리아, 1956년에 서독 가입), 그것은 EEC(유럽 경제 공동체:1957년)로 옮겨 갔다. 범유럽에 대한 생각은 순수한 경제 동맹에서 나와서 개발 국가를 연결하는 상위 관청을 두고, 결국은 유럽의 연합 국가를 만드는 것에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초기에는 영국, 스위스, 덴마크, 노르웨이가 EEC에 회의적이어서 EEC에 대항해 EFTA(유럽 자유 무역 연합)를 결성하기도 했다.
COMECON 국가들은 이런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오스트리아, 핀란드도 중립을 선언했기 때문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EC(유럽 공동체:1967년 ECSC와 EEC, 유럽 원자력 공동체가 통합하여 설립)는 경제적인 성공을 과시하였고, 점차 가입을 희망하는 국가들이 늘어났다. 1973년에는 영국, 아일랜드, 덴마크가 참여하였고, 1981년에는 그리스, 1986년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가입하였다. 1995년에는 마침내 스웨덴, 핀란드 그리고 오스트리아도 가입했다. 오늘날에도 가입을 희망하는 국가들이 늘어나고 있다.
유럽인들은 EU(유럽 연합:마스트리히트 조약에 의한 EC의 새로운 명칭)를 단지 경제적 조직으로만 이해하지는 않았다. 유럽은 또한 가치 공동체이다. 의회 민주주의, 인권의 존중, 소수 민족의 보호 등이 이런 가치들에 속하고 이 가치들을 위해 최소한의 경제적 발전이 요구되는 것이다.
공산주의의 붕괴로 동·중부 유럽은 개방되었고, 그들은 EU에 가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라틴 유럽에 있는 국가들은 평화스러운 분위기, 우호적 상호 공존 속에서 서로를 이해한다. 프랑스는 독일의 가장 중요한 교역 상대국이고, 북유럽 국가의 국민들은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스의 해변에서 휴가를 보낸다. 국가들 사이의 경쟁은 스포츠 구장에서 이루어지고 정치는 문명의 법칙에 따라 협상 테이블에서 이루어진다.
1974년 키프로스에서의 민족 분쟁과 1992~1996년의 보스니아 사태 등의 야만적인 사태는 라틴 유럽 주변부에서 발생한 것이다. 이런 지역들은 공통적인 유럽 역사의 중요한 단계를 함께 경험하지 않았다. 유럽을 결정짓는 가치 공동체라는 것은 중세의 라틴 유럽이다. 이것의 경계선은 현재까지도 헝가리의 남쪽과 폴란드의 동쪽 지역에서 끝이 난다.
중부 유럽에서는 키프로스와 유고슬라비아의 내전 같은 상황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1968년에 소련의 군사 무력 진압에 대항해 체코슬로바키아가 비폭력으로 저항한 것이 유럽의 특징을 반영하는 것이다. 1975년 핀란드 수도 헬싱키에서 서유럽과 중유럽의 민주 국가 대표들과 동유럽의 대표들은 인권을 수호할 것을 맹세했다. 또한 오랫동안 지속된 개혁과 현대화를 위한 폴란드 자유 노조의 투쟁, 독일 재통일의 평화적인 과정, 그리고 체코의 분할 과정에서 평화적으로 진행된 과정이 특징적이다.
그러나 최근의 IRA의 테러는 유럽 핵심부가 아직 이러한 문제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함을 보여 준다. 차별당하고 있다고 느끼는 소수 민족들이 있고, 경제적으로도 차별을 느끼는 지역들이 있다. 북이탈리아, 벨기에와 같은 국가들에서는 소수 민족들이 해당 국가로의 통합을 거부하는 사건들이 발생하고 있다. 스페인의 바스크 지역, 코르시카 섬의 독립 투쟁도 그 예에 속한다.
그러나 유럽의 미래는 계속적으로 작은 국가들을 창설하는 것에 있지 않다. EU는 국가들의 공동체이다. 그것은 하나의 지역 공동체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 수년 전부터 선진화된 EU 회원국들은 남부 이탈리아, 스페인의 안달루시아, 아일랜드 섬의 미개발 지역의 발전을 위해 많은 비용을 지불했다.
미래는 각국 정부의 힘을 줄이는 데 있다. 그것을 위해 그들은 브뤼셀 등에 있는 EU에 많은 권한을 양도해야만 하고, 프랑코의 독재 후에 민주화된 스페인이 자치 지역을 만들어 냈듯이 중앙 집권화된 국가들에서는 지역 자치제에 힘을 실어 주어야 한다.
2차 세계 대전 후에 유럽은 전승국들에 의해 재조정되었다. 패전국들의 각 지역들이 세 전승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된다는 것은 명백하였다. 전승국의 영향 아래 들어간 국가들은 대개 그 곳을 점령한 전승국의 헌법과 체제를 따라야 했다.
미국은 NATO(북대서양 조약 기구)를 중심으로 동맹 체제를 구축하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마셜 플랜(Marshall Plan)과 함께 유럽을 재건하는 데 많은 경제적 지원을 하였다. 소련 연방은 바르샤바 조약 기구와 COMECON(경제 상호 원조 회의)의 설립으로 이에 대응했다.
1871년과 1945년 사이에 프랑스와 독일은 서로간에 세 차례의 전쟁을 치렀다. 이 시기에 독일의 슈바르츠발트와 접해 있는 프랑스의 알자스 주는 네 번이나 통치자가 바뀌었다. 유럽 사람들은 전쟁에 지쳐 있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서로 적대시하지 않는 새로운 유럽이 만들어지기를 원했다.
이 생각의 단초는 1차 세계 대전 직후의 시기로 거슬러올라간다. 니콜라우스 폰 쿠덴호프 칼러기 백작(Nikolaus Graf von CoudenhoveKalergi)은 오스트리아 귀족의 후손으로, 1923년에 『범유럽주의』라는 책자를 썼다. 그는 모든 국가의 국민들이 평화적으로 상호 공존하는 하나의 유럽에 대한 사고에 몰두하였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빈의 왕궁에 그의 사무실을 차리는 것을 허가해 주었다. 쿠덴호프 칼러기 백작은 범유럽주의 운동을 기초하였으나, 현실 정치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다. 단지 유럽 국가들의 정치가들이 이러한 유럽에 대한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많은 추종자들이 그를 따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정권의 잦은 교체와 민주주의의 불안정, 어려운 경제적 상황으로 그의 목표는 성취되지 않았다.
나치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진 1945년은 범유럽주의의 시대였다. 한때 협의체 형식의 유럽 의회가 설립되었는데, 거기에 모든 유럽 국가들이 대표를 보내 공동의 문제를 토론할 수 있었다. 유럽 의회는 정치적 힘은 없었지만 도덕적인 힘을 지니고 있어, 의회는 한 나라에서 소수 민족들의 권리 침해가 일어나면 이를 비판하였다.
ECSC(유럽 석탄 철강 공동체:1952년)에서 유럽 국가들의 경제적 연합에 대한 생각이 기초되었고(프랑스, 베네룩스, 이탈리아, 1956년에 서독 가입), 그것은 EEC(유럽 경제 공동체:1957년)로 옮겨 갔다. 범유럽에 대한 생각은 순수한 경제 동맹에서 나와서 개발 국가를 연결하는 상위 관청을 두고, 결국은 유럽의 연합 국가를 만드는 것에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초기에는 영국, 스위스, 덴마크, 노르웨이가 EEC에 회의적이어서 EEC에 대항해 EFTA(유럽 자유 무역 연합)를 결성하기도 했다.
COMECON 국가들은 이런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오스트리아, 핀란드도 중립을 선언했기 때문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EC(유럽 공동체:1967년 ECSC와 EEC, 유럽 원자력 공동체가 통합하여 설립)는 경제적인 성공을 과시하였고, 점차 가입을 희망하는 국가들이 늘어났다. 1973년에는 영국, 아일랜드, 덴마크가 참여하였고, 1981년에는 그리스, 1986년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가입하였다. 1995년에는 마침내 스웨덴, 핀란드 그리고 오스트리아도 가입했다. 오늘날에도 가입을 희망하는 국가들이 늘어나고 있다.
유럽인들은 EU(유럽 연합:마스트리히트 조약에 의한 EC의 새로운 명칭)를 단지 경제적 조직으로만 이해하지는 않았다. 유럽은 또한 가치 공동체이다. 의회 민주주의, 인권의 존중, 소수 민족의 보호 등이 이런 가치들에 속하고 이 가치들을 위해 최소한의 경제적 발전이 요구되는 것이다.
공산주의의 붕괴로 동·중부 유럽은 개방되었고, 그들은 EU에 가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라틴 유럽에 있는 국가들은 평화스러운 분위기, 우호적 상호 공존 속에서 서로를 이해한다. 프랑스는 독일의 가장 중요한 교역 상대국이고, 북유럽 국가의 국민들은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스의 해변에서 휴가를 보낸다. 국가들 사이의 경쟁은 스포츠 구장에서 이루어지고 정치는 문명의 법칙에 따라 협상 테이블에서 이루어진다.
1974년 키프로스에서의 민족 분쟁과 1992~1996년의 보스니아 사태 등의 야만적인 사태는 라틴 유럽 주변부에서 발생한 것이다. 이런 지역들은 공통적인 유럽 역사의 중요한 단계를 함께 경험하지 않았다. 유럽을 결정짓는 가치 공동체라는 것은 중세의 라틴 유럽이다. 이것의 경계선은 현재까지도 헝가리의 남쪽과 폴란드의 동쪽 지역에서 끝이 난다.
중부 유럽에서는 키프로스와 유고슬라비아의 내전 같은 상황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1968년에 소련의 군사 무력 진압에 대항해 체코슬로바키아가 비폭력으로 저항한 것이 유럽의 특징을 반영하는 것이다. 1975년 핀란드 수도 헬싱키에서 서유럽과 중유럽의 민주 국가 대표들과 동유럽의 대표들은 인권을 수호할 것을 맹세했다. 또한 오랫동안 지속된 개혁과 현대화를 위한 폴란드 자유 노조의 투쟁, 독일 재통일의 평화적인 과정, 그리고 체코의 분할 과정에서 평화적으로 진행된 과정이 특징적이다.
그러나 최근의 IRA의 테러는 유럽 핵심부가 아직 이러한 문제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함을 보여 준다. 차별당하고 있다고 느끼는 소수 민족들이 있고, 경제적으로도 차별을 느끼는 지역들이 있다. 북이탈리아, 벨기에와 같은 국가들에서는 소수 민족들이 해당 국가로의 통합을 거부하는 사건들이 발생하고 있다. 스페인의 바스크 지역, 코르시카 섬의 독립 투쟁도 그 예에 속한다.
그러나 유럽의 미래는 계속적으로 작은 국가들을 창설하는 것에 있지 않다. EU는 국가들의 공동체이다. 그것은 하나의 지역 공동체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 수년 전부터 선진화된 EU 회원국들은 남부 이탈리아, 스페인의 안달루시아, 아일랜드 섬의 미개발 지역의 발전을 위해 많은 비용을 지불했다.
미래는 각국 정부의 힘을 줄이는 데 있다. 그것을 위해 그들은 브뤼셀 등에 있는 EU에 많은 권한을 양도해야만 하고, 프랑코의 독재 후에 민주화된 스페인이 자치 지역을 만들어 냈듯이 중앙 집권화된 국가들에서는 지역 자치제에 힘을 실어 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