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가야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신라에게 망하여 가야금만 남긴 약한 문명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만일 이 질문에 고개를 끄덕인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식민사관이나 신라 중심 역사관의 선입견에 물들어 있지 않은가 의심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얼마 전까지 고대사를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과 통일신라로 이해해 왔다. 이는『삼국사기』로 인해 신라 중심의 역사관이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이 큰 고비를 겪을 때마다, 고대사에 대한 인식은 확장되어 왔다. 몽고 침략의 시련 속에서『삼국유사』는 고조선, 발해, 가야의 역사를 발견했다. 연표에서 가야를 포함해 사국( 國)을 대등하게 썼고, 고조선이 한국 고대사에 들어왔다. 조선의 개국은 그렇게 확장된 역사 인식의 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조선 후기 실학자들은 가야사와 발해사를 되살려 낸다. 안정복은 우리의 고대사를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사국 체제’로 보아야 한다 주장했고, 정약용은 가야가 해운의 이점을 이용할 줄 알아 신라보다 앞서 발전하였다고 했다. 이러한 역사 인식이 계속 이어졌다면, 우리는 근대 이행 과정에서 보다 조화롭고 광대한 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이 시작되면서, 가야사는 임나사로 악용되는 암흑기에 처한다. 『일본서기』를 연구하는 일본 국학자들은 가야, 즉 임나(任那) 지역은 일본의 직접 지배를 받았으며, 삼국은 일본에 조공을 바치는 속국에 지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런 역사 인식은 일제시대 역사 교과서에 수록되어 한·일 양 국민에게 교육되었고, 1940년대에 스에마쓰 야스가즈(末松保和)의 『임나흥망사』라는 책으로 정리된 이후로는 고대 왜국, 이른바‘야마토(大和) 조정(朝廷)’이 369년부터 562년까지 임나를 지배하였으며, 이를 토대로 신라와 백제를 간접 경영하였다고 약간 축소된 채 내려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학계에서는 이런 설들을 극복하기 위한 가야사에 대한 연구도 부족했고, 심지어 이 문제를 덮어두기까지 했다. 문헌을 비롯한 고고학 자료들이 가야의 독자성을 보여 주는데도, 우리는 수 세대 동안 6가야 연맹체에 대한 허구적 지식만 답습해 왔다. 1970년대 후반 가야 지역에서 수많은 고대 유물이 발굴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우리 손에 의한 가야사 연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얼마 전까지 고대사를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과 통일신라로 이해해 왔다. 이는『삼국사기』로 인해 신라 중심의 역사관이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이 큰 고비를 겪을 때마다, 고대사에 대한 인식은 확장되어 왔다. 몽고 침략의 시련 속에서『삼국유사』는 고조선, 발해, 가야의 역사를 발견했다. 연표에서 가야를 포함해 사국( 國)을 대등하게 썼고, 고조선이 한국 고대사에 들어왔다. 조선의 개국은 그렇게 확장된 역사 인식의 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조선 후기 실학자들은 가야사와 발해사를 되살려 낸다. 안정복은 우리의 고대사를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사국 체제’로 보아야 한다 주장했고, 정약용은 가야가 해운의 이점을 이용할 줄 알아 신라보다 앞서 발전하였다고 했다. 이러한 역사 인식이 계속 이어졌다면, 우리는 근대 이행 과정에서 보다 조화롭고 광대한 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이 시작되면서, 가야사는 임나사로 악용되는 암흑기에 처한다. 『일본서기』를 연구하는 일본 국학자들은 가야, 즉 임나(任那) 지역은 일본의 직접 지배를 받았으며, 삼국은 일본에 조공을 바치는 속국에 지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런 역사 인식은 일제시대 역사 교과서에 수록되어 한·일 양 국민에게 교육되었고, 1940년대에 스에마쓰 야스가즈(末松保和)의 『임나흥망사』라는 책으로 정리된 이후로는 고대 왜국, 이른바‘야마토(大和) 조정(朝廷)’이 369년부터 562년까지 임나를 지배하였으며, 이를 토대로 신라와 백제를 간접 경영하였다고 약간 축소된 채 내려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학계에서는 이런 설들을 극복하기 위한 가야사에 대한 연구도 부족했고, 심지어 이 문제를 덮어두기까지 했다. 문헌을 비롯한 고고학 자료들이 가야의 독자성을 보여 주는데도, 우리는 수 세대 동안 6가야 연맹체에 대한 허구적 지식만 답습해 왔다. 1970년대 후반 가야 지역에서 수많은 고대 유물이 발굴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우리 손에 의한 가야사 연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본문내용
문화, 가야의 해운 상업 능력, 가야의 높은 농업 생산성 등은 정치적으로 중앙집권적 체제를 완성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오랫동안 존속케 하였다. 결국 그 힘은 고대 일본문명의 개화와 신라의 삼국 통일에 원동력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이 짧은 지면이 가야의 문화에 대한 관심과 가야의 깊고 넓은 영향력에 대한 울림을 이끌어 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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