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직업관과 윤리 10년 후의 나의 직업 및 결혼에 대한 문제 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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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기독교 직업관과 윤리 10년 후의 나의 직업 및 결혼에 대한 문제 제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기독교 소명으로서의 직업관기
1. 소명으로서의 직업관
2. 기독교적 직업관
3. 나의 직업관

Ⅱ. 자신의 직업관과 10년 후에 직업에 대해 이야기

Ⅲ. 오늘날 결혼에 대한문제 제시

Ⅳ. 기독교 윤리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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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딛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은 행위가 아니고 믿음에 관한 문제이다. 나를 빼버리시고도 말이다. 여기서 친 백성이라는 것은 구약의 이스라엘을 두고서 하는 말인데, 이는 어린양을 증거하는 집단이다. 즉, 출애굽을 다시 한 번 시행해서 참 하나님의 백성을 신약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들어내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친 백성의 선한 일은 개개인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 근거해서 나온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 이것이 디도서의 주제이다.
(딛 3:4)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딛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기독교 윤리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선한 일을 행한다는 것도 아니고, 성령의 도움으로 한다는 것도 아니다. 참 기독교 윤리를 주장하려고 하면,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통해서 어떻게 일하시는가?" 이렇게 주장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실 윤리라는 말이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윤리라는 말 자체가 인간이 주체가 되고 행함을 하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윤리라는 말 자체가 모순인 것이다. 그러면 어떤 분들은, "주의 은혜로 내가 하는 것이나, 나를 통해서 주님이 하시는 것이나, 결과적으로 다 같은 것인데, 왜 그런 것을 가지고 시비를 거느냐" 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관심사(지향점)이다. 한 쪽은 자기를 증거하고 한 쪽은 주님을 증거하는데, 어떻게 같을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민중들을 잘 회유를 해 가지고, 접촉점을 만들어서 그들이 나름대로 선한 일을 하고 싶어하는 그 욕구를 만족시켜줄 것인가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민중들에게 신경을 쓴다는 것 자체가 주님이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을 펴놓고 교인들의 비위를 맞추어주고 교회부흥과 성장에 두는 사고방식 자체가 성경을 모독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그러한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생각이 아예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성경은 오직 보내신 자의 뜻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 나를 누가 보내었는가?
(요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곰은 재주가 넘고 돈은 중국 놈이 번다! - 십자가는 예수가 지고 돈은 목사가 버는 것이다. 같이 죽자고 하는데, 갈이 죽지는 아니하고 그 열매만을 따먹는 것이다. 주님이 죽었는데, 우리도 같이 죽어야지 살아서 윤리를 행하겠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만약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러한 윤리를 허락하려고 했다면 '의인은 없나나 한 사람도 없다' 라는 말을 안 했을 것이다.
2) 세상윤리와 기독교 윤리
세상윤리와 기독교 윤리는 실로 많은 차이기 있다. 언 듯 보면 윤리적인 면에서 같아 보인다. 그러나 그 내용은 정도의 차이가 크다. 요약해 보면 세상윤리는 그 대상이 이웃이며 이웃과의 관계에서 서로를 존중하며 서로를 인정하고 함께 하는 사회적 공동체로 적용 점은 윤리나 율법이 적용된다. 그러나 기독교 윤리는 그 대상이 이웃이 아니라 형제인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리스도의 핏 값으로 거듭난 형제들이다. 신약의 형제는 같은 자궁을 사용한 사람이라고 해석한다. 이는 문자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윤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들 즉 그 대상이 친 형제이며 법적용은 사랑이라는 것이다. 즉 사랑의 법이다.
세상 윤리는 이웃에 대해 율법이 적용되며 기독교 윤리는 형제에 대해 사랑의 법이 적용 된다. 즉 형제이기에 법적용에 앞서 사랑하라는 것이다. 영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영성적 대인관계는 형제의식에서 시작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적모델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셨을 때에도 야곱의 열두 형제를 부르시고 그들이 형제들의 국가임을 알게 하셨는데 이스라엘백성들은 남과 같은 의식으로 율법을 적용해서 살았다. 영적인 이스라엘인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로 살지 않는다면 다시 율법으로 흘러 서로를 판단하고 정죄하며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형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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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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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807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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