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특징적 가치 그리고 정립한 역사적 인물의 핵심사상과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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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불교의 특징적 가치 그리고 정립한 역사적 인물의 핵심사상과 의의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한국의 불교의 특징적 가치
2. 한국불교의 시대적 특징
3. 한국 불교의 정립한 역사적 인물의 핵심사상과 의의
4. 삼국유사에 나타난 신이한 이야기
5. 의상스님(625-702)
6. 원효, 의상 스님의 이성관
참고문헌

본문내용

예부터 움직임없는 것을 부처라 하네.
의상스님의 법성게는 한국불교 역사상 적어도 1300여 년 이상을 수많은 사람들이 독송해 오고 있다. 불교의식이 있을 때 마다 <반야심경>과 더불어 독송하기도 하고, 절에서는 새벽 도량석 때 스님들이 즐겨 독송하기도 한다.
그런데 의상이 원래 칠언 삼십구 이백자로 된 이 <법성게>만을 떼어서 지었던 것이 아니다. 이 게송을 오십사각의 도인(圖印)에 합쳐서 하나의 매우 간략한 저술로 완성시켰던 것이다.
의상스님은 <법성게>의 첫머리에 이것을 짓게 된 목적을, 이(理)에 의하고 교(敎)에 근거하여 간략한 반시(槃詩)를 만들어 이름에만 집착하는 무리들로 하여금 그 이름마저도 없는 참된 근원으로 되돌아가게 하고자 함이다.”고 밝히고 있다. 의상스님에 의하면, 이 저술은 결코 글자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하얀 백지도 의미가 있고 글자도 의미가 있다. 붉은 줄도 의미가 있고 굽어진 각도 의미가 있다. 특히 <법성게>는 세 가지의 세간(世間), 즉 물질의 세계인 기세간(器世間)과 인간들의 세계인 중생세간(衆生世間), 그리고 올바른 깨달음에 의한 지혜의 세계인 지정각세간(智正覺世間)의 모습을 나타내기 위하여 흰 종이 위에 붉은 도인의 줄과 검은 글자를 써서 만들었다.
백지는 기세간을 표한다. 백지는 원래 염색이 되어 있지 않다. 먹으로 점을 찍으니 검고, 주(朱)로 점을 찍으니 붉다. 기세계 이와 같다. 깨끗하거나 더러운 어느 한쪽에 치우쳐 있지 않다. 중생이 처하면 더러움에 물들고 현인과 성인이 처하면 맑고 깨끗하다. 그러므로 검은 글자는 모두 다 검고, 하나 하나는 다 같지 않다. 중생도 역시 이와같다. 번뇌무명이 모두 자신을 덮고 있고, 온갖 차별을 나타낸다. 그런가 하면 붉게 그린 줄은 지정각세간을 나타낸다. 붉게 그린 한 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끊어짐이 없이 모두 글자들 속에서 연속된 고리를 이루고, 그 빛과 색을 분명히 하고 있다. 부처님의 지혜도 역시 이와 같아 평등광대하여 두루 중생의 마음에 미친다. 십세(十世)가 서로 응하며 원만하게 밝게 비춰 준다. 이 때문에 이 도인은 삼종의 세간을 다 갖추고 있다. 이처럼 의상스님은 글을 쓰되 글자만을 쓰지 않았다. 색깔과 그림을 동시에 연결시키면서까지 이름이나 문자에 집착하는 무리들이 참된 근원으로 되돌아가기를 원했던 것이다.
6. 원효, 의상 스님의 이성관
원효와 의상, 이 두 스님은 우리 역사상 가장 찬란한 빛을 던져 준 고승이다. 신라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활동했던 이들 두 스님은 도반이며 진리의 벗이었다. 물론 원효는 의상보다 8년 연상의 선배다. 그러나 두 스님은 고구려에서 망명한 보덕 대종사로부터 <열반경(涅槃經)>과 유마경(維摩經)을 배웠다고 한다. 이들 두 스님이 함께 처음으로 당나라의 유학의 길을 떠났던 것은 진덕왕 4년(650)이었다. 신라 서울 경주를 출발하여 요동으로 갔지만 이들은 그곳에서 고구려의 순라군에게 잡혀 수십 일을 갇혀 있다가 다시 신라로 돌아왔다. 이처럼 1차 당나라 유학의 꿈은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들은 10년이 지나도록 구도의 꿈을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두스님은 문무왕(文武王) 원년(661)에 다시 두 번째로 당나라 유학의 길을 떠났다. 이때 원효는 깨달음을 얻어 중도에서 신라로 돌아오게 된다. 唐 나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서 항구로 가는 도중에 그들은 비오는 어느 날 밤 인가(人家)를 찾아 헤매다가 길가 언덕 밑에서 땅막(土龕)을 발견하여 거기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다.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 곳은 땅막이 아니라 오래된 무덤(古塚) 속이었다. 계속해서 비가 내리고 있으므로 그들은 또 하룻밤을 무덤 속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날 밤 그들은 귀신 때문에 잠을 이루기가 힘들었다. 여기서 원효스님은 크게 느낀 바가 있었다. 간밤에는 땅막이었기에 편히 잘 수가 있었으나, 오늘밤은 무덤이기 때문에 귀신의 장난으로 잠을 이룰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마음이 일어나므로 갖가지 현상이 일어나고, 마음이 없어지므로 땅막과 무덤이 둘이 아니다”<심법고종종법생(心法故種種法生) 심멸고감총불이(心滅故龕塚不二)>라는 진리를 깨달았다. 그리고 그는, “三界는 唯心이요, 萬法은 唯識이다. 마음 밖에 아무 것도 없는데 무엇을 어찌 따로 구하겠는가”<심외무법(心外無法) 호용별구(胡用別求)>하고는 중국으로 가는 길을 포기하고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러나 의상은 험한 뱃길을 헤치고 당나라 유학에 오른다. 당나라 등주(登州)에 도착해서, 그곳의 주장(州長)이자 신도인 유지인의 집에 잠시 머물렀다. 그때 그 집에는 선묘(善妙)라는 아름다운 딸이 있었는데 의상에게 첫눈에 반해버렸다. 선묘 아가씨가 의상스님에게 사랑을 고백했지만 젊은 구도자는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아가씨는 갑자기 도심(道心)을 발하여 “세세생생에 스님에게 귀명하여 대승을 배워 익히고 큰일을 이룩하겠습니다. 제자는 반드시 시주가 되어 필요로 하시는 생활품을 바치겠습니다.”라고 큰 원을 세웠다. 의상스님은 지엄의 문하에서 오랫동안 화엄학을 공부한 다음 문무왕 11년(671)에 귀국했다. 선묘 아가씨는 한 마리 용(龍)으로 변해서 신라 땅까지 스님을 따라왔고, 스님이 머물던 부석사(浮石寺)에 오래오래 살면서 스님을 도왔다고 한다. 원효스님은 의도적(?)으로 요석공주에게 접근, 설총이란 자식을 낳는 파계승으로 남았지만 의상은 철저하게 계를 지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동 시대를 살아왔던 원효스님과 의상스님은 극단적 삶을 살아왔다. 원효스님은 시장통 한 구석에서 고단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이들을 위해 붓을(저술) 꺽고 소성거사(小姓居士)라 지칭하여 무애(無=박)을 쥐고 무애(無=박) 노래를 부르며 무애(無=박) 춤을 추면서 방방곡곡을 두루 돌아다나며 교화하였다. 그러므로 움막 속의 거지나 더먹머리 아이들까지도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지극히 짧은 염불법을 통해 지금보다 나은 미래의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다면 의상스님은 후진 교육과 교단의 향상 및 국왕을 비롯한 모든 사람에게 존경받는 스승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교육사 및 교육철학 - 교육과학사
대 백과사전(사상편) - 태극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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