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와 설교> - 로이드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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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목사와 설교> - 로이드존슨!!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제1장 설교의 우위성

설교사역이란 로이드 존스에게 있어서 어떠한 소명보다도 가장 높고 위대하고 영광스런 소명이었으며, 그는 오늘날 기독교회의 가장 절실한 요구는 진정한 설교이며, 그것은 역시 명백하게도 세상이 가장 크게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설교가 오늘날 폄하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 볼드윈이즘(Baldwinism)은 스텐리 볼드윈(Stanley Baldwin)이라는 사람이 정치적 전략으로 연설과 웅변의 가치와 중요성을 낮추고 단순하고 평이하고 정직한 진술을 화려한 웅변과 말보다 앞세워 20대에 수상을 하게된 비법이었는데, 이는 정치가들 사이에서 뿐 아니라 교회에까지 파급되었던 사상이다. 현대인은 문화와 교육의 혜택으로 위대한 웅변가가 필요했던 과거의 사람들과 달리, 스스로 필요한 정보와 진리를 추구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 그러나 세상의 일반 역사는 역사를 참답게 이룩한 사람들은 말할 줄 알았고 메시지를 전할 줄 알았으며 자기들이 산출해 낸 효과적인 결과로 민중들을 행동케 했던 위인들이었다는 것을 아주 명확하게 나타내고 있다.

② 성경의 권위에 대한 신뢰심 상실과 진리에 대한 신앙의 감소가 그 원인이 되겠다. 위대한 설교는 위대한 주제에 달려 있으므로, 사람들이 성경을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그 권위에 입각해서 말하는 동안에는 위대한 설교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사색하고 논리화하고 억측을 부리게 되면 웅변이나 구변의 위대성은 여지 없이 하향 길을 걷게 되고 쇠퇴하는 법이다. 에드윈 해치는 말한다. "역사를 좀더 가까이 바라보면 수사학이 철학을 죽였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철학이 죽은 것은 단지 아주 적은 소수로 인해 그것의 참된 것이 정지를 당했기 때문이며, 사상과 행동의 영역에서 해석과 문학의 영역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즉 형식이 알맹이보다 더 중요시 되고 웅변과 능변이 그 본질로 간주된 설교가 오락거리 이상일 수 없었다.

③ 설교집의 발행도 한 원인이다. 문학적인 재질을 부여 받은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강조점을 메시지의 진리성에서 문학적 표현으로 옮긴 설교집들은 설교자들을 수필가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④ 설교의 퇴색은 예배의 의식적 요소를 강조하게 만들었다. 교독문, 음악과 노래와 영창 등 공적 예배에 흥미본위의 요소가 증가된 것이다. 간증, 상담의 증가는 일상생활에서 긴장과 어려움의 증가로 더 많은 개인적인 배려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사적인 문제해결이 요청된 것에 대한 필연적 귀결이다.

성경은 다른 어떤 것보다 설교를 강조한다. 이적은 주님의 첫 번째 사역이 아니었으며,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수단으로서의 표적(Sign)이었다. 초대교회 당시 권세자들의 최대 관심은 사도들의 전도함과 하나님의 도 가르치는 일을 중단시키는 일이었다. 그와 반대로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였으며, 바울은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말하며,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써 말씀을 전파하라고 강조하였다.

제2장 대체할 수 없는 말씀증거

현대인의 문제는 육체적, 정신적, 도덕적 질병에 있지 않다. 인간의 참된 고통은 그가 하나님께 반역했고 그래서 부단히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이러한 상태를 묘사하는 일반적인 성경 어휘는 "어두움"이라는 것이다. 성경적 인간관에 따르면 불행이나 참상, 육체적인 질고까지도 그리고 우리를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모든 것들은 다 원죄와 아담의 타락의 결과이며 열매이다. "어두움"이라 표현되는 인간의 무지는 사망과 같은 것이다. 이에 대하여 구원이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으로 정의된다. 구원이 사람에게 가장 큰 요구이며, 인간의 가장 궁극적인 곤경이 하나님에 대한 반역의 결과인 무지에서 발생한 것이라면, 사람에게 자아 절실한 것은 이것에 관해서 듣는 것이며, 자신의 처지가 어떻다는 것을 알고 이것이 처리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무엇인지 아는 것인데, 이 모든 것을 아는 것은 교회와 목사의 고유한(peculiar) 임무라고 생각한다. 바울은 자기 스스로를 복음을 반포하는 책임을 맡은 자(고전4:17)라고 하면서,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게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엡3:8-10)'라며 자신이 받은 은혜의 궁극적 목적이 무엇임을 밝히고 있다. 교회의 최우선적인 임무는 사람을 교육하는 것도, 사람을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치료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게 한다 해도 그것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기본적인 명제로 붙들어야 한다.

드러난 증세의 원인을 파악지 않고 단순히 증세만을 멈추게 하는 것이 환자에게 범죄행위이듯이, 임시적인 행복감을 불어 넣어서 현대인은 모든 것이 잘되어 간다고 단정해 버리고 생각하기를 중단케 하고, 본질적인 인간의 문제 진단과 정직한 처방을 외면한다면 이는 교회의 가장 안타까운 직무유기다. 거짓 평안을 주는 각성제나 수면제로 판단을 무디게 만드는 것은, 각성제나 진통제, 흥분제 등을 복용하지 않으면 현실을 살아갈 수 없는 현대인을 만드는 것과 같다. 본질적인 문제를 진단하고, 그에 따르는 근원적인 처방으로 그것을 해결하는 교회의 고유한 사명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다. 오히려 사회, 정치조건에 대한 관심, 개인의 참된 행복 등은 언제나 기독교 내에 개혁과 부흥, 참된 말씀 전파가 일어날 때 가장 효과적으로 다루어 졌음을 명심하라. 병원, 교육사업, 빈민구호법, 노동조합은 모두 기독교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

제3장 설교내용과 전달행위

본 장은 설교가 대화(dialogue), 소위 의견교환 등으로 대치될 수 있느냐에 대한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모세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시므로, 토론되거나 논박될 분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또한 복음은 생의 가장 중대하고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에 경박한 정신과 변론의 태도를 가지고 흥밋거리처럼 가벼이 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영적으로 무식한 자연인, 즉 비그리스도인에게는 그러한 토론이나 논쟁, 또는 대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고전2:14)"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비밀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마11:25)"을 볼 때, 아이들은 변론이 대상이 아니라, 알지 못하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할 대상이므로, 대화나 토론은 진리 전달방식으로 타당하지 않다.

현대인들이 비록 설교보다 다른 방식을 선호할지라도, 로이드 존스는 참된 설교가 있을 때 사람들이 몰려와 그것에 귀를 기울일 것이라 주장한다. 예전에는 충분한 양식과 필요한 옷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설교를 들으러 오리라 기대할 수 없는데 이는 가난 때문이라 하였고, 오늘날에는 모든 것이 부요하여 복음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인데, 이는 그들의 풍요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현상적 핑계에 다름 아니다. 양떼는 꼴이 있는 곳에 몰려 들게 마련이다. 설교는 전인을 다루는 것이며, 듣는 이가 감복하게 되어 설교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자기를 다루시고 계시며 자기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어 참된 행복을 경험하기 때문에 몰리는 것은 당연하다.

설교의 역할은 구별되어 있다.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3:6)"고 했다. 이는 설교자가 하지 않을 어떤 일들이 있으며, 그가 하려고 덤비지 않아도 될 어떤 일이 있으며, 우리가 준비해야만 할 특수한 임무가 있음을 시사한다. 첫째 구원의 메시자라 할 수 있는 케리그마( )로서 전도설교이며, 둘째는 교훈적인 면으로 이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정립시켜 주는 디다케( ), 즉 성도의 덕성함양이다. 이것이 바울의 설교요약이다.

제4장 설교의 형식

설교란 언제나 신학적이어야 하며, 신학적인 토대를 보편적인 명제로 함을 전제로 두어야 한다. 신학적이지 않은 복음전도는 결코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복음전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성경 전체가 말하는 통일된 메시지를 포착하기 위해 조직신학의 기초가 되는 성경신학에 정통해야 한다. 바르트주의자들(Barthians)의 특징은, 말씀(the Word)에 관한 것들만 주장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그것에 관한 것들을 말하지 않고 실제로 그 말씀 자체를 그대로 전달해 주는 말씀의 통로이며 운반도구인 것이다.

설교의 형식으로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원리를 말하는 교리와, 그 원리를 상황에 적용시켜 주는 실천적인 문제를 다 포함해야 한다. 그리고 설교는 읽도록 쓰여진 수필과는 달리, 말로 전해질 것과 들을 것을 의도한 것이다. 수필은 반복을 금하지만, 가르침과 설교의 진수는 반복에 있다. 그리고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시작하여 이 특정 주제에 관련된 지식과 정보를 주는 강의와 마음을 향한 호소로서의 설교를 혼돈해서는 안된다. 강의와는 달리, 설교는 하나의 주제로 시작하지 않아야 한다. 설교는 교리와 테마를 내포하고 있는 성경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본문내용

연스럽게 우러나온 것이어야 한다. 대지는 대개 세 개여야 한다. 대지를 말할 때, 우리는 너무 명석한 척하지 말고 너무 멋있는 척하지 말아야 한다. 설교자의 함정이다. 우리는 기교를 부리기 위한 기교(Art for Art's sake)를 신봉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설교의 방식에 있어서 자신 안에서 좋겠다고 느껴지는 것을 먹칠하지 말아야 한다. 설교들이란 엄청나게 다양하다. 소제목들은 한꺼번에 기계적으로 다 밝히는 것은 가능한 삼가는 것이 더 좋다. 설교의 개요을 기록하는 것이 중요하다. 설교는 인체와 같이 척추가 있고 뼈들이 있고 그것을 덮는 살이 있다. 인용의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학자도 사상가도 아니기 때문에, 인용하는 사람의 정신능력, 그의 사고능력, 그의 창의력입니다. 경고할 것이 있다면, 설교원고를 너무 세밀한 논리를 따라 작성하지 말라는 것이다.
제12장 예화, 웅변, 유머
즉흥설교의 위험은 부족하게 준비하고 크게 만족한다는 것이다. 설교하는 일이란 회중들과 설교자 사이의 직접적인 접촉과 인격성과 심령과 마음의 상호작용을 수반한다. 설교자는 수사술가라기보다 웅변가여야 한다. 문장을 완벽하게 하는 것에 비중을 두지 말고 자유로워야 한다. 우리의 신앙을 성령에게보다 설교원고에 둔다는 것은 정말 큰 위험이 존재하는 것이다. 예화와 예증은 진리를 밝혀주는 데만 목적이 있는 것이지 그 자체에 무엇이 있어서가 아니다. 진리가 우선이요 그것이 크게 드러나야 되고, 예화는 그 목적을 위해 아주 조심스럽게 약간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의 철학이다. 예화는 하녀에 불과하다. 우리의 임무란 진리로 사람들을 움직이는 것이지 우리의 상상력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유머는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본성이 그렇다면 허용될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제13장 금기사항
1. 설교하려는 주제를 미리 알려 주어서는 안된다.
1) 사람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 말씀 강론을 듣기 위해서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2) 사람 중심의 예배를 막기 위해서
3) 주제를 해당 성경의 문맥 안에만 고립시키는 경향 때문에. 성경을 원자화하여 전체성을 일어버리게 함.
4) 청중은 자기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아는 위치에 있지 않다.
2. 19세기의 두드러진 현상: 주제를 발표행습, 성가대를 가짐.
3. 1920년 이후 설교에 대한 신뢰도 상실의 원인: 토론과 다른 주제들에 대한 대화나 인터뷰
4. 방송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 오는 것을 나약하게 하고 다른 습관을 길러준다.
5. 직업주의를 피하라. 직업적인 사람은 언제나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동시에 기교에 굉장한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다.
6. 지식의 과시를 금하라. 준비하는 것에 의지하지 말라.
7. 설교내용이 너무 논증적이지 않게 하라.
8. 목사다운 목소리를 피하고 수다스러움을 피하라.
9.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리라. 자아는 설교자의 가장 큰 적이다.
제14장 결심의 요청
1. 오르간 사용과 시편 이외의 찬송 부르는 것을 반대함.
→ 예배당의 건축양식, 예배의식, 성가, 음악, 조명 등에 기울이는 관심 정도가 클수록, 거기에 강조점을 두면 둘수록, 영적으로는 보다 빈약해지기 쉽다.
2. 네틀튼과 피니의 논쟁
3. 결심을 요청하는 것의 문제점들.
1) 의지에 직접적인 압작을 가하는 것은 분명히 나쁘다.
롬6:17, 진리는 이지→감정→의지
2) 의지에 대한 너무 과다한 압력이나 너무 직접적인 강압이 위험하다.
→ 진리 자체보다 전도자의 개성이나 희미한 두려움, 일종의 심리적인 영향을 유발.
→ 진리 자체에 대한 분별력을 감퇴시킴.
3) 말씀 증거나 결신의 요청이 우리의 사고에서 분리되지 않아야 한다.
(카톨릭 성례전의 문제: 성례행위 자체가 결신을 창출)
4) 죄인들이 처음부터 결신과 자기 회심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착각의 우려가 있다.
5) 전도자가 성령과 그의 역사하심을 어떻게 해서 교묘히 조장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는 은연중의 암시가 있다.
6) 피상적인 죄의식을 산출하게 한다. (은혜의 방편이 결신하는 행위와 연결)
7)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이후의 행위가 어느 정도 그들을 구원한다고 생각게 한다.
8) 중생교리의 전반적인 문제가 유발된다.
→ 눈으로 확인되는 성공과 실패 때문에 목회자 자신이 무너진다.
9) 어떤 죄인이라도 그리스도를 위한 결신을 할 수 없게 한다. (사람 앞에서의 결신)
4. 호소는 설교 전체를 통해서 설교자가 행하는 모든 것 속에 담겨 있어야 한다. 막간을 가진 다음에 찬송을 부른 뒤에 하는 특별한 호소와 따로 떼어 하는 호소는 성령께서 그렇게 하도록 강권할 때만 허용된다.
제15장 함정과 낭만
1. 설교를 반복하는 것
1) 설교가 실천될 때가지 반복하여 설교한다.
2) 설교자는 언제나 가장 훌륭한 것을 선택하여 그것을 설교하는 것은 분명히 합당한 일이다.
3) 설교내용이 전해진 결과로 더 나아지고 발전한다.
4) 자연스러움을 연출하지는 말라.
2. 설교의 낭만
1) 예배 내에 있는 불확실성: 무엇이 일어날까를 아무도 모른다.
2) 연약한 몸과 빈약한 준비 속에서도 강단에서 발생하는 무한한 힘.
3) 설교 준비할 때는 덮여 있던 것이 강단에서 벗겨지는 것.
4) 설교를 들을 사람이 누구인지, 그들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전혀 알 수 없다.
3. 윌리암 케리; 하나님의 큰 일을 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커다란 일을 기대하라
제16장 영력 있는 증거
1. 성령의 감동과 기름부으심
2. 면밀한 준비와 성령의 감동은 서로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이다.
3. 선지자들의 신분: 눅1:15∼17.
4. 제자들의 필요: 모든 것을 목격하였으나(알고) 더 필요한 무엇이 있었다. (눅24:46∼49)
5. 사도들의 모든 활동은 "성령이 충만하여"의 열매이다.
6. 오늘날과 사도시대의 차이
1) 신유집회에 대한 예고 없이 나타남.
2) 실패가 없음.
7. 능력과 권위로 옷입는 것의 증거; 생각의 명료함, 말의 명료함, 전달의 용이함, 설교시 굉장한 권위감과 확신, 자신의 존재 외에서 비롯되는 능력의 확신, 형언할 수 없는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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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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