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독교 교회사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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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 기독교 교회사 요약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있다는 계산 하에 무역을 하다가 파산한 것이다. 류형기 목사는 이에 대한 책임도지지 않고 무어 감독의 변호 발언으로 다시 감독직에 머물러 반대파의 불만을 촉발시켰다.
그 반발로 반대 세력들은 1955년 3월 3일 호헌파 감리교회를 태동시켰다. 양측의 대립은 교회 재산권문제가 있어 세상 법정에까지 가는 일이 생겼다. 그 이후 연합의 노력으로 1959년 3월 17일, 정동 제일교회에서 양측이 합동으로 연합회의를 개최하여 역사적인 감리교 연합을 이루었다.
2. 성결교의 신학적 대립과 분열
해방 후 교회재건을 이룩한 한국성결교회는 NCC에 적극 참여했다. 1953년에는 성결교회의 김창근 목사가 NCC 회장에 피선되기도 했다. 그러다 W.C.C.가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한국 NCC에 가입한 교단들 내에 신학적 갈등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처음 이 문제가 표출되었던 장로교에 이어 성결교회 역시 서서히 신학적 대립이 발생했다. 세계교회연합을 추구하는 W.C.C.는 교리적인 면에서 복음주의협회(NAE)나 성경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다는 성경의 무오성 교리를 비롯한 7개 전통적인 신앙고백을 명문화시키고 있는 세계복음주의협의회(WEF, World Evangelical Fellowship)와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한국성결교회의 분열도 NCC와 NAE 사이의 시비로 발생된 것이다. 광복 뒤에 성결교회가 한국 NCC에 가입하였고, 한국기독 교연합회[NAE]에도 가입하였었다. 이리하여 한 교단이 노선이 다른 두 단체에 가입했다. 그리하여 그것이 교단 분열의 원인이 된 것이다.
1962년 1월 13일 O.M.S.의 총리 유진 어니 박사가 내한해 보수 측의 이명직 목사를 비롯한 양측의 대표자들을 만나 연합을 권유했으나, 끝내 성결교회는 기성과 예성으로 분열되고 말았다.
3. 주류로 편입하는 침례교회 : 재건, 발전, 그리고 분열
1944년 5월 10일, 일제에 의해 강제적으로 교단이 해체되었던 동아기독교(침례교)는 해방과 더불어 교단을 재건하고 미국 남침례교와 교단 제휴를 맺으며 새로운 도약을 시도했다. 어느 교단보다도 일제의 혹독한 해를 받아 교단의 와해 위기에 직면했던 동아기독교는 김용해, 노재천, 석천 목사가 중심이 되어 교회 재건운동을 펼쳐나갔다.
선교 지향적인 순회 선교회의 단체에서 목회 지향적인 개교회 중심의 교단 조직으로 개편한 것이다.
미국 남침례교의 지원과 한국침례교의 도약
도약의 채비를 갖추기 전 한국침례교회는 6.25전쟁을 만나 엄청난 교단적 손실을 경험해야 했다. 특히 미국 남침례교회의 지원이 없었다면 한국침례교회는 전쟁 속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의료선교사인 브라이언은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2월 부산 남포동에서 한국인 의사 1명과 두 명의 간호사와 천막 진료사역을 시작했다. 이것이 부산침례병원의 시작이었다.
미국 남침례교회 출신 세계적인 부흥사 빌리 그레이엄(Billy raham)의 방한과 대전 집회, 그 이듬해의 남침례교 신학교 학장 맥콜(Duke K. McCall) 박사의 방한은 한국침례교회 목회자들과 교인들에게 대단한 자긍심과 긍지를 심어 주었다.
침례회신학교는 1954년 7월 7일 문교부로부터 정식으로 신학교 승격인가를 취득하고 나요한 선교사가 교장에 취임했다.
새로운 도약을 위한 진통: 선교회와 교단의 갈등과 분열
침례교의 분열은 한국남침례교 선교회와 한국침례교회와의 대립으로 표면화되었지만 실제로 그 출발은 안대벽의 독주에서 출발했다. 1959년에 접어들면서 총회의 교권주의자들과 선교회와의 대립과 갈등은 안대벽을 중심으로 한 교권주의 주류와 장일수를 중심으로 한 비주류파로 나뉘었다.
교권을 주도하는 주류파는 총회가 전도부장으로 선출한 안대벽을 선교회가 불신임한 것을 곧 총회에 대한 불신임으로 해석했고, 이것이 침례 교단의 분열의 신호탄이었다. 또한 선교회 실행위원회의 과감한 결정으로 그 동안 교단 안에 일고 있던 주류파와 비주류파의 대립이 수면위로 부상하면서 교단은 양 진영으로 뚜렷이 대별되었다.
대전 총회는 비주류파, 포항 총회는 주류파가 이끌었다. 1959년의 분열은 신학적 문제나 신앙노선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총회의 주류파 대 선교회 및 비주류파 간의 인간적 불신임과 정책 갈등에서 비롯되었으며, 보다 근원적인 것은 교권을 둘러싼 파벌 쟁패의 원인이 된 몇몇 사람들로 기인한다.
맺는 말
교회사에는 결론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통치는 역사가 종결될 때까지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1910년부터 1960년대의 한국 기독교회사 연구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복음의 정체성을 유지해 오던 한국교회가 1930년대에 들면서 뚜렷한 신학적 변천을 맞았다. 장로교나 성결교는 선교사들이 전해준 복음에 충실하려고 한 반면, 감리교는 사회복음으로 선교의 방향을 전환하였다.
둘째, 1930년대의 한국교회의 신학적 변천과 변화는 그 후에 찾아 온 신사참배의 도전 때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 신앙의 순수성을 주창한 이들은 신사참배의 강요에 순교적 신앙으로 맞섰고 신앙의 변천을 추구했던 이들은 너무도 쉽게 타협의 길로 접어들었다.
신사참배반대 운동은 진정한 기독교 민족주의가 무엇인지 몸으로 보여 주었고, 바른 신앙이 바른 행동을 결정한다는 역사적 진리를 보여주었다. 신사참배 문제는 신앙의 시금석이었다.
셋째, 지금까지 복음주의신앙과 정신, 곧 복음전파, 복음의 순수성, 그리고 복음의 대 사회적, 문화적, 민족적 책임은 한국교회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논제이다.
1920년대와 625전쟁 이후 수많은 이단들이 발흥한 것은 바른 신앙교육, 성경적 가르침의 부재에서 찾을 수 있다. 현상적이고 이타적이고 기복적인 신앙의 형태를 추구할 때 종교적 혼란에 빠지기 쉽다.
마지막으로, 1960년대 이후 한국교회는 걸어 온 길을 반성하고 앞으로 방향성을 모색하는 정체성 파악의 시대를 맞았다. 주된 요인은 좀더 폭넓은 현대사회와 문화에 조정하려는 에큐메니칼 운동 지지자들과 전통적인 신앙을 계승하려는 이들 사이의 견해차에서 비롯되었다.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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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40페이지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09.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92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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