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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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프랑스의 역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고대(Antiquité)
1) 선사시대 : 전기 구석기 시대(약 2만년 전)의 문명은 프랑스 남서부의 뻬리고르 지방에서 발굴되고 있다. 레 재지, 라 마들렌느, 마다질, 크로마뇽, 라스코 등은 이 시대의 대표적인 동굴이며, 동물들(순록, 황소, 메머드, 들소, 말 코뿔소)의 모습이 동굴벽에 그려져 있다.

2) 켈트 족 시대의 골 : 현재 브르따뉴 지방에 남아 있는 거석 건조물들을 통해 프랑스에 최초로 거주하였던 사람들의 거석 문화(civilisation mégalithique)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브르따뉴 지방에는 청동기 시대(1,800-700년까지)의 유적이 많다. 기원전 1,000년 경 켈트 족이 서유럽에 정착하였으며, 이 가운데 현재의 프랑스 지역에 자리잡은 이들은 골(Gaule) 사람이라 불렀다.

3) 로마 시대의 골 : 골은 지중해의 로마 속주로 편입되었다. 오래 전부터 번성했던 농촌의 기반 위에서 도시문명이 확산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프로방스 지방은 많은 도시와 웅장한 규모의 건축물을 보유하고 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아를르의 원형 경기장과 극장, 오랑쥬의 극장과 개선문이다. 로마 지배하의 골에서는 초기 형태의 크리스트교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라틴 문화의 영향으로 문학작품을 탄생하였고, 교육이 발달하여 골 사람의 지적 수준이 향상되었다.

4) 프랑크 왕국 : 5세기에 게르만 족 계통의 프랑크 족이 골을 정복하였다. 클로비스는 프랑크 왕국을 세우고 파리를 수도로 정하였고, 496년에 크리스트교로 개종했다.
5) 카롤링 제국 : 771년에 프랑크 족(Francs)의 왕인 샤를르마뉴(Charlemagne)는 계속적으로 군사원정을 벌여 광대한 영토를 획득했으며, 로마에서 교황 레오 3세로부터 서로마 제국의 제관을 받음으로써, 프랑크나 크리스트교의 양면성을 지닌 로마제국이 창건되었다. 한편 새로운 문화의 출현을 고대하여 성직자와 귀족을 양성하기 위한 학교를 건립하였다.

-중세(Moyen Age)
1) 봉건시대 : 9세기에서 12세기까지 중세는 왕권이 축소되고, 새로운 정치적, 사회적 조직이 발전되었다. 넓은 영토를 소유한 영주들은 주권자의 권력을 행사하면서 재판을 하고, 세금을 징수하면서, 자신들의 지역의 방어를 맡았다. 가신들에게 충성과 군사적, 재정적 도움을 맹세하도록 요구했다. 그 대신 영주들은 그들에게 땅과 봉토를 부여했고 튼튼한 성에서의 보호를 보장했다. 농민들은 농노나 자유농민이었다.

2) 교회의 영향 : 교회의 이름으로 11세기와 13세기에 십자군에 참가하게 된다. 회교도들(이교도)의 손에 넘어간 성스러운 땅을 되찾는다는 구실 하에 영주들과 수도승 병사들은 많은 이익의 근원인 식민지 중앙-아시아에 파견된다.

3) 문화적인 생활 : 중세시대는 오랫동안 야만의 시기로 여겨졌으나, 문학은 풍부했다. 투르바두르와 투르베르에 의해 운문으로 쓰여진 무훈시(롤랑의 노래)는 전쟁의 탐험을 이야기했다. 기사소설은 기사도 연애담을 이야기했다.

4) 경제적인 변화들 : 12세기와 13세기에는 상업이 발달하였다. 상인들과 장인들은 길드로 조직되어 있었으며, 부르주아들은 스스로 도시의 행정을 관리할 수 있게 허락해 줄 특권들을 영주로부터 얻어내려 했다.

5) 백년전쟁 (1337∼1453) : 13세기와 14세기는 매우 어려웠다. 기근과 전염병인 페스트가 국민들에게 참혹한 피해를 주어 농민폭동이라는 민중반란을 야기했다. 한편, 영국의 왕들은 결혼할 때에는 프랑스 왕의 가신이 되었는데, 프랑스 왕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은 물론 거부했으므로 많은 전투가 있었으며, 영국인들은 프랑스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 쟌다르크(Jeanne d'Arc) : 동레미(로렌지방)에서 태어난 한 젊은 목녀는 프랑스를 구하라고 자신에게 명령하는 초자연적인 음성을 들었다. 16세에(1428) 그녀는 군부대의 지휘관이 되어, 프랑스가 영토를 되찾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쟌다르크는 체포되어 마녀로 재판받아 화형당했다. 쟌다르크는 프랑스 국가주의의 첫번째 상징 중 하나이다.

-구체제(Ancien régime)
15세기말 프랑스의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전력을 정비하면서 외부로 팽창해 나가려는 움직임과 함께 새로운 지적, 미학적 욕구가 싹텄다.

1) 르네상스 (La Renaissance, 1515∼1610) : 프랑스는 예술적인 측면에서 이탈리아의 새로운 사조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여러 단계를 거쳤다. 첫번째는 1530년경까지의 건축경향으로, 아재-르-리도, 슈농쏘와 같은 루아르 강변의 성을 들 수 있다. 이 성들은 망루, 총안, 경사가 급한 지붕을 특징으로 하였다. 두번째 단계에서는 퐁땐느블로(Fontainebleau)파를 중심으로 보다 복잡한 장식유파가 등장하였다. 이 유파는 나무, 화장벽토, 프레스코를 조화롭게 결합시키고자 하는 기교주의 화풍이 특징적이다. 세번째 단계로 1550년경에 이르러 이탈리아 및 고전고대의 영향과 국민적 전통이 결합되어 프랑스의 고전양식이 등장하였다. 루브르 궁과 뛰일르리 궁들이다.

2) 종교 개혁 : 루터와 캘빈의 자극으로 <종교 개혁>이 일어나서 교회의 부와 권력의 남용을 비판하며 성서의 근원으로 돌아가자고 제안(프로테스탄트주의) 했다. 가톨릭 교회와 교황은 교의와 종교예식의 원칙들을 세우며(트렝트 공의회), 예수회의 종교적 질서를 창조하면서 반종교개혁운동을 했다.(예수회 수도사들과 예수회 : 반 개혁의 시기에 스페인인 이그나스 드 로욜라에 의해 1540년에 설립된 카톨릭의 종류) 교황에게 충실한 교황예찬자들과 개혁을 지지하던 위그노들 사이의 종교적인 갈등은 시민전쟁 즉 종교전쟁으로 악화된다. 생 바르텔르미의 학살(1572년 8월 24일) 사건은 하룻밤에 빠리의 모든 신교도들을 학살했다. 어머니에 의해 프로테스탄트 종교 속에서 키워진 앙리 4세가 1589년 프랑스의 왕이 되었을 때(부르봉왕가의 첫번째 왕), 그는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3) 17세기 : 위대한 세기
* 루이 13세와 리쉴리외 : 앙리 4세의 섭정기간이 지난 후 그녀의 아들인 루이 13세는 왕좌에 오르게 되고 리쉴리외 추기경의 도움으로 통치한다. 지방의 고등법원의 힘을 제한하기 위해 왕은 권력의 중앙집권 정책을 시작한다. 그는 상업과 해운, 그리고 진정한 식민지 제국의 건설을 장려한다. 프로테스탄트와의 투쟁이 재개된다.

* 태양 왕의 명성 : 수상이었던 마자랭이 죽은 후 루이 14세 자신이 통치하게 되었을 때, 그는 귀족들이 왕권에 대항했던 프롱드난에서 교훈을 얻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한다. 이것이 절대 왕정이다. 신과 같은 권력을 지닌 군주로서의 왕은 지상에서 신을 대표하며 그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는다(≪L'état, c'est moi. 국가는 바로 나다≫).

* 콜베르와 중상주의 : 콜베르 수상은 특히 산업과 상업에 관심이 있었다. 그는 수입을 제한하고 왕립 제조소를 만들었다. 그는 교역을 위해 도로와 항해로를 정비하였다. 한편, 종교적인 갈등들은 매우 난폭했다. 루이 14세는 낭트칙령을 폐지했으며, 탄압이 또다시 프로테스탄트들에게 덮쳤다. 사람들은 또한 예수회와 절대주의에 반대하는 카톨릭 운동인 쟝세니스트파들을 박해했다. 루이 14세의 가장 큰 성공 중 하나는 문화적인 명성 즉 고전주의의 승리이다. 회화, 조각, 음악 아카데미의 창조. 문학에 있어서는 <부자연스럽고 꾸밈이 많은 허식>이 주종을 이룬다.(몰리에르, 라신, 코르네이유)
4) 프랑스 혁명 : 1789년 7월 14일 국민병은 바스티유(왕실 감옥)을 공격한다. 바스티유의 점령은 프랑스 혁명의 시작과 절대 왕정의 종말로 여겨진다.

-프랑스 혁명(La Révolution française, 1789∼1799)
프랑스 혁명은 왕권의 제한에 의해 시작되어 법률, 행정, 사회, 종교적 격동을 야기시키며, 전 세계의 많은 국가혁명의 본보기로 사용된다. 계몽사상가들의 주장과 비판정신, 미국 독립혁명, 구체제가 직면한 재정위기, 그리고 민중의 비참한 생활은 혁명을 불가피한 것으로 만들었다. 혁명은 1789년 5월 5일 삼부회의 재 소집으로 시작되었다.

1) 1789년∼1792년 7월 14일 정치혁명 : 바스티유의 함락은 절대군주제의 몰락을 상징하였다. 봉건제와 특권이 폐지됨으로써 부르쥬아 프랑스가 구 귀족적 프랑스를 대체하였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은 새로운 사회의 기초가 될 위대한 원칙을 제시하였고, 국민공회는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선포하였다. 공화국의 이념은 자유,평등,박애.

2) 국민의회 (1792∼1795) : 루이 16세가 처형되고 군대는 젊은 장군들의(보나파르트 장군의) 지휘하에 재조직되어 수많은 승리를 가져온다. 로베스피에르는 ≪대 공포정치≫를 강화하지만 6주후에 테르미도르 9일(1794년 7월 27일) 그는 실각한다.

3) 5집정관 정부 (1795∼1799) : 5명의 집정관에게 - 행정권, 양원 - 입법권과 같은 권력을 준다. 공화국은 혁명주의자들과 왕당파의 폭동으로 위협을 받고, 결국 공화력 3년 브뤼메르 18일 (1799년 11월 9일) 보나파르트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킨다.

4) 집정시대 (1799∼1804) : 코르시카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프랑스인들을 화해시키기 위해 그는 구체제와 인사들로 구성된 집정관을 자신의 통치에 연결시킨다. 카톨릭교도들을 집합하기 위해 교황과 1801년 협약을 맺는다. 행정을 재조직, 프랑스 은행의 설립과 박람회의 조직으로 산업발달 꾀함. 민법전의 개작은 1804년 완성된다(나폴레옹 법전).

5) 제 1제국 (1804∼1815) : 1804년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프랑스 황제라고 불리게 되고 교황에 의해 나폴레옹 1세라는 이름으로 축성받게 된다. 나폴레옹은 유럽 원정 길에 오르는데, 1814년부터 패배가 계속된다. 파리 조약(1814)은 프랑스를 1792년의 국경으로 되돌려 놓고 나폴레옹이 왕위를 포기하도록 했으며, 루이 18세 왕에 의해 지도되는 입헌 군주제를 권좌에 올려 놓았다. 엘바섬으로 추방당한 나폴레옹은 파리로 행진하여 승리의 입성을 하고 100일 동안 권력을 다시 잡는다. (1815년 3월 20일부터 6월 20일까지) 그러나 유럽은 동맹하게 되고 나폴레옹은 두번째로 패배한다.

6) 왕정복고 (1815∼1830) : 왕정복고는 루이 18세(1815∼1824)에 이어서 샤를르 10세(왕정주의자 : 자유주의자, 1824∼1830)를 우두머리로 해서 대립을 야기한다. 어느 정도의 경제적인 재건이 있은 후 상황은 다시 나빠지고 1830년 7월 혁명이 있게 된다. ≪영광의 3일간≫인 3일 동안, 파리는 폭도들의 손에 들어간다. 샤를르 10세 왕은 자유주의 운동에 의해 지명된 오를레앙 공작(루이-필립)의 섭정 임명을 받아들여야 했다.

7) 7월 왕정 (1830∼1848) : 1830년 7월 혁명으로 들어선 루이 필립의 부르쥬아 군주정 역시 사회질서의 유지와 자유주의 사이에서 균형을 모색하지 못하였다. 결국 7월 왕정은 1848년 2월 혁명을 견디어낼 수 없었다.

8) 제 2공화국 (1848∼1851) : 정치적인 생활에서 제외된 쁘띠 부르주아들은 자신들의 불만을 표현한다. 1848년 2월 혁명. 루이-필립은 왕위를 양보하고, 공화국이 선포된다. 계속되는 동요와 공산침략의 위험에 대한 두려움은 1848년에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된 루이-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쿠데타를 일으키고 국회를 해산시키는 구실을 제공해 준다.

본문내용

* 1940년 6월 붕괴 : 프랑스는 동부전선에 요새(마지노선)을 구축했었으나 정부는 파리를 떠나고 국민들은 남쪽으로 도망가게된다(대피난). 행정부는 피점령 지역까지 포함해서 프랑스령으로 남아 있으나, 사실상 파리와 프랑스 전역에 자리잡은 독일 정부가 모든 나라를 통치했다. 뻬땡 정부는 비쉬를 수도로 선택하고 독일과 밀접하게 협조하지만, 결국 피점령 지역은 1942년 11월부터 군사적으로 점령되고 만다.
드골은 런던에서 ≪자유 프랑스≫를 조직하여, 연합군(영국과 미국)의 편에 서서 싸운다. 다양한 조직망들(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유태인들, 민족 권리의 수호자들 등)이 생겼으며, 1942년 모든 이러한 조직망은 항독 국민의회를 중심으로 모여 드골과 관계를 갖게 되며, 항독 운동으로 확산된다. 항독 투사들의 도움으로 연합군들은 점차로 프랑스의 모든 영토를 구출한다.
5) 4공화국 (1945∼1958) : 드골에 의해 지휘된 임시정부는 공산당을 포함하여 항독 운동의 모든 세력들로 구성된 민족적 단일정부로서, 대 민주개혁을 편다(여성에게 투표권 인정(1945년), 사회보장제도 창설, 수많은 기업들의 국영화). 프랑스는 미국의 재정원조(마샬플랜)를 수락한다. 한편, 식민지 충돌이 터진다. 인도차이나 전쟁은 독립으로 끝나게 되며, 알제리 전쟁은 1954년 시작한다.
6) 5공화국 : 5공화국은 (1958∼1969) 내적으로는 정부의 권한을 확립하고, 대외적으로는 프랑스의 위신을 표명하려는 드골 장군의 개인적인 권력에 의해 두드러 진다. (대통령제) 드골은 미국과의 모든 동맹을 포기(북대서양 조약기구에서 탈퇴)하고, 사회주의 국가들(중국의 인정)과 협정을 맺으며, 제3세계의 ≪독립을 추구하는≫ 국가들에게 호소했고, 경제적인 팽창을 이룩한다. 그러나 경제적인 성장은 사회적인 불평등을 강조하게 되어 1968년 5월에 학생들의 시위가 터지게 된다. 결국 드골은 물러나고 두개의 커다란 정치력이 대립한다. 즉, 1958년 이후 권력을 갖고 있는 우파와 대립되는 좌파. 1972년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은 정부의 <코뮌 프로그램>에 조인한다. 죠르주 퐁피두는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어(1969∼1974), 사회적인 많은 개혁을 실행한다.
그 후, 우파인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는데 우파는 드골 지지파와 지스카르파로 나뉜다. 지스카르 데스탱은 '계속성 안에서의 변화'의 후보로서 경제 자유주의와 정부 역할 축소지지자이며, 쟈크 시락은 수상으로 드골파이다. 981년 처음으로 좌파인 프랑수아 미테랑이 5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사회적이고 자유로운 방안들에 대한 선거와 권리행사에 의한 도약정치로 두드러진다. 1988년 직접 보통선거에 의해 프랑수아 미테랑은 재차 7년 임기에 착수한다. 1995년 쟈크 시락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리오넬 죠스팽이 수상으로 임명되어 좌우 동거내각을 시작한다. 2001년 쟈크 시락이 대통령에 재선되고 2002년 우파가 총선에 다석을 얻어 프랑스는 우파가 대통령과 수상을 장악하여 우경화로 접어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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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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