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비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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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마카비 혁명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6), 예루살렘 성전에는 7년 동안 대제사장이 없었다. 그러나 셀류시드의 정치적 내분은 대제사장직을 다시 정치적 협상의 대상으로 만들고 말았다. 데메드리오 일세와 왕권 경쟁 관계에 있던 알렉산더 발라스(Alexander Balas/Epiphanes)는 팔레스틴에서 군사력을 키워 오고 있던 마카비 혁명군의 사령관인 요나단의 지지를 얻기 위해 대제사장권을 그에게 넘겨준다고 공포했다(주전 152년, 카일 10:20-21). 마카비 혁명군의 편에서 본다면, 이것은 유대 땅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돈독히 하는 것이었지만, 하시딤과 같은 경건주의자들이 편에서 본다면, 요나단은 사독 계열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제사장권의 승계에 정통성의 문제가 있었다. 아무튼 마카비 혁명군은 이때부터 대제사장직을 확보했고, 마카비 가문에 의해 세습적으로 계승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2. 경제적 변화
마카비 혁명을 통하여 얻은 경제적 성과는 무엇보다도 셀류시드 왕조에 지불해야 했던 세금과 빛을 면제받았다는 사실이다. 유대인들은 셀류시드 왕조의 통치하에서 소금세, 왕관세, 곡물세, 과일세 등 각종 세금에 시달려야 했다(카일 10:29-30). 이들 세금은 소농으로 있던 대부분의 농민들의 경제적 상태를 매우 악화시키는 것으로, 마카비 혁명군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도 이러한 세금 정책의 피해자들이었다. 셀류시드 왕조의 세금 면제에 대한 제안은 데메드리오 1세 때에 먼저 있었다. 알렉산더 발라스와 왕권 경쟁 관계에 있던 데메드리오 1세는, 전자의 도움으로 이미 대제사장이 된 요나단을 자기 진영으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유대인들의 각종 세금을 면제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요나단은 데메드리오 1세에 대한 불신 때문에 그의 제안을 무시했다.
세금 면제는 동생 요나단의 뒤를 이어 대제사장이 된 시몬 시대에 이루어졌다. 당시 셀류시드 왕조는 트리폰과 데메드리오 2세가 왕권 다툼을 하고 있었는데, 전자와 불화 관계에 있던 시몬은 후자를 지지하면서 세금 면제를 요청했다. 데메드리오 2세는 이 요청을 즉시 받아들여 유대인들의 각종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주전 142년, 카일 13:36-42). 이것은 마카비 혁명의 매우 중요한 성취 중의 하나로 시몬은 이때를 기준으로 하여 비로소 민족의 독립을 알리는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제 하스몬 왕조는 유대 전통적인 세금인 십일조를 통하여 재정을 확보할 수 있었다.18) 이러한 세금 정책의 변화는 일반 민중들의 경제적 부담을 훨씬 덜어 주는 것이었고 그들의 삶이 경제적으로 향상되는 것이었다(카일 14:8-12).
3. 정치적 변화
마카비 혁명의 성공은 정치적으로 먼저 유대인들의 자주 독립을 가져다 주었다. 주전 142년에 취해진 셀류시드 왕조로부터의 세금 면제는 곧 대제사장 시몬 체제를 중심으로 한 유대인들이 정치적 독립을 얻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유대인들은 이제 셀류시드 왕조에 대해서 부담해야 될 어떠한 의무도 없었다. 셀류시드 왕조는 예루살렘에 있는 친위 세력의 거점인 아크라에 대해서도 더 이상 지원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시몬은 주전 141년에 이곳을 완전히 점령할 수 있었다. 시몬은 유다와 요나단에 의해서 계속 유지되어 왔던 로마 및 스파르타와도 외교 관계를 갱신했는데, 이것은 유대의 정치적 독립을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것이었다(카일 14:16-24).
두 번째로, 정치군사종교적인 지배권이 하나로 통합되어 마카비 가문에 세습적으로 주어졌다는 것이다. 주전 140년에 열린 유대인들의 회의는 시몬을 비롯한 마카비 가문에게 대제사장권과 유대의 통치권 그리고 군대의 총사령관권을 세습적으로 부여할 것을 공식 결의 하였다(카일 14:25-49). 그러나 이 결정에는 “진정한 예언자가 나타날 때까지”(카일 14:41)라는 조건이 있었다. 이것은 비사독 계열인 마카비가의 대제사장권에 정통성의 문제가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마카비가와 다른 종파사이에 정치적 타협이 있었음을 말해 준다.19) 시몬 정권은 이제 대내외적으로 인정받는 명실 상부한 독립 정부가 되었다.
Ⅳ. 맺는 말
마카비 혁명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이것은 어떤 종류의 혁명이었는가? 마카비 혁명은 농촌에서 시작되었고 많은 농민이 참여하여(카일 14:8,12; 카이 12:1) 귀족 계층 혹은 지배 계층에 항거했기 때문에 농민 전쟁 혹은 농민 혁명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또한 셀류시드라는 외세의 침략과 억압 그리고 이에 동조하는 헬라주의자들에 대항하여 항전했기 때문에 민족주의적 반외세 전쟁의 요소도 내포되어 있다. 이밖에도 이 혁명이 안티오쿠스 4세의 종교 박해에 저항했다는 것과, 여기에 제사장 가문이 지도적 역할을 하고 하시딤과 같은 종교인들이 적극 참여하였다는 점에서 종교 전쟁의 요소도 있다. 따라서 마카비 혁명이 농민전쟁이냐 반외세 전쟁이냐 혹은 종교 전쟁이냐 하는 것은 이들 용어를 어떻게 정의하느냐 그리고 마카비 혁명의 어떤 점을 더욱 강조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한국의 동학 혁명에서 보듯, 농업 중심의 사회에서 농촌을 중심으로 일어난 혁명에 불만을 품은 농민들이 대거 참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외세의 억압에 대한 저항에 민족 자생의 종교 혹은 민족 종교가 깊숙이 연계되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마카비 혁명의 특성을 한 마디로 단정하기 어려운 또 다른 요인은 이 혁명이 오랜 시간에 걸쳐서 진행되었으며, 그 진행 과정에 따라 그 특성도 변했다는 것이다. 즉, 초기에는 종교적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항거의 성격이 매우 강했지만, 혁명이 진행됨에 따라서 외세와 이에 동조하는 자들을 몰아내려는 특성을 띠었으며, 마지막 단계에서는 하스몬 왕조라는 독립 정부를 세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카비 혁명이 시간의 경과에 따라 그 목표가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혁명의 긴 과정을 통해서 볼 때, 마카비 혁명은 결국 민족 독립 운동이었다고 규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결과적으로 유대 민족의 종교적경제적정치적 독립을 가져다 주었고, 셀류시드 제국의 대리자들을 몰아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독립 운동에서 종교는 민족 세력의 주요 결집원으로 그 역할을 담당했다.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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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2페이지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10.0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03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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