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제국의 후예』는 일본의 식민지배를 변호한 것이 아니다. 이 책은 한국 자본주의의 출현을 연구한 것이다. 나로서는 식민 권력이 의식적으로 회유하거나 끌어들이려 했던 한국인 엘리트와는 달리, 한국인 대다수가 느꼈던 일제 강점의 억압적 측면을 부인하거나 축소할 의도가 전혀 없다. 나는 또한 일제가 1920년대에 한국인 엘리트와 더 협력하는 자본주의개발 정책으로 전환한 것이 한국 자본주의 자체의 발전을 촉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 제국의 이익을 증진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8쪽)
나는 본래 일제 식민지 통치가 조선의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주장에 한 번도 심적으로 반발해 본 적이 없다. 아니, 제국주의 국가가 세계 대전을 치르면서 식민지에서 공장을 열심히 돌렸다면 그런 결과가 나타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데 이런 주장에 대해 한국인 역사학자들이 반발해 왔으리라는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런 반대자들의 우려는 대개 이러한 것이다. "일제의 침략을 계기로 한국이 비로소 근대화 되었다는 주장은 일제의 식민 통치를 미화할 우려가 대단히 크다."
그러나 이것은 논리적으로 공격해야 할 대상을 잘못 잡은 것이다. 왜냐하면 "일제가 조선을 통치한 것이 조선을 근대화하는 결과를 낳았다."라는 명제로부터 "일제의 제국주의적 지배는 정당한 것이었다."는 평가가 필연적으로 도출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일제의 한일 병합 이후에 "식민 지배는 조선의 근대화를 촉진하므로 옳은 것이다." 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학자가 있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그들과 같은 논리적 과정을 밟는 것도 아니고, 그들의 존재가 식민지 지배에 대한 객관적인 통찰에 영향력을 행사해도 좋은 것은 더더욱 아니다.
앞서 말한 식민지 통치 미화론자들의 주장에 맞서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사고 과정은 다음의 둘이다.
1. "일제가 조선이라는 식민지를 지배한 것이 그 식민지의 근대화를 유도하였다."는 명제는 참인가?
2. 1에서 제시한 명제와 "따라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정당하고 감사할 만한 것이다."라는 평가의 관계는 어떠한가?
중요한 것은 2의 과정이다. 2의 단계를 잘 밟다 보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쉽게 할 수 있다. "사회의 거시적인 질적 상승에는 미시적인 영역에서의 희생 내지는 억압이 전제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일제 시대는 그러한 경우에 해당되는가? 대답은 "그렇다."이다. 즉, 일제 시대에 조선이 자본주의 단계로 이행하는 역사적 발전을 보여주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이룩하기 위해서 제국이 취했던 수단이 정당하지 못하다면 우리가 그것을 미화해야 할 이유는 하등 없는 것이다. 그 근대화가 일본 제국과 조선인 자본가에게만 특히 이로웠다는 점, 일제는 1945년에 이 땅에서 물러날 것을 예상하고 한국을 위해 자본주의의 싹을 만들어 준 것이 아니라는 점(조선 민족을 이롭게 하려는 동기 자체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등을 고려하면 이러한 확신은 더더욱 커진다.
결국 일제가 조선을 근대화하였다는 사실 명제를 조금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식민 통치를 옹호하는 자들의 주장을 분쇄할 수 있다. 이러한 바를 잘 알고 있다면, 조선 후기의 내재적 발전론 내지는 자본주의 맹아론이 반박 당한다 하더라도, 그로써 일제 통치의 옹호가 특별히 타당성을 얻는 것이 아님이 명백해진다. (사실 좁은 의미의 식민지 근대화론과, 내재적 발전론은 똑같이 역사 진보에 대한 믿음의 사생이들이다. 내재적 발전론은 자신의 적과 같은 프레임 내에서 싸우려고 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실패한다. 그러나 나는 역사의 진보를 믿지 않으며, 그러한 시각에서는 앞의 두 주장을 모두 극복할 수 있는 반박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따라서 이것은 소극적인 호도나 비판을 저지하기 위한 양비론과는 다르다.)
카터 J. 에커트가 쓰고 주익종이라는 뉴라이트 계열 학자가 번역한 『제국의 후예』는 매우 재미난 책이다. 이 책은 제1장에서 자본주의 맹아론(자생적 발전론)을 반박하는 것으로 열린다. 이어서 김성수, 김연수를 비롯한 조선인 지주 출신의 중소자본가들이 총독부의 보호와 협력 아래에서 어떻게 조선의 근대화에 기여했는지 고찰한다. 그는 3.1 운동 이후 조선 총독부가 경성방직주식회사 등의 조선 기업을 보호하고, 일제 자본가들과 협력하도록 하는 등 취했던 조치들이, 조선의 근대화에 기여한 바가 많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에커트가 서문에서 말했듯이, 이 책이 일제 통치를 미화한다고 열을 올릴 필요는 없다. 그는 이 책의 3분의 1 가량을 경성방직주식회사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지와 임금 투쟁, 파업 서술에 할애하고 있고, "민족 기업"이라 자칭하던 경방의 태도가 얼마나 커다란 허상인지 낱낱이 폭로한다.
개혁적 관료의 전통을 따른 김씨가는 기본적으로 일본을 성공적인 근대화 국가이자 개화의 상징으로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개화파가 일본의 경제적, 정치적 조선 병합을 용인했던 것은 아니다. 한국사의 비극 중 하나는 훗날 일제가 이 한국인 엘리트들에게 계급적 이익과 민족 의식 중 선택할 것을 요구했을 때, 다수가 전자를 택했다는 것이다.(67쪽)
경방의 경영진은 한국인 회사라는 것을 강조하기를 좋아했고, 처음부터 민족주의적 주제들을 이용한 광고를 선보였다. 그러나 한국인 기업(특히 경방과 같은 대기업)이 식민지 정치경제구조에 의존한 것 같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민족주의 원칙에 대한 한국인 자본가의 충성심은 사실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280~281쪽)
일단 경방이 그 직물을 조선 시장에 팔기 시작하자 어느 만큼의 경쟁은 불가피했지만, 경방이 어떤 식으로든 진정으로 한 번만이라도 일본의 중심적 방직 자본에 도전했거나 그를 막으려 했다는 증가는 전혀 없다. 실로 모든 증거는 정반대쪽을 가리킨다. 즉 처음부터 끝까지 경방은 대결보다는 더 안전한, 총독부가 지정한 조화와 협력의 길을 택했다는 것이다. (256쪽)에커트는 김성수 등이 "조선 민족의 일원"이라기보다는 "자본가 계급"으로서의 면모를 훨씬 더 많이 보여주었으며, 조선인 근로자를 특별히 우대했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암시한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반박하기 위해 김성수 등의 자본을 "민족 자본"이라고 칭했던 한국인 학자보다도 훨씬 더 객관적이고 진보된 시각이 아닌가.(북한에서는 이를 매판 자본이라고 함으로써 남한보다 훨씬 더 깊이 있는 분석을 했다고 그는 평한다.) 게다가 글쓴이는 일제가 특별히 선하여서 조선을 근대화한 것이 아니라, 식민지 영역에까지 스스로의 세를 확장하여 효율적으로 전쟁을 치르기 위해 조선(과 만주)을 병참 기지로 활용한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자신이 일제 통치 미화론자가 아님을 분명히 했다.
나는 본래 일제 식민지 통치가 조선의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주장에 한 번도 심적으로 반발해 본 적이 없다. 아니, 제국주의 국가가 세계 대전을 치르면서 식민지에서 공장을 열심히 돌렸다면 그런 결과가 나타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데 이런 주장에 대해 한국인 역사학자들이 반발해 왔으리라는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런 반대자들의 우려는 대개 이러한 것이다. "일제의 침략을 계기로 한국이 비로소 근대화 되었다는 주장은 일제의 식민 통치를 미화할 우려가 대단히 크다."
그러나 이것은 논리적으로 공격해야 할 대상을 잘못 잡은 것이다. 왜냐하면 "일제가 조선을 통치한 것이 조선을 근대화하는 결과를 낳았다."라는 명제로부터 "일제의 제국주의적 지배는 정당한 것이었다."는 평가가 필연적으로 도출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일제의 한일 병합 이후에 "식민 지배는 조선의 근대화를 촉진하므로 옳은 것이다." 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학자가 있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그들과 같은 논리적 과정을 밟는 것도 아니고, 그들의 존재가 식민지 지배에 대한 객관적인 통찰에 영향력을 행사해도 좋은 것은 더더욱 아니다.
앞서 말한 식민지 통치 미화론자들의 주장에 맞서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사고 과정은 다음의 둘이다.
1. "일제가 조선이라는 식민지를 지배한 것이 그 식민지의 근대화를 유도하였다."는 명제는 참인가?
2. 1에서 제시한 명제와 "따라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정당하고 감사할 만한 것이다."라는 평가의 관계는 어떠한가?
중요한 것은 2의 과정이다. 2의 단계를 잘 밟다 보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쉽게 할 수 있다. "사회의 거시적인 질적 상승에는 미시적인 영역에서의 희생 내지는 억압이 전제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일제 시대는 그러한 경우에 해당되는가? 대답은 "그렇다."이다. 즉, 일제 시대에 조선이 자본주의 단계로 이행하는 역사적 발전을 보여주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이룩하기 위해서 제국이 취했던 수단이 정당하지 못하다면 우리가 그것을 미화해야 할 이유는 하등 없는 것이다. 그 근대화가 일본 제국과 조선인 자본가에게만 특히 이로웠다는 점, 일제는 1945년에 이 땅에서 물러날 것을 예상하고 한국을 위해 자본주의의 싹을 만들어 준 것이 아니라는 점(조선 민족을 이롭게 하려는 동기 자체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등을 고려하면 이러한 확신은 더더욱 커진다.
결국 일제가 조선을 근대화하였다는 사실 명제를 조금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식민 통치를 옹호하는 자들의 주장을 분쇄할 수 있다. 이러한 바를 잘 알고 있다면, 조선 후기의 내재적 발전론 내지는 자본주의 맹아론이 반박 당한다 하더라도, 그로써 일제 통치의 옹호가 특별히 타당성을 얻는 것이 아님이 명백해진다. (사실 좁은 의미의 식민지 근대화론과, 내재적 발전론은 똑같이 역사 진보에 대한 믿음의 사생이들이다. 내재적 발전론은 자신의 적과 같은 프레임 내에서 싸우려고 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실패한다. 그러나 나는 역사의 진보를 믿지 않으며, 그러한 시각에서는 앞의 두 주장을 모두 극복할 수 있는 반박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따라서 이것은 소극적인 호도나 비판을 저지하기 위한 양비론과는 다르다.)
카터 J. 에커트가 쓰고 주익종이라는 뉴라이트 계열 학자가 번역한 『제국의 후예』는 매우 재미난 책이다. 이 책은 제1장에서 자본주의 맹아론(자생적 발전론)을 반박하는 것으로 열린다. 이어서 김성수, 김연수를 비롯한 조선인 지주 출신의 중소자본가들이 총독부의 보호와 협력 아래에서 어떻게 조선의 근대화에 기여했는지 고찰한다. 그는 3.1 운동 이후 조선 총독부가 경성방직주식회사 등의 조선 기업을 보호하고, 일제 자본가들과 협력하도록 하는 등 취했던 조치들이, 조선의 근대화에 기여한 바가 많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에커트가 서문에서 말했듯이, 이 책이 일제 통치를 미화한다고 열을 올릴 필요는 없다. 그는 이 책의 3분의 1 가량을 경성방직주식회사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지와 임금 투쟁, 파업 서술에 할애하고 있고, "민족 기업"이라 자칭하던 경방의 태도가 얼마나 커다란 허상인지 낱낱이 폭로한다.
개혁적 관료의 전통을 따른 김씨가는 기본적으로 일본을 성공적인 근대화 국가이자 개화의 상징으로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개화파가 일본의 경제적, 정치적 조선 병합을 용인했던 것은 아니다. 한국사의 비극 중 하나는 훗날 일제가 이 한국인 엘리트들에게 계급적 이익과 민족 의식 중 선택할 것을 요구했을 때, 다수가 전자를 택했다는 것이다.(67쪽)
경방의 경영진은 한국인 회사라는 것을 강조하기를 좋아했고, 처음부터 민족주의적 주제들을 이용한 광고를 선보였다. 그러나 한국인 기업(특히 경방과 같은 대기업)이 식민지 정치경제구조에 의존한 것 같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민족주의 원칙에 대한 한국인 자본가의 충성심은 사실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280~281쪽)
일단 경방이 그 직물을 조선 시장에 팔기 시작하자 어느 만큼의 경쟁은 불가피했지만, 경방이 어떤 식으로든 진정으로 한 번만이라도 일본의 중심적 방직 자본에 도전했거나 그를 막으려 했다는 증가는 전혀 없다. 실로 모든 증거는 정반대쪽을 가리킨다. 즉 처음부터 끝까지 경방은 대결보다는 더 안전한, 총독부가 지정한 조화와 협력의 길을 택했다는 것이다. (256쪽)에커트는 김성수 등이 "조선 민족의 일원"이라기보다는 "자본가 계급"으로서의 면모를 훨씬 더 많이 보여주었으며, 조선인 근로자를 특별히 우대했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암시한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반박하기 위해 김성수 등의 자본을 "민족 자본"이라고 칭했던 한국인 학자보다도 훨씬 더 객관적이고 진보된 시각이 아닌가.(북한에서는 이를 매판 자본이라고 함으로써 남한보다 훨씬 더 깊이 있는 분석을 했다고 그는 평한다.) 게다가 글쓴이는 일제가 특별히 선하여서 조선을 근대화한 것이 아니라, 식민지 영역에까지 스스로의 세를 확장하여 효율적으로 전쟁을 치르기 위해 조선(과 만주)을 병참 기지로 활용한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자신이 일제 통치 미화론자가 아님을 분명히 했다.
본문내용
나의 입장이 식민지 시대 조선의 경제적 실태를 분석하는 그들의 학적 활동 자체를 부인하는 기반이 될 수는 없다. 이 책은 학자 주익종이 『대군의 척후』라는 책을 저술하는 밑바탕의 하나가 되기는 하였으나, 그 사실이 책의 독해에 특별히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이 책은 많은 측면에서 주장의 타당성을 담고 있었고, 오히려 일제의 지배를 미화하는 이들이나 당대의 조선인 자본가들을 찬양하는 이들의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근거를 많이 제시하고 있다. 앞으로 보수적인 학자들이 식민지 시대나 개발 독재 시대의 근대화 노력에 대해 이러저러하다고 평가하는 것은 많이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에 대한 반응이, 단순히 뉴라이트 계열의 학자이기 때문에 부정으로 일관하거나 해서도 안 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주장에 대해 알고자 하지도 않으면서, 신기하게도 반박하는 자가 많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전문적인 학자들이고, 주장 자체의 진위 여부를 떠나서 그 진위를 판단하려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그들에 대한 옳은 대응 방식임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민주주의자라면 해야 할 바가 아닌가 싶다.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