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와 우리나라와의 관계!!!
본 자료는 8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해당 자료는 8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8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중국의 역사와 우리나라와의 관계!!!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불가사의한 중국의 통일]

중국은 비록 산악 지대가 적고 광활한 평야 지대가 뻗쳐 있어서 유럽에 비해 상대적으로 통일하기가 쉬웠다고도 할 수 있으나,
그렇게 광대한 지역이 BC221년 이후 위진남북조 시대와 5호16국 시대(AD220~589), 그리고 제2의 남북조 시대(송과 요, 금)를 제외하고는
이민족의 지배(원과 청)를 포함하여 기나긴 세월 통일 왕조를 유지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내 개인 생각에 이것은 세계사에서 7대 불가사의의 한참 위에 노니는 으뜸 불가사의가 아닐까 한다.


[만리장성의 의미]

중원을 통일한 진시황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만리장성을 쌓아 이민족이 쳐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영원히 전쟁을 종식하려는 의도였다.
이 당시 만리장성을 북동쪽에 세웠다는 것은 그 쪽에 중국 사서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강대한 세력이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알려준다.
그러나 천하를 놓고 자웅을 겨룰 정도는 아니었다고 본다.
이것은 후에 중원의 대제국이 천둥같이 꾸짖었건만 눈 하나 깜박 않고 빤히 쳐다보다가 천둥이 제풀에 잦아질 즈음에 가볍게 코방귀를 날리던 고구려를, 수·당이 발끈하여 중원의 총력을 기울여,
벼락같이 연이어 침략했던 것과 비교해 보면,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지 않을까 한다.

만약 수백 년 만에 탄생한 중원의 대제국을 위협할 강국이 존재했다면
언제라도 천자의 위엄이 한갓 허풍에 그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만 내버려 둘 수가 없었을 것이다. 정복 전쟁을 계속했을 것이란 말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이미 중원을 확보한 것으로 진시황은 만족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500년 간의 전쟁과 분열(BC770~221)을 종식하고 중원에 평화와 통일을 가져온 것으로 그는 크게 만족했다고 본다.

[중국의 재통일(漢)과 삼국의 번영]

진시황의 사후 짧은 내전을 겪은 후 그 치세가 장장 400년간 지속됨으로써 중국의 정체성(identity)을 확보한 대제국 한(漢)이 건설되는데,
이 때 문무를 겸비한 한무제(재위 BC141~BC87)는 행정과 경제를 쇄신하고 활발한 정복 전쟁을 일으킨다.
16차에 걸친 대대적인 원정에도 불구하고 끝내 흉노족을 굴복시키진 못했지만, 한의 강역은 동서남북으로 한껏 넓혀진다. 이 때의 강역이 중국인의 마음에 깊이 새겨져 있다.
(중원은 397만㎢로 현재 중국의 40% 정도)
이 때 벼락을 맞은 곳이 요하 근방의 고조선이었다.
1년간의 전쟁 끝에 BC108년에 고조선이 멸망한 것이다.

한사군이 한반도까지 진출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많으나,
이 때 우랄-알타이어를 쓰는 고조선의 종족이 차이나-티베트어를 쓰는 한의 종족에게 쫓기어
북쪽으로 동쪽으로 남쪽으로 흩어지면서 작은 나라를 세웠던 듯하다.
부여, 동예, 옥저, 마한, 진한, 변한 등이 이 때 서서히 커지지 않았나 한다.

한이 그 수명을 다하고 중국이 내란의 소용돌이에 빠져들면서 요동, 요서, 만주, 한반도의 중소 왕국들은 그 힘이 부쩍 부쩍 커지기 시작한다.
AD180년경부터 중원의 한은 이미 그 수명을 다하고 수많은 독립국들이 난립하게 되었다.
이 혼란 상황은 아주 길어서 이전의 통일의 시대와 그 기간이 거의 같았다.
바로 위진남북조, 5호16국 시대로 그 분열 상태가 무려 400년간 지속된다.
이 기간에 중원의 인구는 오히려 줄어 들었다.
공식 기록에 따르면 AD2년 전한 말기의 인구가 6천만이었지만,
AD606년 수의 인구가 4천6백만이다. 한나라의 인구는 당의 전성기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만리장성 동쪽은 이 사이에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삼국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마침내 AD589년 수나라가 중원을 통일했을 때, 거의 이 대제국과 자웅을 겨룰 만한 나라가 버티고 있었으니 그 나라가 바로 고구려였다.
중국의 분열은 결과적으로 한민족의 발전을 방조한 셈이다.

[수·당과 고구려의 70년 세계대전]

수·당과 고구려는 장장 70년에 걸쳐(AD598~668) 대전쟁을 벌이게 된다.
이건 그 어떤 전쟁보다 치열했던 세계대전이었다.
중국의 한족이 이 때보다 창칼이 예리했던 적은 없고 동북아의 조선족도 이 때보다 화살이 빠르고 방패가 튼튼했던 적은 없다. 건곤일척의 전쟁을 한두 번도 아니고 수십 번 되풀이했다.

그 후유증으로 400년 만의 최강국, 삼국 시대의 위·오·촉을 다 합한 것보다 팔뚝이 굵었던 수가 망했다. 그 황제는 실성을 해서 정사를 전혀 돌보지 않고 황음을 일삼다가 암살 당했다.
중원은 다시 내란 상태에 빠진다.
그러나 이내 중국사 4000년이 배출한 MVP 군주 당태종이 혜성같이 등장하여 태양같이 군림한다.

이 당 태종마저, 돌궐족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다가 후에 힘을 비축해 그 돌궐족을 초토화시켰던 이 당 태종 이세민마저 고구려에겐 씻을 수 없는 모욕을 당하고, 만사에 의욕을 상실하고 화병으로 끙끙거리다가 '절대 고구려와 맞대결하지 말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친정(親征) 후 4년 만에 연부역강(年富力强)한 나이인 52세에 죽는다(AD649).

본문내용

갑자기 일본이 조총을 앞세워 동아시아 역사를 새로 쓰려고 덤벼들었다. 명이 망하고 조선이 허덕였다.
마침내 동아시아에서 아무런 영향을 못 미치던 일본이 가공할 힘을 보여 주는 순간이었다.
먼 훗날을 예약하는 순간이었다.
이 때 만주 벌판에서 명의 국경 지대에서 쓸개도 없는 듯이 이 편 저 편을 오가며 아버지 원수도 극진히 섬기며 모피 장사하던 여진족의 한 젊은이가 어느 날 느닷없이 어깨에 걸쳤던 짐승 가죽을 내던지고 갑옷을 차려 입고 변발 위에 투구를 단단히 동여 쓰고 칼을 휘두르며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거대한 명이 무너졌다.
그 후로 동아시아의 네 나라는 세 나라로 바뀌었다.
여러 번의 대전쟁 후에도 조선은 왕조를 바꾸지 못해, 젊은 피를 수혈 받지 못해 나날이 쇠퇴했다.
300년 후 전혀 뜻밖에도 일본이 바다를 건너온 자들로부터 과학기술을 배우더니, 불과 30년 만에 동아시아를 게다 소리와 군홧발 소리로 가득 차게 만들었다.
그 게다 소리를 몰아낸 것은 만 리 밖의 나라와 북방의 나라였다.
동아시아의 역사 무대에 마침내 미국과 소련이 강력한 입김을 불어넣기 시작한 것이다. 혼란을 거듭하던 중국이 마침내 몸을 추스르기 시작할 무렵 자체 힘이 너무 미약하여 두 초강대국에 의해 분단된 한국은 일본보다 100년 늦게 과학기술과 시장경제를 받아들여 비약적으로 발달한다.
북한은 과학기술은 받아들였으나 시장경제를 거부하는 바람에 경이적인 초기 발전이 흔적 없이 사라지고 뼈(군사력)만 앙상하게 남게 되었다. 중국은 한국보다 17년 늦게 과학기술과 시장경제를 받아들여 이를 중화사상과 공산주의에 접목했다. 서양을 이기려면, 알량한 자존심을 버리고 과학기술을 배워야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1950년대와 1960년대 초에 재능 있는 젊은이들이 대거 공대와 자연대로 진학했다. 이들이 1990년대에 전중국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이들은 현재 전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정치집단이다.
이들은 청의 팔기군에 비견할 수 있다. 동아시아를 무인지경으로 달리던 청의 팔기군 손에 칼 대신 붓이 잡혀 있다고 생각하면 이들의 가공할 힘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선거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이들은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안정적으로 향후 수십 년간 일관성 있게 중국을 통치하게 되어 있다. 나는 이 중국의 지도자들을 20세기 마지막 10년과 21세기초 중국 최대의 자산이라고 본다. 1980년대는 등소평 한 사람의 카리스마로 개혁개방을 이끌었지만, 1990년대 이후는 이들이 우르르 그 뒤를 이어 받았다. 강택민, 주용기, 오의, 호금도, 온가보 ...
[한국의 사상 대립]
삼천리 금수강산은 무엇보다 사상의 혼란이 극심하다. 한쪽은 강요된 사상으로 획일화되어 있고 한쪽은 자유민주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봉건주의, 주체사상, 조합주의; 과학기술 우위론, 인문주의; 단군 사상, 기독교, 유교, 불교가 뒤섞여 서로가 서로를 용납하지 못하고 격렬하게 싸운다. 갈등이 갈수록 심화된다.
집권자가 바뀔 때마다 사상을 조화시키는 게 아니라 어느 한 생각을 추종자들의 아첨을 후광 삼아 집권자의 권력으로 밀어붙이거나 이해관계에 의해 갈팡질팡하기 때문에 오히려 갈등을 심화시킨다. 포용력이 없다. 모두를 녹여 새로운 강철이나 특수강을 만드는 용광로가 없고 바르르 끓었다가 금방 싸늘하게 식는 냄비만 있다.
[중국의 통일과 한국의 통일]
중국의 통일과 혼란, 분열은 한국에게 복도 되고 화도 되었다. 문무가 조화를 이루고 위정자와 국민 사이에 언로가 사통오달 트여 있으면, 만만찮은 힘을 갖게 되어 중국의 통일도 좋고 혼란도 좋고 분열도 좋았다.
우리 선조들의 중국에 대한 굳센 저항으로 중국은 후대로 내려오면서 사대외교라는 끈으로 서로가 내정간섭을 않고 평화롭게 사는 길을 택했다.
중국의 통일과 한국의 통일은 삼국통일 이후 시기가 일치하는 수가 많아졌다.
단, 중국은 그 기간이 한국보다 대체로 반(260년) 정도여서 한국의 야성이 약화되어 중흥이 필요한 시점(고려 중기와 조선 중기)에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일본의 영향력]
조선 중기 이후 일본이 동아시아의 역사의 한 축을 이루었다. 중국과 조선이 왕조 말기 증상으로 허덕이고 있을 때, 태평양을 건너 해양세력이 몰려 왔다.
태평양의 조각배같이 작은 섬나라 일본이 이 가공할 해양 세력을 즉시 모방하여 아시아 역사 원동력이 되었다. 한국과 중국은 영원히 잊지 못할 치욕을 겪었다.
[태풍의 눈]
현재는 소강 상태이다. 일본이 하강하고 중국이 부상한다. 해양세력 미국이 세 나라 중에서 제일 약한 한국의 후원자로 위태롭게 세력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중국의 힘이 더 커지고 북한의 힘이 더 약해지면, 새로운 세력 균형을 위한 격변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남북이 자주적으로 통일하면 제일 좋은데, 생각의 차이가 너무 크다. 남남 갈등은 위험 수위이다. 거의 내란 수준이다. 총만 안 들었을 뿐.
중국이 더 커지기 전에 격변이 일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지금은 역사적 대전환기이다. 동아시아는 지금 태풍의 눈에 들어가 있다.
태풍과 더불어 삼국이 과연 솥발처럼 굳건히 설 것인지.
20세기 후반 동아시아에서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던 해양 세력 미국과 북방 세력 소련이 끼어 들면서, 동아시아의 역학 구도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띠게 되었다.
한편 비록 정치력과 군사력은 이들 두 나라에게 빼앗겼으나 일본은 작은 세계 3차 대전 이후 경제력으로 한국과 동남아시아를 앞마당으로 만들었다.
중국은 그 사이 제 몸을 간신히 추스르다가 마침내 긴긴 시행착오 끝에 기지개를 켜고 용틀임을 시작했다. 중국은 일본과 달리 경제력, 군사력, 정치력, 문화력까지 갖추게 된다. 남북한을 사이에 두고 미국과 중국의 힘이 불꽃 튀는 순간이다. 남북한도 그리 만만히 볼 수 없는 힘이 있다.
불행히도 이 힘을 결집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남북 어느 쪽도 광개토대왕과 을지문덕의 고구려, 김유신과 김춘추와 원효의 신라, 서희와 강감찬의 고려, 세종과 이순신의 조선처럼 열강의 힘을 도리어 국난 극복과 국가 통합의 지렛대로 이용하지 못하고 있다.
  • 가격3,000
  • 페이지수23페이지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09.0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90794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