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적 NGO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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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진보적 NGO 대하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라는 이념은 노동운동이 공장문을 벗어나 광범위한 사회경제적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기득권의 수호자가 아니라 '정의의 칼'(sword of justice)이라는 노동조합 고유의 역할이 숨어있다.


"전투적 경제주의에서 공공서비스노조주의로: 발전노조 파업에 대한 평가" 라는 제목으로 지난 여름, 『창작과 비평』에 실린 필자의 글(박태주, 2002)은 많은 비판을 불러일으켰다(김승호, 2002; 김상곤, 2002; 오건호, 2002). 뿐만 아니라 공공서비스 노조주의가 암묵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는 일찍부터 논쟁의 대상이 되어오기도 했다(최근의 글로서는 김동춘, 2001; 박영균; 2001; 니어리, 2001. 참고). 먼저 필자가 『창비』에서 밝힌 주장의 대강은 이러하다: 공공서비스 노동조합은 분배우선의 경제적 투쟁에서 벗어나 공익(public interests)을 중요시하여야 하며 이를 바탕으로 시민사회단체와 연대를 형성하여야 한다; 이를 38일간에 걸친 발전노조의 파업에 견주어보았을 때 이는 초기적인 형태나마 공공서비스 노조주의를 드러내고 있다. 또한 이러한 공공서비스 노조주의가 민간 영역으로 번져갈 경우에는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1)의 개화를 알리는 신호탄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보태었다.[주1. 실제로 예를 들어 존스톤(P. Johnston, 1994)은 공공부문에서의 이러한 노선까지를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라고 부르고 있다.]
필자의 이러한 주장에 대한 비판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전투성에 대한 부당한 폄하라는 지적이다. 두 번째는 그것이 탈계급적이라는 것이며 마지막으로는 그 논리적 귀결로서 '신자유주의적 코포라티즘 기구'에 지나지 않는 노사정위원회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일정 부분은 사실이나 부분적으로는 글읽기의 문제도 곁들여지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이 글에서는 이를 순서대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어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가 오늘날 사회적으로 주변화되면서 잊혀져 가고 있는 노동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음을 보일 것이다.

노조의 전투성에 대한 폄하?
결론적으로 말하면 필자는 이 글에서(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지만) 노동조합의 전투성을 부정한 적이 없다. 전투성이란 노사간 이해관계의 불일치를 전제로 한다면, 그리고 노동조합에 대한 폭력적인 억압이 일상적이라면 불가피한 것이다. 더욱이 이번 발전노조의 파업에서 맹아적인 형태나마 사회적 연대를 이룰 수 있었던 그 밑바닥에는 발전노조원들의 끈질긴 투쟁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를 필자는 이렇게 표현하였다.


이번 파업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조합원의 38일 간의 흔들림 없는 산개투쟁이었다. 그러나 공공서비스 노동조합주의의 관점에서 볼 경우 관심을 끄는 것은 발전소 매각철회라는 공공적 요구 및 조합원의 끈질긴 미복귀 투쟁만은 아니다. 발전노조의 투쟁은 민주노총을 축으로 하는 연대파업과 결합하는 한편 보다 중요하게는 사회시민단체와 결합함으로써 발전회사의 매각을 사회적 의제로 만드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즉 '노동조합의 전투성을 바탕으로 한 사회적 연대의 형성'(강조 필자)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런데도 이를 '저항의 포기'라고 비판하는 것은 필자의 글을 제대로 읽지 않은 탓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물론 필자는 노조의 '기존의 전투성'에 문제가 없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전투성이 임금인상이나 고용조건의 개선과 같은 경제적 목표의 달성에 묶여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그것이 실질적인 투쟁이 아니라 선언적이거나 수사적인 투쟁에 그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는 대부분의 투쟁이 기업차원에 머묾으로써 정치사회적 영향력을 얻지 못하고 있기도 하다. 다시 말해 필자는 경제주의에 매몰된 작업장의 전투성(econonmistic workplace militancy)을 비판하는 것이지 전투성 그 자체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회적 논의의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를 발현시키기 위해서도 노조의 전투성은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계급중심성의 상실 혹은 탈계급적?
사회운동적 노조주의가 탈계급적이라는 비판에 대한 반론은 니어리(M. Neary, 2001)의 글에서 시작하는 것이 적절할 것으로 보인다. 김상곤(2002)의 비판은 주로 이 글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니어리는 맑스주의 사회이론을 분석의 기초로 삼아 "인간사회의 진보적 변혁은 노동이 그 자신의 의지로 혹은 다른 제도들과의 연계를 통해서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이 변혁은 노동의 폐지, 그리고 노동이 구성되는 사회의 폐지에 달려있다"라고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는 계급관계의 폐절이라는 계급정치의 장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가 탈계급적이거나 계급중심성을 상실했다는 비판은 사실이다. 이는 노동조합의 목표와 관련된다. 노동조합이 혁명의 도구이며 이를 통해 사회주의의 건설 - 자본주의의 폐절을 목표로 한다면 공공서비스 노조주의 또는 사회운동적 노조주의는 결코 적절한 수단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노동조합을 노동계급의 집단적인 투쟁을 위한 기구로 보았지만 노동조합은 계급적인 이해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편협한 직업적 이해'에 따라 분열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는 노동조합이 연대의 표현이자 동시에 산업별·직업별·기업별로 조직됨으로써 분열의 상징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사회운동적 노조주의는 노동조합을 혁명의 도구로 바라보는 것도 부정하지만 동시에 '직업적 이해조직'에 머물러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는다. 사회에 대해 발언하고 책임을 지는 것이 사회통합의 실현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그것이 '집단적인 전통의 담지자'로서 노동조합이 담당해야할 일이라고 보는 것이다.

본문내용

루어진 조직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회적 연대를 형성하자면서 계급적 관점을 요구하는 것은 시민사회단체와 연대를 포기하라는 주장에 다름아니다.
노동조합과 사회단체의 연대는 노동조합이 그렇게 할 의지가 있는가하는 문제일 뿐 아니라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이 경우 제기되는 물음은 어떠한 조건에서 이러한 연대가 일어나며 이 경우 누구의 목소리가 주도적인가 하는 점이다. 먼저 연대는 항상적이기 보다는 이슈중심적이라는 사실이며 두 번째는 이러한 연대의 형성에서 노동조합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신의 조직정체성에 대한 집착은 자신의 운동이 다른 그룹의 투쟁보다 더욱 중요하다는 쇼비니스틱한 태도를 낳을 수 있다는 점이다2).[주2. 이러한 점에서 이는 "사회운동적 노동운동에서 ... 노동조합은 정치에서와 마찬가지로 거리에서 적극적인 지도력을 발휘한다. 그들은 다른 사회운동과 연대하나 계급적인 전망을 제공한다"라고 하며 계급적인 사회연대와 노동조합의 주도성을 주장하는 무디(K. Moody)와는 구별된다.] 즉 반드시 노동조합이 주도성을 행사하여야 한다면 이 역시 연대의 걸림돌이 될 뿐이다. 사회적 연대는 서로의 이해관계의 공통성을 바탕으로 할 뿐이기 때문이다. 노동조합과 시민사회단체의 관계는 수직적이 아니라 수평적이며 그것은 민주적이어야 한다. 보다 중요하게는 워터만(Waterman, 1999)이 말하듯이 네트워크이며 이러한 생각은 무엇보다도 다원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새로운 국제적 지구적 사회운동을 위한 전형적인 조직형태는 조직이라기보다는 네트워크에 가깝다. … 그룹들 사이의 일시적 연합과 장기적인 동맹을 포함하는 일국적, 국제적 네트워킹이라는 사고는 수직적이라기 보다는 수평적인 조정(horizontal coordination)에 관련된 것이며 종속, 규율, 충성, 신념이 아니라 공유된 필요와 가치에 의해 한데 묶인 무언가이다. 따라서 조직적/정치적 모델은 점차 네트워킹/통신모델로 대체되고 있다3).[주3. Hyman(1999a)은 이를 유기적 연대(organic solidarity)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기계적인 연대(mechanical solidarity), 즉 위계에 바탕을 둔 경직된 조직체계가 아니라 차별화되고 독립적인 조직들간의 유연한 조정(flexible coordination)을 강조하는 것이다.]
결론: 사회통합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노동조합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라는 이념은 노동운동이 공장문을 벗어나 광범위한 사회경제적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기득권의 수호자가 아니라 '정의의 칼'(sword of justice)이라는 노동조합 고유의 역할이 숨어있다. 이 과정에서 노동조합은 사회통합을 위한 수단으로 나타날 것을 요구받는 것이다. 즉 노동조합은 스스로의 경제적 이익은 물론이거니와 이슈의 확대를 통해 사회적 이해관계의 대표자로서 사회복지의 향상과 사회적 통합에 노력하여야할 것이다. 그리고 그 수단으로서 노동조합에게는 사회적 연대의 형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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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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