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듀이의 교육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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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존 듀이의 교육 사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존 듀이의 교육목적론

1. 삶과 관련한 교육(삶은 갱신의 과정, 적 경험)

무생물과 생물의 가장 큰 차이점은, 후자는 에 의해 스스로를 존속시켜 나간다는 데 있다. 인간의 삶 역시 스스로를 갱신해나가는 과정이다. 갱신의 과정은 삶에서 겪게 되는 모든 경험의 총체인데, 이것은 다음 세대로의 전달을 통하여 연속성을 유지하게 된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사회에 속해있긴 하나, 처음부터 사회 집단의 목적과 관습을 의식하는 것은 아니다. 처음에 그들은 전혀 무관심한 상태로 태어난다. 그러한 인간에게 사회 집단의 목적과 관습을 의식하게 하고 능동적으로 관심을 갖게 하는 것, 그것이 교육이다.
과거의 교육은 개인이 속한 가족, 부락 자체에서 생활하는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점차 문명이 진보함에 따라 형식화된 교육의 출현이 있게 되었다. 오늘날 학교 교육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요컨대, 사회적 연속성을 유지하는 수단으로서 교육은 필요하며, 그러한 교육은 삶의 전 과정 속에서의 총체적 경험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 듀이의 생각이다.

2. 성장으로서의 교육(, 과 그리고 습관)

성장이란, 행위가 그 다음의 결과로 축적되어 나가는 과정을 말한다. 이 성장을 위한 으뜸가는 조건은 미성숙이다. 미성숙이란 말은 나중에 나타날 힘이 현재 없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현재 어떤 힘이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달리 말하면 ‘성장하는 힘’이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미성숙을 이와 같이 적극적으로 해석할 때 생각할 수 있는 미성숙의 중요한 특징은 ‘의존성’과 ‘가소성’이다.
처음 태어난 아기는 스스로 그 자신을 보호할 아무런 능력도 갖고 있지 않다. 동물의 새끼보다도 자신을 보호할 능력이 모자란다. 그러나 그에게는 사회성이 있다. 태어날 때도 그렇지만, 성장하면서도 인간은 자연의 모든 위협에 대해 홀로 맞설 수 없기에 서로를 필요로 한다. 의존성은 이러한 점에서 약점이 아니라 강점이 된다. 즉 ‘’이라는 것은 성장의 밑바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가소성이란 미성숙한 인간이 성장에 대하여 나타내는 특수한 적응 능력이다. 그것은 하나의 경험에서 배운 것을 나중의 문제 사태를 해결하는데 활용하는 능력이다. 곧 ‘성향을 발달시키는 능력’인 것이다. 습관의 형성은 바로 이 가소성으로 하여 가능해진다.
습관은 행동을 용이하게, 효율적으로 해 주는 것과 동시에 지적, 정서적 성향을 형성해 주기도 한다. 물론 고정적인 습관은 가소성까지도 없애버릴 수 있으나 기본적으로 습관이 지니고 있는 지적 요소는 습관을 다양하고 탄력성 있는 용도에 연결시켜 줌으로써 계속적인 성장을 가능케 한다. 교육이 때로 환경에 대한 개인의 적응으로 가능하게 하는 습관을 획득하는 일이라고 정의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성장의 요인으로서 미성숙과 그것의 두 중요한 특징인 의존성과 가소성, 그리고 습관에 대해 설명했다. 이를 정리하면, 의존성은 성장의 배경을 이루며 가소성은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데, 능동적 습관은 바로 이 두 요소에 의해 형성 가능하다는 것이다.

3. 능동적 습관의 형성(경험의 계속적인 재조직 또는 재구성)

습관이 능동적이라고 할 때 그것은 계속적 성장을 의미한다. 그것은 성장을 ‘목적을 가진 것으로’ 보는 게 아니라 ‘목적으로’ 보는 것이다. 여기에서 교육의 과정은 그 자체 이외의 다른 목적을 가지지 않으며, 경험의 끊임없는 재조직, 재구성, 변형의 과정이라는 정리가 가능해진다. 삶 그 자체에서 학습하려는 성향,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삶의 과정에서 학습할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들어 나가는 성향이 학교 교육이 가져올 수 있는 최상의 결과라는 생각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경험의 재구성 또는 재조직으로서의 교육은 경험의 의미를 더해주고, 다음 경험의 방향을 결정할 능력을 증대시킨다고 말할 수 있다. 경험의 의미를 더해준다는 것은 처음의 충동적이고 맹목적인 형태로 이루어지는 활동이 점차 그것들의 관련과 연속성을 더 잘 지각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다음 경험의 방향을 결정할 능력을 증대시킨다는 것은 장차 일어날 일을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하여 보다 잘 예견함으로써, 좋은 결과를 얻고 나쁜 결과를 피하도록 사전에 준비할 수 있다는 뜻이다.
경험의 계속적인 재구성으로서의 교육은 그것이 다른 교육관과는 달리 결과와 과정을 동일한 것으로 본다는 특징이 있다. 즉 하나의 활동 과정으로서의 경험이 진행되어 완결에 이르게 되면, 그 완결은 또한 새로운 경험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이는 또한 개인적인 것과 동시에 사회적인 것이기도 하다. 미성숙한 개인에게 그들이 속하고 있는 사회 집단의 정신을 채워주는 동시에 인간의 보다 나은 희망을 실현할 수 있는 도구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4. 교육 목적의 의미

목적의 문제에 있어 계속성의 유무는 중요하다. 만일 학생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교사의 일방적 지시에만 의존한다면, 또는 교과 내용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면 교육 목적을 논한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 된다. 목적이라는 것은 활동이 질서정연하게, 순서에 따라 이루어질 때, 곧 하나의 과정을 점진적으로 완성하는 식으로 되어 있을 때에만 해당된다. 목적은 누적적인 성장의 결과로서, 가능한 종결 상태에 대한 사전의 예견이 가능할 때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 예견은 세 가지 기능을 한다. 첫째, 그것은 현재 주어진 조건을 세밀하게 관찰하여, 결과에 도달하는 데에 어떤 수단을 쓸 수 있는지를 살핀다. 둘째, 그것은 수단을 활용함에 있어서 적절한 순서 또는 계열이 어떤 것인지를 시사하며, 가장 경제적인 선택과 배열을 할 수 있도록 한다. 셋째, 그것은 여러 가지 대안 중에서 가장 적절한 것을 선택할 수 있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견된 결과로서의 목적은 활동의 방향을 지시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예견된 결과로서의 목적을 가지고 활동한다는 것은 자동 기계처럼 움직이는 게 아니라, 의미를 가지고 활동한다는 뜻이 된다.
좋은 목적의 기준은 첫째, 목적은 현재 조건의 자연적인 산물로 나와야 한다. 목적은 이미 진행 중인 것에 기초를 두어야 하며, 현재의 자원과 난점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곧 목적을 외적 원천 또는 앞으로 실현해야 하는 쪽으로 정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목적은 내적 원천, 지금 해야 할 일로 결정되어야 한다. 둘째, 처음의 목적은 잠정적인 것이다. 좋은 목적은 현재 가진 경험을 조사하여, 그것을 다룰 잠정적인 계획을 세운 뒤에 그 계획을 끊임없이 염두에 두되, 새로운 조건이 발생함에 따라 수정되어나가는 그러한 목적이다. 요컨대 좋은 목적은 ‘실험적인 목적’이며, 행위에 의하여 검증되면서 끊임없이 성장하는 목적이다. 셋째, 목적은 언제나 활동을 구속하지 않고 자유롭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는 목적이 곧 활동 또는 과정이 곧 결과라는 생각과 일치한다. 예를 들어 토끼를 쏜다고 했을 때, 토끼를 얻는 것이 목적이라기보다는 토끼를 쏘는 것이 바로 목적이라는 것이다. 활동을 구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런 뜻이다.
좋은 교육 목적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몇 가지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교육 목적은 교육을 받을 특정한 개인의 내재적 활동과 필요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 흔히 교육은 어른이 중요시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지기 쉽다. 이는 교육 받는 사람의 능력이나 취향과는 별개의 것이다. 좋은 교육 목적은 바로 이점에서 벗어나 개인의 특수한 능력이나 필요를 고려하여 설정된다. 둘째, 교육 목적은 수업을 받는 학생들의 활동과 협동하는 방법을 직접 시사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교육 목적은 학생들의 능력을 이끌어내고 조직하는 데에 필요한 환경이 어떤 것인지를 시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육 목적이 필요한 절차를 이끌어내고 그 절차는 다시 교육 목적을 검증, 수정, 확장할 수 있게 할 때, 그것은 좋은 교육 목적이 된다. 셋째, 교육자는 이른바 일반적이고 궁극적이라고 하는 목적에 대하여 경계를 하여야 한다. 이는 일반적이고 궁극적인 목적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 그러한 목적이 특수한 것으로부터 유리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실상 목적은 일반적인 게 좋은데, 단 그것은 우리의 안목을 넓혀 주고, 더 넓은 범위의 결과를 고려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4. 교육 목적으로서의 자연적 발달과 사회적 효율성

교육 목적으로서의 자연적 발달에 관하여 듀이는 루소의 생각을 빌고 있다.
▪ 교육의 목적으로서의 자연적 발달은 신체 기관, 그리고 건강과 힘의 중요성에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 자연적 발달이라는 목적은 몸을 움직이는 것의 존중이라는 목적에 즉각적으로 연결된다. 이를 듀이는 아이들은 항상 움직이고 있으므로 사물을 탐색하거나, 자료를 취급하거나, 놀이와 게임을 하는 데에 신체를 활용하여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 자연적 발달이라는 일반적 목적은 아동의 개인차 존중이라는 목적을 시사한다.
▪ 마지막으로 자연을 따른다는 목적은 아동의 기호나 흥미가 어디서 생기며 어떻게 성장, 소멸하는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아동의 성장이 각기 불규칙하게 이루어진다는 점을 인정하는 가운데서 그의 성장을 도와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사회적 효율성이라는 측면에서의 교육 목적은 다음의 둘로 생각할 수 있다.
▪ 사회적 효율성은 산업적 능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는 쉽게 말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자녀를 양육하는 능력을 가리킨다.
▪ 사회적 효율성의 목적은 또한 적 효율성 또는 시민으로서의 자질이라는 요소도 포함하고 있다.

* 요약

교육의 과정은 그 자체가 목적이며, 그 과정이란 경험의 계속적인 재조직, 재구성, 변형의 과정이기도 하다. 교육은 성장하는 힘을 조직적으로 길러줌으로써 삶의 과정에서 끊임없이 학습할 수 있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다.


Ⅱ. 존 듀이의 교육철학에 있어서 ‘경험’의 개념

1. 경험의 의미

경험이란 능동적 요소와 수동적 요소의 특수한 결합이다. 능동적 요소는 ‘해보는 것’을 말하며, 수동적 요소는 ‘당하는 것’을 말한다. 경험의 성과 또는 가치는 이 두 측면이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단순한 활동은 경험이 아니다. ‘해 보는 것’으로서의 경험은 변화를 가져오지만, 그 변화는 만약 거기서 흘러나오는 결과라는 되돌이 물결과 의식적으로 관련되지 않으면 무의미한 옮김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아이가 실수로 난로에 손을 데었을 때, 그는 그 결과로 고통을 느끼게 된다. 여기서 경험이란 손을 데인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결과 얻게 되는 고통까지를 말한다. 여기서 아이는 의미를 얻게 되는데, 경험은 바로 이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맹목적이고 변덕스러운 충동은 개인에게 별다른 누적적 성장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경험으로부터 배운다.’는 것은 우리가 사물에 대해서 하는 일과 그 결과 사물에서 받는 즐거움이나 고통 사이를 전후로 연결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맹목적이고 변덕스러운 충동 따위의 경험은 참된 의미에서의 경험이라 할 수 없다.
이제 내릴 수 있는 두 가지 경험의 의미는 첫째, 경험은 일차적으로 수동-능동의 관계이다. 경험을 일차적으로 지적인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둘째, 경험의 ‘가치를 재는 척도’는 경험에 들어 있는 관계성 또는 경험에 연결되는 계속성의 지속 여부에 있다.
경험을 함에 있어 지금까지 학교는 ‘심신이원론’적인 태도를 보여 왔다. 마음이나 의식이라 불리는 것과 신체적 기관의 활동을 단절시켜 왔다는 것이다. 이의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신체적 활동은 보통 불필요한 침입자로 간주된다. 즉 이원론적 사고에 의하면, 신체적 활동은 정신적 활동과 아무 관계가 없기에, 그것은 방해요, 처단해야 할 라 생각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보면 신체적 활동은 정신적 활동과 분리될 수 없으며, 신체적 활동의 능동적 참여가 없는 교육적 효과란 보잘 것 없는 것이 된다. 신체적 활동이 정신 작용에 방해가 되는 면도 물론 있으나 그렇다고 무시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본문내용

생활 수단에 대한 관심과는 거리가 먼 유식 계층이 사용하는 지능에 상응한다.
둘째, 또 하나의 대립은 ‘학습’이라는 단어의 두 가지 의미에 나타나 있다. 학습(학문)이라는 것은 알려진 지식의 총화, 책이나 학자들에 의하여 전해 내려오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외적인 것을 가리킨다. 또 한편 학습이라는 것은 개인이 공부를 할 때 하는 ‘활동’을 가리킨다. 그것은 능동적인 것이며, 개인이 주체가 되는 개인적인 일이다. 여기에 나타난 이원론은 외적인, 흔히 하는 말로 객관적인 지식과 순전히 내적인, 주관적인, 정신적인 지식 사이의 이원론이다. 사회적인 면에서 보면 이 구분은 권위에 의존하는 삶과 개인에 의하여 자유롭게 영위되는 삶의 구분에 해당한다.
셋째, 앎에 있어서의 능동과 수동의 이원론이다. 순전히 경험적이고 물리적인 사물은 흔히 인상을 받아들임으로써 알게 된다고 한다. 이와는 달리, 합리적 지식이나 정신적 사물에 관한 지식은 마음 내부에서 발동되는 활동에서 나오며, 이 활동은 감각이나 외적 물체와의 접촉에 의하여 훼손되지 않고 거기서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더 잘 수행된다. 사회적인 면에서 보면, 이 구분은 사물에 대한 직접 관심에 의하여 통제되는 사람과 자신의 교양이나 인격을 자유롭게 함양하는 사람의 구분에 상응한다.
넷째, 지력과 정서도 대립된 것으로 들고 있다. 정서는 순전히 사적, 개인적은 것으로서, 사실과 진리를 파악하는 순수한 지력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오직 예외가 있다면, 지적 호기심이라는 정서가 지력과 관계가 있다고 보는 정도이다. 지력은 순수한 빛이며 정서는 마음을 어지럽히는 열이다. 마음은 진리를 향하여 밖으로 눈을 돌리는데 비하여, 정서는 안으로 개인적인 득실을 따진다. 이상의 모든 이원론적 구분은 결국 한 가지, ‘아는 것’과 ‘하는 것’, 이론과 실제, 행동의 목적이요 정신인 마음과 행동의 기관이요, 수단인 몸의 구분으로 귀착된다.
이원론은 계속성의 원리에 의하여 대치되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생리학의 발달, 그리고 그것과 관련된 심리학의 발달은 정신 활동과 신경 조직 사이의 밀접한 관련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목수의 일을 연속적이라든가 계속적이라든가 초점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전의 행동이 다음에 할 행동 방향을 결정해 준다는 뜻이다. 즉 나중의 행동은 앞에서 이미 이루어진 결과를 고려하여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지식을 가진다는 것은 활동과는 유리된, 그 자체로서 완전한 어떤 것이 아니라 활동을 재조직하는 것과 관련되어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이다.
둘째, 생물학의 발달은 진화론의 대두와 더불어 위의 주장을 한층 더 확실하게 해주고 있다. 유기체가 진화한다는 이론은 곧 생물은 세계의 한 부분으로서, 그것과 함께 변천을 겪고 그것과 운명을 같이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한 생물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그 주위에 있는 사물과 자신을 지적으로 동일시하며,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이 장차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예상하고, 그것에 따라 활동을 조정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만약 살아 있는, 경험하는 존재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활동에 긴밀하게 참여한다면, 지식은 곧 이 참여의 방식이며, 그 가치는 그것이 가지는 효과에 있다. 지식은 결코 냉담한 관람자의 안일한 관조가 될 수 없다.
셋째, 지식을 획득하고, 또 그 지식이 단순한 의견이 아닌 확실한 지식임을 보장하는 방법으로서의 실험적 방법은 지식의 이론에 변화를 가져온 또 하나의 중요한 세력이다. 실험이라는 것은 맹목적으로 반응하는 것과는 다르다. 사실상 우리가 하는 행동 모두를 실험이라 할 수는 없는데, 실험이라 할 수 있는 것과 맹목적인 반응인 것의 구분은, 활동이 결과를 주시하고 장차 비슷한 사태에서 예측과 계획을 세우는 것과 관련되느냐, 아니냐로 할 수 있다. 실험이라 할 수 있는 활동은 관련이 되는 것으로서, 이런 활동이야말로 의미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 지식의 이론(방법론의 학파들)
지식의 기능은 한 경험이 다른 경험에 자유롭게 활용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 여기서 ‘자유롭게’란 말은 지식과 습관이 원리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습관이라는 것은 개인이 경험을 통하여 변화하는 것을 뜻하며, 이 경우 변화하는 것은 장차 동일한 방향으로 행동을 더 쉽게, 더 효율적으로 하게 되는 행동의 성향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습관도 하나의 경험이 다음의 경험에 활용될 수 있도록 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그러나 습관에 지식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 활용이 잘 될 수 없다.
지식을 정의하면, 지식이라는 것은 ‘한 물체가 어떤 주어진 사태에 적용될 수 있는가 하는 관점에서 그 물체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관련성을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완벽한 지식은 새로운 경험이 제시하는 문제점을 해결하는 데 경험이 유리한 방향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하는, 상호 관련의 조직망을 나타낸다. 요컨대 지식을 포함하지 않은 습관은 외곬의 고정된 해결 방식을 제공하는 데 비하여, 지식은 넓은 범위에 걸친 습관 중에서 적절한 것을 선택하는 것을 말한다.
지식의 ‘내용’은 이미 일어난 일, 이미 끝난 것, 완전히 낙착되어 확실하게 된 것을 다루지만, 지식의 ‘착안점’ 또는 ‘관심’은 미래에 있다. 왜냐하면, 지식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이해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스콜라 철학, 감각주의, 관념론, 실재로, 경험론 등 상당수의 학파들은 이 사실을 부정하고 있다. 그들은 지식을 장차 해야 할 일에 소용된다든가 하는 것과는 관계없이 그 자체로서 완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지식이 학생 개인의 삶에 결실을 가져오지 않는 한 그 지식은 아무 쓸모없는 지식에 불과하다.
* 요약
지식이라는 것은 한 물체가 어떤 주어진 사태에 적용될 수 있는가 하는 관점에서, 그 물체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관련성을 파악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상적으로 완벽한 지식은 새로운 경험이 제시하는 문제점을 해결하는 데 과거의 경험이 유리한 방향으로 활용될 수 있는, 그런 상호 관련의 망조직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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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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