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신학의 자료 혹은 자원 sources는 무엇인가?
신학의 자원에 대한 상당한 논쟁들이 있어 왔다.
기독교 전통에서 보통 4 가지 정도의 자원들이 이야기됨
1) 성서 2) 이성 3) 전통 4) 경험
이 각각이 나름대로 신학에 구별되는 공헌을 한다고 함.
그러나 그에 앞서서 계시에 관하여 논의가 필요.
1. 계시의 개념
하나님의 본성과 목적을 온전히 알려는 인간의 시도가 궁극적으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자연적인 신지식이 가능하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그것은 부분적
결국 (특별)계시가 중요. * 일반계시: 성서 외에 자연에 하나님의 계시가 어느 정도 있다.
1960년대 전통적인 신학적 관념들에 대한 심각한 도전들
그 중에 하나, 계시 이해. 두 가지 쟁점.
가. F. G. Dowing
계시에 대한 현대의 관심은 현대 철학에서 인식론적 쟁점들의 중요성 때문이다.
올바른 지식에 대한 질문들이 부적절하게 신학에 전이되었다는 것.
성경은 지식이 아니라 구원에 관심.
여기에 대한 대답: 성서적 구원 개념은 종종 ‘지식’이라는 말로 표현되고, 인간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의 가능성에 달려 있는 것으로 이해됨.
나. James Barr와 성서학자들
신구약 성서에서 계시라는 주제는 주변적인 중요성
성서에서 계시 언어는 근본적이지도 일관성 있게 나타나지도 않는다고.
대답: 성서 자체의 계시적 언어들에 대한 주의 깊은 고려가 아님.
물론 중세 혹은 근대의 계시 개념들이 신구약 성서 안에 명시적으로 발견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그것들이 성서 안에 없거나 주변적인 것이 아니다.
신약성서에서 계시의 의미가 “지금까지 알지 못하던 하나님을 드러냄”을 뜻하지는 않음이 사실.
일상 생활에서 그 말의 의미는 “무언가 알고 있는 것을 온전히 알게 하는 것”
혹은 “지금까지 모호하거나 분명치 않던 것을 온전히 드러냄”
그러나 신학적 맥락에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그 하나님의 자기계시가 항상 온전함을 함의하는 것은 아니다.(하나님은 계시를 하시더라도 여전히 신비가운데 계신다)
Gerald O'Collins: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계시는 그 인격성들의 완전한 표출이 아니더라도 일어날 수 있다. (하나님의 계시를 알면 하나님의 모두 아는 것은 아니다.)
특히 동방 정교회 전통은 하나님의 계시가 하나님의 신비를 제거하지는 않는다고 강조.
개혁자 루터도 하나님의 계시는 단지 부분적인데,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신뢰할만하고 적절한 것이라고.
그는 “하나님의 감추어진 계시”라는 개념을 발전시킴. (계시하는 하나님은 숨어계시는 하나님이기도 하다)
이것이 그의 “십자가 신학”의 중요한 요점.
계시 개념은 단지 하나님 지식을 수여하는 것 이상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기현시의 의미를 지님.
‘누군가에 대하여 아는 것’과 ‘누군가를 아는 것’은 구분될 수 있다.
전자는 그 사람에 대한 정보 축적이지만, 후자는 그 사람과의 인격적 관계.
발전된 계시의 의미는 단지 한 덩이의 지식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인격적인 자기현시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자기현시의 과정을 통하여 주권을 가지고 역사하심.
그 과정은 나사렛 예수의 역사 안에서 절정과 완성에 도달함.
이점은의 영향을 받은 저자들에 의해 강조됨
Friedrich Gogarten, Dietrich Bonhoeffer, Emanuel Hirsch,
Emil Brunner: 성육신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인격적 자기현시를 볼 수 있다.
2. 계시의 모델들
계시는 복잡한 개념. 다양한 요소들을 조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모델들을 사용함.
이 모델들은 상호 배타적이라고 볼 필요는 없음.
가. 교리로서의 계시
이것은 보수적이고 복음적인 학파, 천주교회의 신스콜라주의 학파 등의 특징.
또한 수정된 형태로 기독교 전통에서 상당한 영향을 행사하고 있다.
복음주의자들은 계시 매개에 있어서 성서의 역할을 강조.
천주교 신스콜라 학자들은 대체로 성서보다 전통, 그리고 특히 교회의 교도권 (teaching office of the church: magisterium) 에 좀 더 무게를 둠.
그런 상황에서 “계시의 보고(deposit of revelation)” “진리의 보고(deposit of truth)” 같은 용어들이 중요함.
이러한 접근에서는 계시는 일차적으로 (배타적은 아닐지라도) 명제적 형태로 생각됨.
이러한 접근은 많은 비판을 받음. (명제들을 모아놓은 것이 조직신학)
특히 post-liberal 신학자 George A. Lindbeck, The Nature of Doctrine.
린드벡은 이러한 견해를 “명제주의적 propositional” 혹은 “인지적 cognitive”이라고 부름.
그것은 계시를 “객관적 현실들에 대한 정보적인 명제들 혹은 진리 주장들”로 봄.
린드벡은 이러한 접근을 주지주의적이며 문자주의적이라 하여 거부함.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객관적 진리를 명확하게, 철저하게, 무시간적으로 명제적인 형태로서 진술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
그러나 하나의 구분이 필요. 하나님에 대한 철저하고 명확한 논의가 계시를 통하여 개념적이고 명제적인 형태로 전달된다는 견해와 교리적 진술들에 순수하게 인지적 요소들이 존재한다는 견해 사이에는 구별이 필요하다.
또한 계시에 대한 명제적 접근이 다른 접근들을 배제할 필요는 없다.
모델들은 상호 배타적이기 보다는 상호 보완적
나. 임재로서의 계시
이 모델은 특히 변증법적 신학자들과 관련된다. (apologetic), dialetic(대화)
그들은 Martin Buber의 대화적 인격주의의 영향을 받음.
신학의 자원에 대한 상당한 논쟁들이 있어 왔다.
기독교 전통에서 보통 4 가지 정도의 자원들이 이야기됨
1) 성서 2) 이성 3) 전통 4) 경험
이 각각이 나름대로 신학에 구별되는 공헌을 한다고 함.
그러나 그에 앞서서 계시에 관하여 논의가 필요.
1. 계시의 개념
하나님의 본성과 목적을 온전히 알려는 인간의 시도가 궁극적으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자연적인 신지식이 가능하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그것은 부분적
결국 (특별)계시가 중요. * 일반계시: 성서 외에 자연에 하나님의 계시가 어느 정도 있다.
1960년대 전통적인 신학적 관념들에 대한 심각한 도전들
그 중에 하나, 계시 이해. 두 가지 쟁점.
가. F. G. Dowing
계시에 대한 현대의 관심은 현대 철학에서 인식론적 쟁점들의 중요성 때문이다.
올바른 지식에 대한 질문들이 부적절하게 신학에 전이되었다는 것.
성경은 지식이 아니라 구원에 관심.
여기에 대한 대답: 성서적 구원 개념은 종종 ‘지식’이라는 말로 표현되고, 인간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의 가능성에 달려 있는 것으로 이해됨.
나. James Barr와 성서학자들
신구약 성서에서 계시라는 주제는 주변적인 중요성
성서에서 계시 언어는 근본적이지도 일관성 있게 나타나지도 않는다고.
대답: 성서 자체의 계시적 언어들에 대한 주의 깊은 고려가 아님.
물론 중세 혹은 근대의 계시 개념들이 신구약 성서 안에 명시적으로 발견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그것들이 성서 안에 없거나 주변적인 것이 아니다.
신약성서에서 계시의 의미가 “지금까지 알지 못하던 하나님을 드러냄”을 뜻하지는 않음이 사실.
일상 생활에서 그 말의 의미는 “무언가 알고 있는 것을 온전히 알게 하는 것”
혹은 “지금까지 모호하거나 분명치 않던 것을 온전히 드러냄”
그러나 신학적 맥락에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그 하나님의 자기계시가 항상 온전함을 함의하는 것은 아니다.(하나님은 계시를 하시더라도 여전히 신비가운데 계신다)
Gerald O'Collins: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계시는 그 인격성들의 완전한 표출이 아니더라도 일어날 수 있다. (하나님의 계시를 알면 하나님의 모두 아는 것은 아니다.)
특히 동방 정교회 전통은 하나님의 계시가 하나님의 신비를 제거하지는 않는다고 강조.
개혁자 루터도 하나님의 계시는 단지 부분적인데,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신뢰할만하고 적절한 것이라고.
그는 “하나님의 감추어진 계시”라는 개념을 발전시킴. (계시하는 하나님은 숨어계시는 하나님이기도 하다)
이것이 그의 “십자가 신학”의 중요한 요점.
계시 개념은 단지 하나님 지식을 수여하는 것 이상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기현시의 의미를 지님.
‘누군가에 대하여 아는 것’과 ‘누군가를 아는 것’은 구분될 수 있다.
전자는 그 사람에 대한 정보 축적이지만, 후자는 그 사람과의 인격적 관계.
발전된 계시의 의미는 단지 한 덩이의 지식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인격적인 자기현시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자기현시의 과정을 통하여 주권을 가지고 역사하심.
그 과정은 나사렛 예수의 역사 안에서 절정과 완성에 도달함.
이점은의 영향을 받은 저자들에 의해 강조됨
Friedrich Gogarten, Dietrich Bonhoeffer, Emanuel Hirsch,
Emil Brunner: 성육신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인격적 자기현시를 볼 수 있다.
2. 계시의 모델들
계시는 복잡한 개념. 다양한 요소들을 조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모델들을 사용함.
이 모델들은 상호 배타적이라고 볼 필요는 없음.
가. 교리로서의 계시
이것은 보수적이고 복음적인 학파, 천주교회의 신스콜라주의 학파 등의 특징.
또한 수정된 형태로 기독교 전통에서 상당한 영향을 행사하고 있다.
복음주의자들은 계시 매개에 있어서 성서의 역할을 강조.
천주교 신스콜라 학자들은 대체로 성서보다 전통, 그리고 특히 교회의 교도권 (teaching office of the church: magisterium) 에 좀 더 무게를 둠.
그런 상황에서 “계시의 보고(deposit of revelation)” “진리의 보고(deposit of truth)” 같은 용어들이 중요함.
이러한 접근에서는 계시는 일차적으로 (배타적은 아닐지라도) 명제적 형태로 생각됨.
이러한 접근은 많은 비판을 받음. (명제들을 모아놓은 것이 조직신학)
특히 post-liberal 신학자 George A. Lindbeck, The Nature of Doctrine.
린드벡은 이러한 견해를 “명제주의적 propositional” 혹은 “인지적 cognitive”이라고 부름.
그것은 계시를 “객관적 현실들에 대한 정보적인 명제들 혹은 진리 주장들”로 봄.
린드벡은 이러한 접근을 주지주의적이며 문자주의적이라 하여 거부함.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객관적 진리를 명확하게, 철저하게, 무시간적으로 명제적인 형태로서 진술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
그러나 하나의 구분이 필요. 하나님에 대한 철저하고 명확한 논의가 계시를 통하여 개념적이고 명제적인 형태로 전달된다는 견해와 교리적 진술들에 순수하게 인지적 요소들이 존재한다는 견해 사이에는 구별이 필요하다.
또한 계시에 대한 명제적 접근이 다른 접근들을 배제할 필요는 없다.
모델들은 상호 배타적이기 보다는 상호 보완적
나. 임재로서의 계시
이 모델은 특히 변증법적 신학자들과 관련된다. (apologetic), dialetic(대화)
그들은 Martin Buber의 대화적 인격주의의 영향을 받음.
본문내용
수 있다.
이 접근은 파울 틸리히의 설교집 <존재의 용기>(The Courage to Be) (1952)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많은 난점이 있다.
인간 역사와 문화를 통해 볼 때 '공통적인 핵심 경험'을 위한 경험적 증거들이 사실상 별로 없다는 것이다.
이 개념은 쉽게 가정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입증이 불가능하다.
2) 해석될 필요가 있는 것으로서의 경험
그리스도교 신학은 경험의 모호성이 해석될 수 있는 하나의 틀을 제공한다.
신학은 우리가 경험의 의미를 잡기 위해 경험 위로 던질 수 있는 그물 같은 것이다.
경험은 그 자체로 해석할 수 있는 무엇이라기보다는, 해석되어야 하는 어떤 것으로 여겨진다.
고전적 예로는 마르틴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을 들수 있다.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은 경험의 역할에 대한 비판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루터는 첫 성 금요일 날 예수의 제자들의 형편이 어떠했을까를 상상해 보라고 제안한다. 그들은 예수를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그들은 살아야 할 모든 이유를 예수에게 걸고 있었다. 예수는 그들의 모든 문제에 대해 해답을 가진 듯 했다. 그런데 그들의 눈앞에서, 예수가 체포되어 공적으로 처형되었다. 하나님은 부재하신 것으로 경험되었다. 어떠한 사람도 그 순간, 하나님이 현존해 계시다는 것을 경험할 방법이 없었다. 예수 자신도 순간적으로 하나님의 부재를 느꼈다.
루터에 의하면, 이러한 사고방식은 경험과 느낌이라는 것을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이끄는 안내자로서 믿기에는 얼마나 부적당한지를 잘 보여준다.
십자가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이 거기에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부활이 그 판단을 뒤집는다. 하나님은 감추어진 방법으로 현존하셨고, 경험은 이 감추인 방법을 부재하심으로 오해했다.
신학은 이 경험이 잠정적이고, 결함 있는 것이고 또 보이는 대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신학은 경험을 더 적극적인 방법으로 해석하도록 허용하기도 한다.
그리스도교의 창조 교리와 죄의 교리 사이의 변증법은, 인간의 불만족감이나 규정되지 않는 어떤 것을 바라는 호기심 같은 경험을 해석하는 데에 사용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인간본성 안에는 하나님과 관계하는 내재적 능력이 있다.
그러나 인간 본성의 타락 때문에, 이 잠재력이 좌절되었다.
다른 것들로 하여금 이 부족함을 채우도록 시도하는 경향이 생겨난 것은 당연한 반응이다. 그리하여 피조된 사물들이 하나님을 대신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들은 만족을 주지 못한다. 그래서 인간은 알 수 없는 어떤 것을 갈망하는, 기다리는 감정을 갖게 된다.
이 현상은 인간 문명이 동 튼 이래로 줄곧 인식되어 왔다.
플라톤은 그의 <대화>(Gorgias)에서, 인간을 물이 새는 그릇에 비유한다.
아우구스티누스: "당신은 우리를 당신 자신을 위해 만들었습니다. 우리 마음은 당신 안에서 쉴 때까지는 휴식을 모릅니다."
마. 경험에 근거한 신학에 대한 포이에르바하의 비판
많은 신학자들은 경험에 근거한 신학을 계몽적 합리주의의 막다른 골목이나 소위 그리스도교 계시의 특수성과 관련된 난점들로부터 도피하게 해주는 수단으로 간주했다.
Schleiermacher의 예. '절대 의존의 감정'의 경험을 근거로 한 신학.
그러나 포이에르바하의 비판.
Ludwig Feuerbach, <그리스도교의 본질> (Essence of Christianity)(1841)의 초판 서문
인간은 그들의 열망, 필요, 두려움 등에 대한 개념을 이상화시켜 이를 구현하는 신들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인간의 '느낌'은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고 순전히 인간에게서 기원한 것이고 과장된 인간의 상상력에 의해 오해된 것이다.
슐라이어마허 식의 신의식이란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포이에르바하의 접근은 그리스도교의 인간 중심적 사고를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비판을 대표한다.
그의 종교 비판은 비유신론적 non-theistic 종교들에는 잘 안 맞음.
또한 바르트의 신학은 포이에르바하 식의 종교비판을 오히려 적극 응용. 외부로부터 오는 계시를 강조.
** 결론
신학의 자료로서 성서, 전통, 이성, 경험 등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성서 해석에 있어서 어느 정도 전통의 역할을 인정할 수 있지만, 전통이 궁극적 표준은 아니다. 교회의 전통 안에 절대화할 수 없는 인간적 요소들이 있다. 전통은 성서에 의해 다시 검증되어야 한다.
성서와 계시 이해에 있어서 이성이 (성령의 조명을 받은 이성, 계시에 순종하는 믿음의 이성) 필요하고, 신학적 진술에 있어서 일관성 있는 이성의 도움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신학이 이야기하는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시는 신비이다. 이성에만 의존하는 신학은 결국 인간 이성이 상상하는 투사물에 불과한 것이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가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이성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성 자체가 신학의 궁극적 표준은 아니다.
신앙은 하나의 종교적 경험이다. 계시도 경험을 통해서 온다. 그러나 사람들의 경험은 다양하고, 특정 경험이 표준이 될 수 없다. 인간의 경험에 의존하는 신학도 역시 인간적 경험에 근거한 상상과 투사에 불과할 것이다.
신학의 근본적인 대상과 자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궁극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 자신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그 계시를 접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성서와 성령의 조명을 통하여서 이다. 그러므로 성서는 실제적인 차원에서 신학의 표준적 자료 역할을 한다.
성경은 하나님 사랑에 대한 증언이다.
성경은 하나님 신앙에 대한 교과서이다.
성경은 하나님 희망에 대한 근거이다.
성경은 하나님 찬양에 대한 악보이다.
성경은 하나님과의 교제의 매개체이다.
성경은 총체적 하나님 배움의 교과서이다. (성경에는 역사가 나오지만 역사책이 아니다. 성경에는 과학적으로 가치있는 내용이 나오기도 하지만 과학책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세계, 그리고 인간에 대한 생활 교범이다.)
이 접근은 파울 틸리히의 설교집 <존재의 용기>(The Courage to Be) (1952)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많은 난점이 있다.
인간 역사와 문화를 통해 볼 때 '공통적인 핵심 경험'을 위한 경험적 증거들이 사실상 별로 없다는 것이다.
이 개념은 쉽게 가정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입증이 불가능하다.
2) 해석될 필요가 있는 것으로서의 경험
그리스도교 신학은 경험의 모호성이 해석될 수 있는 하나의 틀을 제공한다.
신학은 우리가 경험의 의미를 잡기 위해 경험 위로 던질 수 있는 그물 같은 것이다.
경험은 그 자체로 해석할 수 있는 무엇이라기보다는, 해석되어야 하는 어떤 것으로 여겨진다.
고전적 예로는 마르틴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을 들수 있다.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은 경험의 역할에 대한 비판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루터는 첫 성 금요일 날 예수의 제자들의 형편이 어떠했을까를 상상해 보라고 제안한다. 그들은 예수를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그들은 살아야 할 모든 이유를 예수에게 걸고 있었다. 예수는 그들의 모든 문제에 대해 해답을 가진 듯 했다. 그런데 그들의 눈앞에서, 예수가 체포되어 공적으로 처형되었다. 하나님은 부재하신 것으로 경험되었다. 어떠한 사람도 그 순간, 하나님이 현존해 계시다는 것을 경험할 방법이 없었다. 예수 자신도 순간적으로 하나님의 부재를 느꼈다.
루터에 의하면, 이러한 사고방식은 경험과 느낌이라는 것을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이끄는 안내자로서 믿기에는 얼마나 부적당한지를 잘 보여준다.
십자가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이 거기에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부활이 그 판단을 뒤집는다. 하나님은 감추어진 방법으로 현존하셨고, 경험은 이 감추인 방법을 부재하심으로 오해했다.
신학은 이 경험이 잠정적이고, 결함 있는 것이고 또 보이는 대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신학은 경험을 더 적극적인 방법으로 해석하도록 허용하기도 한다.
그리스도교의 창조 교리와 죄의 교리 사이의 변증법은, 인간의 불만족감이나 규정되지 않는 어떤 것을 바라는 호기심 같은 경험을 해석하는 데에 사용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인간본성 안에는 하나님과 관계하는 내재적 능력이 있다.
그러나 인간 본성의 타락 때문에, 이 잠재력이 좌절되었다.
다른 것들로 하여금 이 부족함을 채우도록 시도하는 경향이 생겨난 것은 당연한 반응이다. 그리하여 피조된 사물들이 하나님을 대신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들은 만족을 주지 못한다. 그래서 인간은 알 수 없는 어떤 것을 갈망하는, 기다리는 감정을 갖게 된다.
이 현상은 인간 문명이 동 튼 이래로 줄곧 인식되어 왔다.
플라톤은 그의 <대화>(Gorgias)에서, 인간을 물이 새는 그릇에 비유한다.
아우구스티누스: "당신은 우리를 당신 자신을 위해 만들었습니다. 우리 마음은 당신 안에서 쉴 때까지는 휴식을 모릅니다."
마. 경험에 근거한 신학에 대한 포이에르바하의 비판
많은 신학자들은 경험에 근거한 신학을 계몽적 합리주의의 막다른 골목이나 소위 그리스도교 계시의 특수성과 관련된 난점들로부터 도피하게 해주는 수단으로 간주했다.
Schleiermacher의 예. '절대 의존의 감정'의 경험을 근거로 한 신학.
그러나 포이에르바하의 비판.
Ludwig Feuerbach, <그리스도교의 본질> (Essence of Christianity)(1841)의 초판 서문
인간은 그들의 열망, 필요, 두려움 등에 대한 개념을 이상화시켜 이를 구현하는 신들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인간의 '느낌'은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고 순전히 인간에게서 기원한 것이고 과장된 인간의 상상력에 의해 오해된 것이다.
슐라이어마허 식의 신의식이란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포이에르바하의 접근은 그리스도교의 인간 중심적 사고를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비판을 대표한다.
그의 종교 비판은 비유신론적 non-theistic 종교들에는 잘 안 맞음.
또한 바르트의 신학은 포이에르바하 식의 종교비판을 오히려 적극 응용. 외부로부터 오는 계시를 강조.
** 결론
신학의 자료로서 성서, 전통, 이성, 경험 등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성서 해석에 있어서 어느 정도 전통의 역할을 인정할 수 있지만, 전통이 궁극적 표준은 아니다. 교회의 전통 안에 절대화할 수 없는 인간적 요소들이 있다. 전통은 성서에 의해 다시 검증되어야 한다.
성서와 계시 이해에 있어서 이성이 (성령의 조명을 받은 이성, 계시에 순종하는 믿음의 이성) 필요하고, 신학적 진술에 있어서 일관성 있는 이성의 도움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신학이 이야기하는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시는 신비이다. 이성에만 의존하는 신학은 결국 인간 이성이 상상하는 투사물에 불과한 것이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가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이성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성 자체가 신학의 궁극적 표준은 아니다.
신앙은 하나의 종교적 경험이다. 계시도 경험을 통해서 온다. 그러나 사람들의 경험은 다양하고, 특정 경험이 표준이 될 수 없다. 인간의 경험에 의존하는 신학도 역시 인간적 경험에 근거한 상상과 투사에 불과할 것이다.
신학의 근본적인 대상과 자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궁극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 자신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그 계시를 접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성서와 성령의 조명을 통하여서 이다. 그러므로 성서는 실제적인 차원에서 신학의 표준적 자료 역할을 한다.
성경은 하나님 사랑에 대한 증언이다.
성경은 하나님 신앙에 대한 교과서이다.
성경은 하나님 희망에 대한 근거이다.
성경은 하나님 찬양에 대한 악보이다.
성경은 하나님과의 교제의 매개체이다.
성경은 총체적 하나님 배움의 교과서이다. (성경에는 역사가 나오지만 역사책이 아니다. 성경에는 과학적으로 가치있는 내용이 나오기도 하지만 과학책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세계, 그리고 인간에 대한 생활 교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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