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의 문제 WCC문제, 역사적 전개과정>!!!
본 자료는 4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해당 자료는 4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4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분열의 문제 WCC문제, 역사적 전개과정>!!!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김의환 박사는 “한국 보수주의 교회를 역사적으로 고찰할 때 해방 후 오늘날까지 한국 장로교회가 분열을 거듭한 여러 가지 원인 중의 하나는 국제적인 교류에 있어서 바른 지식과 판단의 결여를 들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 발언은 1970년에 발행된 자신의 저서인 “도전받은 보수신학”에서 밝힌 내용이다.

박형룡 박사 역시 같은 시기인 1971년 10월에 기독신문을 통하여 “신복음주의 비평”을 통하여 자신이 지도했던 신앙동지회가 1953년 7월에 한국 복음주의협회(NAE)를 조직하였고 박형룡 박사의 찬성하에 이루어진 NAE를 회고하면서 “총회가 W.C.C.에 가입한 것이나 교직자들이 NAE를 조직한 것이나 다 교회의 국제 친선 교제에 열중하여 잘 살피지 않고 경솔히 한 일이었다”고 고백하였다. 즉 박형룡 박사 역시 1953년의 “한국NAE” 역시 국제적인 교류에 대한 판단 착오를 인정한 셈이었다.

신앙동지회가 중심이 된 “한국복음주의협회”(NAE)는 1954년 이후부터 등장한 W.C.C.와의 대결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진행되었다. 1959년까지 치열했던 NAE와 W.C.C.의 대립은 결국 우리 총회 안의 거대한 국제적인 기구와의 교류 문제로부터 출발하였으며 이로 인한 정치적, 교권적, 신학적 문제가 얽혀 장로회 총회는 1959년 제44회 총회에서 합동과 통합이라는 두 교단으로 돌이킬 수 없는 분열의 아픔을 겪게 되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W.C.C.와 NAE의 국제기구와의 교류가 어떻게 진행되었고 이 문제가 어떤 형태로 분열의 씨앗이 되었는가를 살펴야 할 것이다.

1947년 4월 18일 대구제일교회에서 개회된 제33회 총회는 “명년에 개최된 세계교회연합회에 대표 파견키로 하다(W.C.C.)” 라고 결의하였다. 이 같은 제33회 총회 결의에 따라 1948년 제34회 총회에서는 “세계기독교 연합회 총회 경비 보조로 백불”를 지원했고 “김관식 목사의 세계기독교 연합회 출석을 위하여 매삭여비로 백불씩을 보조”하기로 결의하게 되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W.C.C. 창립총회에 김관식 목사를 옵저버 자격으로 대표를 파견하여 참석하였다. 그로부터 6년 뒤 제2차 W.C.C. 총회가 1954년 8월 15일부터 31일까지 미국 일리노이주 에반스톤에서 열렸다. 이때 총회에서 파송한 대표는 이미 1953년 제38회 총회에서 “세계기독교 연합회에 초청한 대표 2인 선정건은 노회장회에 일임하여 공천하기로”결정하였다. 제40회 총회(1955) 때 총무 보고에 의하면 “김현정, 명신홍 목사는 W.C.C.(에반스톤) 대회에 참석한 일”에 대해 보고한 것으로 보아 노회장회는 제38회 총회에서 일임해 준 대표를 김현정, 명신홍 목사 2인을 공천했음을 알 수 있다.

총회는 두 사람을 대표로 파송하여 W.C.C.의 신학적 입장과 성격을 정확히 파악한 후 보고해 줄 것을 요청했다. 장로교 외에도 감리교가 정식 대표를 파송했고 한국기독교 연합회와 YMCA가 대표를 파송했으며 김정준도 이때 신문기자의 자격으로 참석했다. 이 대회는 “세계 희망은 그리스도이다”라는 주제로 전 세계 163개 개신교단 가운데 132교단과 헬라정교회에서 파송한 1242명의 대표들과 499명의 방청객을 포함 24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에반스톤의 노스웨스턴 대학(Northwestern University)에서 열린 것이다.

제2차 W.C.C. 총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대표는 총회에 보고한다. “W.C.C.에 참석하였던 김현정 목사의 보고 강연”이 있었다. 그러나 이때 큰 잘못은 W.C.C. 총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대표들은 “W.C.C. 총회의 자유주의적 노선을, 그 때 참석한 대표들로부터 충분히 보고 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참석하고 돌아온 두 대표인 김현정 목사와 명신홍 목사의 상반된 보고는 한국장로교회 안의 두 조류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다. 1956년 9월 제41회 총회(회장 이대영)는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찬반양론을 벌린 끝에 에큐메니칼 연구위원을 발족시키게 되었다.

“경북노회 차태화씨의 헌의한 에큐메니칼 연구위원을 설치하여 달라는 건은 허락하고 위원은 한경직, 안광국, 황은균, 전필순, 유호준, 박형룡, 박병훈, 정규오 제씨로 선정하여 주실일이오며.”

위원 구성은 에큐메니칼을 지지하는 자로서 한경직 전필순 유호준 안광국 목사였으며, 반대자는 박형룡 박병훈 황은균 정규오 목사였다. 위원회 위원장은 한경직 목사 서기에는 정규오 목사로 조직을 구성하였다. 이러한 구성 분포가 말해 주듯 한국장로교회 총회 안에는 에큐메니칼을 지지하는 그룹과 이를 반대하는 그룹으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에큐메니칼 운동을 지지하는 실질적인 지도자는 당시 영락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한경직 목사였으며, 이 운동을 반대하는 실질적인 지도자는 박형룡 박사와 정규오 목사였다. 한경직 목사는 WCC를 이끌고 있었으며, 정규오 목사는 NAE를 이끌고 있었다.

1956년 9월 제41회 총회에서 에큐메니칼 연구위원이 구성된 이후인 같은해 12월 13일에 기독교서회 사무실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의 지지자인 한경직 목사의 사회로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강의를 2일 동안 실시했다. 연구위원회를 상대로 하여 에큐메니칼 운동을 객관적으로 조명해 보자는 의도에서였지만 강의는 이 운동을 지지하는 쪽의 의도대로 일방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날 마포삼열 선교사의 아들 마삼락 선교사는 에큐메니칼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강의를 하였는데 1910에 조직된 세계선교협의회(I.M.C)에 뿌리를 둔 W.C.C.가 교회의 연합운동이지 한 교회를 세우려는 세계교회 단일화 운동은 아니라는 사실, 에큐메니칼 운동이 이제 세계적인 추세라는 사실, W.C.C.는 특별한 교리가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주로 믿는 교파의 연합”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둔 신앙연합운동이라고 강의를 하면서 앞으로 한국교회가 세계교회 가운데 하나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에큐메니칼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야 한다는 입장을 강력하게 천명하였다. 에큐메니칼 연구위원회는 연구결과를 제42회 총회(1957년)에 보고하였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제42회 총회, 회의록, 65-66; 에큐메니칼 연구 위원장 한경직씨의 보고는 다음과 같이 받기로 가결하다.

<보고서> 1957년 9월 23일. 에큐메니칼 연구위원회 위원장: 한경직
총회장 귀하. 다음과 같이 보고하나이다.

1. 조직- 위원장: 한경직 서기: 정규오. 위원: 전필순 유호준 황은균 박형룡 박병훈 안광국
2. 총회와 에큐메니칼 운동과의 관계
1) 1948(9)년 암스테르담에서 모인 W.C.C. 대회에 김관식 목사가 참석하였다가 귀국하여 보고함으로서 정식 가입하게 되었음.
2) 1954년 미국 에반스톤에서 모인 W.C.C. 대회에 본 총회에서는 김현정 명신홍 목사를 대 표로 파송하였음.
3) 에큐메니칼 운동이란 무엇인가?
에큐메니칼이란 말은 헬라어 오이쿠메네(?ικουμεευε)에서 나온 말로서 우주 혹은 한 집이란 뜻이다. 이 에큐메니칼 운동을 하는 지도자들 중에는 두 가지의 사상적 조류가 있는데
(1) 전교파를 합동하여 단일교회를 목표로 하는 이와
(2) 교회간의 친선과 사업적인 병합을 목표로 하는 이가 있다.

4. 본 위원회의 태도
친선과 협조를 위한 에큐메니칼 운동은 과거에나 현재에도 참가하고 있으니 앞으로도 계속 참가하기로 하며 단일 교회를 지향하는 운동에 대하여는 반대하기로 태도를 결정하였사오며

5. 청원 - 1) 관하 각 교회에 본 운동에 대한 사실을 주지케 하기 위하여 팸플릿을 출판코자 하오니 출판비로 금 30만환을 허락하여 주실 일이오며. 2) 본 위원회를 계속 허락하여 주시고 위원으로 인톤, 마삼락, 명신홍, 김형모 4씨를 보강하여 주실 일이외다.

이 같은 보고는 어느 한쪽의 입장을 반영하기보다는 이 운동을 지지하는 자들과 반대하는 자들 사이의 일종의 타협안이었다. 즉 단순한 친선과 협조라는 면에서는 W.C.C.를 지지하지만 교회의 단일화에 대해서는 반대한다는 것이다. 추가 임명을 요청한 네명 중에 명신홍 인돈 선교사는 반대하고 마삼락, 김형모는 에큐메니칼 운동을 지지하는 이들이었다.

1957년 연구위원들의 첫 연구보고는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 오히려 제42회 총회가 지나자 에큐메니칼에 대한 찬반논란이 더욱 격렬해졌다. 연구위원들의 견해차는 더욱 심화되어 타협점을 찾기가 점점 더 힘들어져 갔고 회의는 물론 대화와 토론도 불가능해졌다. 제42회 총회가 지난 후 에큐메니칼 연구위원회는 무기 정회에 들어갔다.

이듬해 1958년 제43회 총회에서는 아무런 연구 결과를 내놓을 수 없었다. 총회에서 에큐메니칼 연구위원들이 보고조차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은 얼마나 찬반논란이 심각했는가를 단적으로 말해 준다.

에큐메니칼 연구 위원장 한경직씨의 보고는 아래와 같이 받기로 가결하다.

1. 조직
위원장: 한경직 서기: 정규오
위원: 전필순, 황은균, 유호준, 정규오, 한경직, 박형룡, 박병훈, 인톤, 마삼락, 명신홍, 김형모

2. 보고
작년 총회에서 본 위원에게 위임한 에큐메니칼 운동에 관한 연구와 책자 발행에 관하여는 형편상 실행치 못하였음을 보고하나이다.

결국 에큐메니칼 연구 위원회는 조직보고만 했을 뿐 아무 보고도 없었다. 에큐메니칼 연구위원들이 아무 내용도 보고할 수 없었다는 것은 당시 얼마나 이 문제에 관한 찬반 논쟁이 치열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에큐메니칼 연구 위원의 한사람이었던 신학교 교장인 박형룡 박사의 소위 3천만환 사건이 일어났다.

본문내용

멀리 피해야 될 것이다.
박형룡은 한국복음주의 연맹에 대해서도 “N.A.E.(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는 WEF(World Evangelical Fellowship)의 미국과 다른 각국의 지부의 명칭이니 한국에는 ‘복음주의 연맹’이라고 칭하나 ‘한국 N.A.E.’가 더 잘 알려지는 명칭이다. 이 N.A.E.는 신복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진행되는 에큐메니칼 운동이니 W.C.C.소속 교파들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개인적으로 바른 신앙을 지킨다는 국제적 연합이다. ? N.A.E.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결국 W.C.C., 공산주의, 기타 과격한 신사상 운동들과 친선 우호 하는 일”이라고 평가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크리스차니티 투데이」, 칼 헨리, 한국복음주의 연맹, 로잔언약, 빌리 그래함 등에 대해서 신복음주의라고 비평한다. 이 같은 박형룡의 비평에 권성수는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박형룡 박사의 신복음주의 신학에 대한 이런 비판은 당시 교회사적 위치를 고려하여 평가되어야 하겠지만, 그가 살아 있다면 지금 현재의 한국 복음주의 협의회와 복음주의 신학회 활동을 어떻게 보겠는가 하는 질문이 솟구치는 것을 억제할 수 없다. 그의 신학전통에서 교육받고 현재 활동하는 많은 신학자들이 이상과 같은 신학적 태도를 가질 때 소극적이고 분파적인 활동을 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질문도 역시 제기된다.
계속해서 권성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경적 정통신앙과 신학을 사수하면서도 ‘성경에 따라 전통을 항상 개혁하는’ 자세로 창조적 학문 활동을 하며 개혁신학으로 한국과 세계에 뛰어 들어 공헌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 박형룡의 조직신학이 성경해석의 고귀한 신학적 테두리를 제공한 것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것이 오해되어 성경으로 하여금 삶 전체를 총체적으로 변화시키는 성경 자체의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쇠고랑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성경해석은 정통적 조직신학의 넓은 테두리 안에 있으면서도 성경의 지평을 바로 파악하고 그것으로 현대의 지평을 변혁시키도록 하는 적극적이고 역동적인 작업을 계속해 나갈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박형룡과 그의 시대는 분명 자유주의 신학, 신복음주의 신학, 현대주의 신학과의 투쟁을 위해서 조직신학적 접근에 의한 변증작업은 정통보수신학을 지키기 위한 유익한 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성경신학보다, 조직신학이 상위 개념의 신학으로 극찬 받은 시대였을 것이다. 이는 정규오의「박형룡 교의신학 전집 출간 기념설교」(1973년10월 29일)에 잘 나타난다.
총회를 진두지휘하는 어떤 이사는 조직신학 보다는 성서신학이 보다 중요하다는 발언 등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어떤 유력한 장로는 “박 박사님에게 당신이 목사이냐 당신이 한국교회와 총신을 망쳐 놓았다”고 주먹질을 하는 장로를 나는 목도했다. 어떤 목사교수는 박 박사의 입장을 공공연하게 비난하는 소리를 들은바 있다.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의 관계에 대한 체계적인 정립에 소홀하여 오로지 조직신학 관점이 상위개념의 신학으로 인정하고 있던 그 시대의 한계는 성경신학과 그 지평속에서 펼쳐지는 삶의 적용, 즉 권성수의 지적대로 “삶 전체를 총체적으로 변화시키는 성경 자체의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는 약점이 있던 시대였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또한 그 시대는 한국장로교회가 정착되는 과정에서 비진리와의 투쟁과 논쟁 속에서 변증적인 작업을 위해서는 조직신학의 방법론이 도움을 주었던 것은 사실이다.
박형룡은 N.A.E.을 신복음주의 신학으로 평가하며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1) 신복음주의자들이 근본주의를 혹평하고 있다. (2) 그들이 “과학의 빛에서 성경을 해석”고 있다. (3) 사회복음운동을 받아들이고 있다. (4) 신복음주의자들의 비분리주의(non-separationism)를 반대한다. 이와 같은 신학적인 이유로 신복음주의를 비판했다면 신학 외적 이유로 장동민은 총신과 총회 내 정치적인 역학구도 속에서 “신복음주의 비판의 신학 외적 요인들”에 관해 언급한다.
1953년에는 신학적으로 이상이 없다고 해서 박형룡 박사의 찬성하에 ‘한국 N.A.E.’가 조직되었다는 정규오의 언급은 N.A.E.에 대한 박형룡의 신학적 입장을 인정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10년 지난 후에는 박형룡은 N.A.E.를 신복음주의로 비판하면서 신학적으로 잘못되었다면서 1953년에 잘 살피지 않고 N.A.E.에 가입한 것은 잘못이며, 이제 “신자유주의 내지 신 이단 집단”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후에는 피해야 하며 1959년 합동과 통합측이 분열될 당시 합동측에서는 개인적으로 N.A.E.에 가입한 자들은 탈퇴해야 한다는 총회 결의를 따르라고 말한 것은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이러한 혹독한 경험을 한 대한예수교 장로회 제59회 총회(합동; 1974)는 “총회신학대학 교수로서 국내외의 조직체와의 관계하는 일은 이사장과 학장의 허락으로만 하기로 하다”는 결의를 하게 된다.
혼란의 사대에 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신학을 정립하고 교회를 지키는 일은 그냥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많은 희생의 대가를 치르면서 얻어진 하나님의 축복들이다. 2천년 교회사를 통해 볼 때 하나님은 시대 시대마다 순수한 하나님의 복음을 지키며 전승하도록 인도해 주셨다. 그 복음이 증거 되어진 곳에 교회가 설립되었고 그 교회를 통해서 지상 최대의 사명인 진리 투쟁이었다. 진리의 타협은 진리의 왜곡을 가져오고 그 결과 교회는 많은 혼란으로 이어진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시행착오를 범하며 정리하기에 시간이 없다. 그동안 한국장로교회는 나무나 많은 시행착오를 범했다. 단순히 외국 서적을 번역하여 그들의 주장을 반복하여 되풀이 한다고 해서 되는 그런 시대는 지났다. 충분한 비판과 검증을 통해서 성경적 신학을 정리하고 지킴으로 교회에 봉사하는 신학이 되었듯이 교회를 생각하는 신학적인 사명은 매우 중요하다. 선조들이 이룩해 놓은 거룩한 신학 작업들을 평가절하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 모두는 그런 분들이 이룩해 놓은 결과에 수해자들이다. 진리보수와 전승을 위해서 제도적인 차원 까지를 생각해야 하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2010.2.9.리폼드뉴스)
  • 가격3,000
  • 페이지수12페이지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10.0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00320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